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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인터뷰

문재홍 폴리아티스트 - 소리를 연기하는 남자


영화는 영화다. 헌데 주인공이 후루룩 쩝쩝 라면을 먹을 때 관객은 군침을 삼키고, 편의점 문이 쾅 닫힐 때 불안을 느끼며, 담뱃불이 지글거릴 때 가슴이 타들어간다. 스크린을 비집고 나오는 미세한 소리가 온 몸을 파고드는 순간 ‘활동사진’은 완벽한 사실성을 획득한다. 지푸라기를 비벼 담배 타는 소리를 만드는 문재홍 폴리아티스트. 그에게 영화는 소리다.

쓰레기 더미에서 소리를 꽃피우다  

이곳은 재밌는 소리 공장, 연일 계속되는 강추위도 아랑곳없다. 문재홍 씨는 일 년 내내 여름을 산다. 한 평 남짓한 녹음실에서 온종일 뚝딱뚝딱 소리를 만들다 보면 금세 땀에 젖는다. ‘발소리’를 녹음할 땐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섞일까봐 쫄바지를 입는다. 만족스러운 소리를 얻을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콰당’ 넘어지는 소리를 만들 땐 직접 쓰러진다. 때로 모래 먼지가 날리는 장면은 방독면을 쓰고 소리를 채취한다. 유리와 쇠를 마찰해 스테이크 써는 소리를 내고, 손가락이 슬근슬근 잘려나가는 끔찍한 소리는 상큼한 샐러리와 부침이로 만든다.

영화 효과음의 꽃이라 불리는 ‘폴리아티스트’는 이렇게 등장인물의 일거수일투족에 관련된 모든 소리를 수작업으로 제작한다. 첨단장비에 의존하는 앰비언스나 이펙트 음향과 달리 영화사운드 분야에서 유일하게 ‘아티스트’ 칭호가 붙는 이유는 그 때문. 문재홍 폴리아티스트 역시 자기만의 경험과 지식, 소리에 대한 감각을 발휘해 생생한 ‘삶의 소리’를 창조한다.

영화효과음의 꽃, 소리에 반하다

“현장 동시녹음은 마이크로 대사만 받고 그 외 나머지 소리는 거의 안 들리거든요. 옷 소리, 걷는 소리 등 다 일일이 소리를 만들죠. <방자전>에서 살 부딪히는 소리를 만드는데 제 피부가 거칠었어요. 너무 격정적이면 싸구려 에로영화 느낌이 나잖아요.(웃음) 두 사람의 사랑을 예쁘게 표현하기 위해서 손에 핸드크림을 아주 듬뿍 바르고 작업했죠.”

청소년관람불가 시대극 <방자전>부터 스릴러물 <실미도> <황해>까지. 수년간 수십여 작품에서 소리를 창조해낸 폴리아티스트 문재홍 씨. 그는 씨네키드 출신이다. 영화과에 진학해 감독을 꿈꾸었으나 녹록치 않아 그만두었다. 자연스레 동시녹음, 편집, 사운드 등 연출부 일을 섭렵했는데 어쩐지 사운드 분야가 가장 마음이 편하고 재밌더라는 그. 우연히 영화진흥위원회 폴리아티스트 인턴과정을 수료하는 행운을 누렸다. 우리나라 1세대 폴리아티스트 양진호 씨에게 전수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사운드전문가의 길을 갔다.

“일 년에 20작품 이상 작업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웠죠. 초기엔 선생님이 하는 그대로 다 따라하다가 차츰 나의 방식으로 시도해보면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만8년째 사운드 일을 하는데 할수록 재밌어요. 특히 영화가 완성됐을 때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느낌이 나니까 성취감이 커요.”

“평생 걸었지만 발소리가 가장 어려워요”

‘폴리(Foley)’라는 말은 헐리우드에서 활약한 효과음계의 대부 잭 폴리(Jack Foley)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스턴트맨 출신인 그는 각종 결투씬 효과음을 직접 제작했고 그 소리만으로도 관객들의 감흥을 이끌어냈다고 전해진다. 명칭의 유래가 말해주듯 폴리아티스트는 단순히 소리를 제작이 아닌 소리를 연기해야 한다. 그것도 매번 새롭게.

“이전 작품에서 비슷한 소리를 만들었어도 그 폴리음향을 다시 쓰는 경우는 없어요. 물 마시는 소리조차도 배우의 감정, 카메라와 떨어진 거리 등에 따라 다르고, 문손잡이 여는 소리도 비싼 문이냐 싸구려 문이냐에 따라 다르죠. 발소리가 제일 힘들어요. 평생 걸어 다녔는데도 너무 어려워요.(웃음)”

이유는 이렇다. 사람이 걷는 발소리는 하이힐, 운동화, 부츠 등 신발 종류에 따라, 풀밭인지 아스팔트인지 모래밭인지 노면상태에 따라, 즐거운지 심각한지 감정에 따라, 뚱뚱한지 날렵한지 아이인지 체형에 따라 제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발소리 전문 폴리아티스트가 있을 정도. 경력이 오래될수록 발소리를 잘 낸다고 한다. 그의 말을 반증하듯 문재홍 씨 작업실 한쪽 벽면은 신발 수십 켤레가 놓여있다. 이 밖에도 도포, 벽돌, 타이어, 지푸라기, 모래, 탬버린, 요리도구 등 만물상이 차려졌다. “이 쓰레기 더미에서 놀다 보면 사실적인 소리가 나온다”며 그가 악동처럼 눈빛을 반짝인다.

놀이하듯 날마다 소리 탐험 떠나다

“폴리에 정해진 공식은 없어요. 평소에 트레이닝을 하죠. 걸을 때 앞사람 뒷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 걷고, 먹을 때 소리 내면서 먹어 보고, 길가다가 쌓여있는 물건을 발로 차보죠. 이 정도 크기에선 이런 소리가 난다는 걸 기억해 둬요. 그러면 작업할 때 상황에 맞는 소리가 떠오르죠. 끈기 있게 시도하다 보면 생각했던 소리가 만들어져요.”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도입부 찌개가 끓어 넘치는 장면은 곧 닥쳐올 ‘가정불화’를 암시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소리 연기’가 요청됐다. 그는 젖은 걸레 사이에 인두를 넣어 국물이 넘치는 큰 거품소리를 만들고,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김치와 야채 사이 작은 거품은 사발면 면발에 빨대를 불어 보글보글 긴박한 소리를 더했다. 이처럼 한 장면을 위해 하루를 꼬박 바치기도 한다. 대개는 열흘에서 보름 정도면 한 작품이 완성된다.

“처음엔 영화에서 소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아니죠. 소리가 너무 튀어서 영화의 느낌을 해치면 안 되니까 작품을 살리는 자연스러운 소리를 고민해요. 한 때는 크레딧에 이름만 올라가도 좋았는데(웃음) 이젠 누가 알아주는 것보다 제 만족이 중요해졌어요. 노는 느낌으로 작업해요. 그래야 소리도 잘 나오더라고요.”

어두컴컴한 극장 한 귀퉁이에서 영화를 보다가 자신이 만든 소리에 관객들이 재밌어하면 “기분 좋고 뿌듯하다”는 문재홍 씨. 아름다운 순환이다. 그가 공들여 만든 ‘리얼한 소리’가 스크린을 통과해 다시 그에게로 흘러들어 ‘생생한 설렘’을 선사하니 말이다. 

 *  현대기아자동차그룹 사외보 모터스라인 2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