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고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면서
오 멋져라, 머리를 옆으로 흔드는 것은!
- 브레히트 <의심을 찬양함> 중에서
49년생 김승호, 48년생 전태일. 두 사람은 친구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던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를 원할 할 때는 서로를 몰랐다. 노동자와 대학생인 그들은 만날 수 없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야 인연이 열렸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피맺힌 외침에 삼동친목회 친구들 김영문, 신진철, 이승철, 임현재, 최종인이 ‘청계피복노조’를 만들었다면 “나를 따르라”는 간곡한 요청에는 김승호가 가만히 손 맞잡았다. 1970년 11월 13일 대학생 배지를 떼고 노동운동에 투신해 “아직도 전태일이냐”는 말을 들으며 새천년을 맞았고 그해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을 세웠다. 공부하는 노동자 전태일의 부활로 40년 세월 신실한 우정을 다지고 있는 김승호 대표를 만났다.
40과 10. 완벽한 균형을 지닌 숫자를 기념하는 풍토에서 올해는 각별하다. 전태일 분신항거 40주기이자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이하 노동대학) 개교 10주년이다. 김승호 대표의 일정표가 빽빽하다. 어제는 목포 오늘은 안산 내일은 구미. 전국 25곳을 돌며 노동대학 학생들과 간담회를 연다. 최근 화두는 <전태일 평전> 읽기 운동이다. 사서 읽고 돌려 읽으며 조직적 학습 분위기 조성에 힘쓴다. 말 뿐이었던 전태일 정신 계승을 위해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이다.
“올바름이 뭐냐, 목적이 뭐냐. 노동운동에서 이런 걸 얘기하는 게 다 무너졌어요. 공부가 지식 쌓기가 됐고, 니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다툼이 늘고 깊이가 얕아졌죠. 비리, 성추행 같은 도덕성 문제만 불거지고 노동현안이 실천적으로 쟁점화가 되지 않습니다. 대중운동이 긍정적 방향으로 가려면 올바른 것을 알아야 하고 주장해야 해요. 그러려면 공부가 필요하죠.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난 동지들은 ‘이걸 모르고 40년을 살았다니’ 라고 하죠. 전태일은 단지 투사가 아니거든요. 인간애와 통찰력과 문장력을 갖춘 그 사유의 깊이와 인간적 면모에 큰 감동을 받죠.”
대학생 김승호, 혁명을 꿈꾸다
그도 그랬다. 전태일은 번개처럼 다가와 천둥 같은 울림을 남겼다. 김승호는 69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엄혹한 시절이었다. 미국의 지원과 노동자 착취로 독점자본이 덩치를 키워갔고 자유당의 장기집권으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던 개발독재시대다. 그로서는 젊음의 고뇌와 역사의 고뇌가 중첩됐다. 입신양명의 욕망은 뒷전이고 사회변혁의 임무에 심장이 달아올랐다. 중국의 마오주의,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 우리의 6.3사태를 거치면서 “혁명은 엘리트가 이끄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막상 대학은 달랐다. 꿈꾸던 혁명본부가 아니었다. 69년 3선 개헌이 통과되면서 학생운동이 침체됐다. 서클과 학회도 미흡했다. 현실모순이 학습속도를 앞서갔다. 어쨌거나 몇몇이 머리를 맞대고 책을 파며 저항의 불씨를 키웠다. 박정희가 물러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구조적 모순을 봐야한다며 대외적 종속, 대내적 독점, 노동농민운동 강화까지,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더 나아간 전망이 논의되었다. 70년 11월 3일, 학생의 날 흥사단에서 학생회 내부의 토의내용을 발표했다. 그 자리에 백기완 선생이 참가했다. ‘민중주의’라는 새로운 조류가 대두되던 즈음이다. 그로부터 열흘 후 ‘민중 전태일’이 분신했다.
“분신이 불교에서도 없었고 부모님께 받은 생명이라 몸을 귀히 여기는 문화에서 몸을 불살랐으니 얼마나 절실했을까. 어렴풋이 양극화의 심각성은 알았지만 충격이 컸습니다. 우리 사회 제일 밑바닥에서 희생당하는 사람이 목소리를 낸 거죠. 역사의 주인공은 지식인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생각을 다듬어가던 중에 일어난 사건이니까 전태일의 죽음 앞에서 배웠다는 모습이 죄스럽고 부끄러웠어요. 그 순간 나는 지식인이란 거 내려놓는다. 이 대학은 졸업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청년 김승호, 친구를 따르다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 모두를 진지하게 만들던 때가 있었다(김정환). 전태일의 파장은 컸다. 노동계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내부에도 스스로 반성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동맹휴업이 일어났다. 교수들도 반성투쟁 대열에 합류했다. 학생 20명, 교수 10명이 학생회 휴게실에서 장작불 떼고 3박 4일간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그 자리에는 당시 교수였던 조순 전 총리와 김상곤, 장상환 등 진보인사들도 함께 앉아있었다. 한 목소리로 결의했다. 민중의 곁으로 다가가자고.
