신화는 어둠을 무찌른 빛의 승리로 시작된다. 일상도 다르지 않다. 밋밋한 일상에 불이 켜지면 멋진 신세계가 열린다. 이 마법에 반해버린 유학파 미술학도가 5분 양초, 스파게티 샹들리에 등 감각적인 작품을 히트시키며 ‘빛의 전사’로 등극했다. 시크한 낭만과 은근한 유머, 소통의 추구가 담긴 빛을 연출하는 차세대 조명디자이너 박진우를 만났다.
빛에 빠진 디자이너
강남에 자리한 그의 디자인 스튜디오 쥐엔피크리에이티브(ZNP Creative)는 ‘거의 모든 것의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형광색과 원색을 과감히 사용한 인테리어와 조명, 영화사 소품실과 만화책에서 빼내온 듯한 진기한 오브제가 꿈틀댄다. 작업대에서 전구와 공구세트를 만지는 그는 초록색 점퍼와 빨간 체크무늬 바지를 입었다. 공간도 사람도 수채물감의 은은함이 아닌 포스터물감의 선명함을 지닌 펑키스타일이다. 그야말로 ‘자체발광’ 에너지가 넘친다.
“처음엔 검은색, 회색 같은 무채색을 좋아했는데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원색을 좋아하게 됐어요.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서 고상한 색을 선호할 것 같잖아요? 아니더라고요. 안개 끼는 날이 많고 해를 못 보니까 노년의 신사도 분홍색 넥타이를 하고 굉장히 밝은 톤으로 옷을 입어요.”
우울함을 걷어내고 유쾌함을 선사하는 원색처럼, 조명 또한 그의 삶에 햇살처럼 다가왔다. 금속공예를 전공한 그는 우연히 뮤직비디오 아트감독을 맡게 됐다. 각종 소품을 만들고 제작과정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조명을 접했고 빛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조명에 따라 공간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던 것. 조명에 대한 호감은 곧 감동과 작업으로 이어졌다. 대학졸업 후 밀라노에서 세계 최고의 조명디자이너 잉고 마우러(Ingo Maurer) 쇼를 보고는 빛의 예술에 매료돼 큰 영감을 받았고, 영국왕립예술대학 제품디자인 대학원에서 첫 프로젝트로 ‘5분 양초’를 탄생시켰다. 이는 산업디자이너로서의 첫 작품이자 그를 조명디자이너로 세상에 알린 히트작이다. 5분 양초는 해외에서 3만여 개가 넘게 팔렸다.
“5분 양초는 성냥갑에 담긴 1회용 조명이에요. 마치 꽃다발이 받는 순간 기쁨이 목적이듯이 5분 양초도 그런 식이죠. 성냥인줄 알았는데 열었을 때 초가 들어있다는 의외성이 즐거움을 줘요. 또 유럽은 양초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에 휴대가 가능한 포켓 캔들이 인기를 끈 것 같아요. 언제 어디서나 작은 초 하나만 켜면 평범한 일상이 이벤트로 바뀌니까요.”
즐거운 조명탐구생활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불을 켜서 몸을 데우고 꿈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듯이, 박진우는 스토리가 담긴 마음까지 환해지는 조명디자인을 추구한다. 파리의 퐁피두센터에 걸린 그의 대표작 ‘스파게티 샹들리에’는 기본적인 틀과 몇 미터의 빨간 전선줄이 전부이다. 샹들리에의 장식적 요소를 전선으로 대체해서 사용자가 자기식대로 전선줄을 연출할 수 있다. 사용자에 따라 디자인 형태가 바뀌는 것으로, 디자이너의 일방적인 창작품 전달형태가 아니라 사용자와 함께 하는 디자인이란 측면에서 큰 이슈가 됐다. 재작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사회적 분위기가 침체됐을 때는 ‘벼락부자 조명(overnight millionaire)’을 만들었다. 하늘에서 황금빛 달러가 비처럼 내리는 모양의 농담 같은 조명이다. ‘캔디트리 조명’은 살아있는 나무에서 조명이 자라난 것처럼 보이는 디자인으로 사탕처럼 달콤한 빛을 선사한다.
“제 작업은 조명기능을 이야기형태로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의 아트조명이에요. 경쾌한 컬러와 재미난 형태를 보고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해요. 좋은 조명이란 쓰기 편하고 아름답고 보이지 않는 디테일까지 철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종목적은 따뜻한 빛이죠.”
자정, 상상력이 꽃 핀다
빛을 사랑한 남자, 박진우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 많은 악동기질이 다분했다. 조립식을 유독 좋아했고 집안의 물건을 죄다 분해하여 고장 내는 바람에 부모님께 혼나기 일쑤였다. 학교보다 MTV와 <공각기동대><에반게리온>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는 신세대 디자이너다. 요즘도 애니메이션과 뮤직비디오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작업조건은 ‘밤’이라는 시간의 무대이다. 그의 출근 시간은 오후 2-3시. 일명 ‘오후반’이다.
“낮에는 기본 업무를 보고 밤에 직원들이 다 퇴근한 다음 불을 꺼놓고 작업 중인 조명만 켜놓고 일해요. 이 각도 저 각도에서 빛을 실험하고 전구도 바꿔 달아보죠. 아무도 없으니까 덜 민망하고 편하죠.(웃음) 밤 12시가 집중이 잘 되고 아이디어도 잘 떠오르고. 작업효율이 절정에 이르는 시간이에요.”
조명디자이너가 될 운명이었는지 고등학교부터 ‘야행성’이었다는 그. 지금도 세상의 전원이 꺼지는 자정이면 세포가 활성화 되면서 온몸이 깨어난다고 한다. 새벽 3-4시까지 어둠의 독무대를 활보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다. 사실 조명은 아름답지만 작업은 거칠고 고되다. 별도의 작업실은 작은 전파상과 목공소에 가깝다. 온갖 공구와 자재로 자르고 붙이고 전구를 매달다가 살짝 감전되거나 기껏 작업을 해놓고 전선을 연결시켰을 때 불이 들어오지 않아 좌절하기도 한다. 그렇게 숱한 밤에서 멋진 빛을 발명한 박진우는 네덜란드의 유명 디자인 잡지 '프레임(Frame)'에서 세계에서 주목 받는 100인 디자이너에 이름을 올렸었다. 이제 그의 이름에 붙던 ‘차세대’란 수식어를 대체할 새로운 작품 세계를 고민하고 있다. 대중에게 다가가는 심플한 생활조명과 시적인 깊이가 더해진 예술조명까지 두루 아우를 계획이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박진우의 빛의 제국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