김승호는 얼마 후 강제징집을 당했다. 견고한 현실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였다. “민중이 당하는 것을 같이 당해야 같이 느끼고, 같이 분노해야 같이 싸울 수 있지 않겠는가.” 군대생활 3년 동안 먹물티를 뺐다. 휴가를 나와서도 대학 동료나 선후배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의 어려운 한자를 일러주고 법률용어를 해석해줄 친구, 신나게 데모하는 법을 가르쳐줄 아는 사람 하나 갖길 바랐던 전태일의 삶이 중지된 그 자리로, 김승호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지나온 다리를 끊었다.
“전태일은 나를 원래 위치로 돌아오게 했죠. 사고에 활기를 불어넣고 깨달음을 주는 친구였어요. 전태일 같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전태일이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요. 서울법대 뒤 낙산 언덕에서 학생들 시위하는 장면을 부러움에 차서 지켜보기도 하고……근데요, 만약에 전태일이 대학에 들어갔으면 얻은 것도 많겠지만 실망이 컸을 거예요.”
노동자 김승호, 세 번의 수배 받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학연대의 물꼬를 틔웠다. 김승호는 ‘적대의 장소’ 공장으로 들어갔다. 사회적으로도 시위나 항의를 넘어 시민들의 자기각성이 이뤄졌다. 80년대는 운동단체들, 위장취업자들, 해고노동자들이 조직화가 봇물을 이뤘다. 87년 7,8,9월 노동자총파업 깃발이 전국에 나부꼈다. 노조의 합법성이 커졌다. 그러나 90년대 사회주의혁명 전망이 스러지면서 노조운동의 기세도 사그라졌다. 그럼에도 김승호는 제조업을 넘어 철도, 체신, 전력 등 기간산업 등 노동운동 외연확장에 나섰고 한국통신 파업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견인한다.
“우리나라는 한국전력과 한국통신이 노조가 취약했어요. 외국의 사례를 봐도 기간노조는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부분이죠. 통신 동지들과 가까워졌고 95년 한국통신 5만 명 파업을 이끌면서 위험인물로 찍혔죠. 국가전복을 꾀한다. 배후에 주사파 있다. 간첩 소굴이다 등등. 근데 그게 아니에요. 90년대 들어서 노동운동 하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갔거든요. 남아 있더라도 사회주의 혁명은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나는 중간에 있었는데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이 다 오른쪽으로 가니까 어느 날 제가 제일 왼쪽에 남아있는 거예요!(웃음)”
김승호는 5·6공과 김영삼 정부까지 총 세 번의 수배령을 받는다. 처음은 86년 말 안산의 노동자권익투쟁위 활동과 관련해서 한번, 91년 2월 경수지역노동자연합 사건이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는 컸다. 한국통신 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다. 그가 지도위원으로 있던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에 이적단체라는 혐의까지 씌워졌다. 그러나 정권의 악착같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그해 11월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탄생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죽은 태일이가 살아 돌아온 듯 기쁘다”라고 말하던 감격의 순간이었다. 한쪽에선 그를 간첩처럼 묘사한 전단지가 나붙고 김승호 전담반이 꾸려졌다. 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간 수배는 풀리지 않았다.
수배자 김승호, 맑스-전태일에 눈뜨다
인생의 휴가가 도래했다. 청춘의 숨 가쁜 질주를 잠시 멈추고 호흡을 고르는 시기. 얼굴을 어루만지는 한낮의 햇살에 취해도 보고 느릿하게 책장을 넘기며 어둠을 맞은 불혹의 수배자는 “조용히 엎드려 지냈다.” 윗목에 밀쳐주었던 맑스-엥겔스 저작선집에 손이 갔다. 두툼한 600쪽 분량 6권을 팠다. 자본론도 1장 상품 편부터 완벽히 이해될 때까지 부딪혔다. ‘공황’ 편으로 IMF 분석에 도움을 받는 등 공부에 탄력을 받았다. “맑스의 이론은 빈틈없이 정확했다”
앎은 삶으로 넘쳤다. 어떻게 행동하고 살 것인가, 개별주체의 윤리적 물음. 장기 침체를 겪는 노동운동의 돌파구 어디서 찾을 것이며 대중 사상으로 무엇을 움켜쥐어야 혁명과 해방을 포기하지 않고 갈 수가 있을까, 집단주체의 이념적 물음. 두 가지 물음에 천착했다. 그렇게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던(김수영) 어느 밤, 우연히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한 구절 한 구절 마치 성서처럼 와 닿았다. 생생한 직관에 무릎을 쳤다. “진리는 가까운 데 있다는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평전을 다섯 번 정독했다. 현미경 댄 듯 두 눈에 달려드는 전태일의 말말말. ‘나의 전체의 일부’ 그리고 ‘인간은 고귀하다’
“그전에는 그 말이 그냥 스쳐갔어요. 대학생 때는 전태일 수기 타자본이 돌았고 그 뒤에도 여러 판형으로 전태일 평전을 읽었는데도 몰랐죠. 이게 키워드구나. 그동안 나는 왜 전태일을 착한 사마리아인 정도로 생각했는가. <나의 전체의 일부>란 표현은 휴머니스트의 연민 수준이 아니에요. 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나’라는 사적존재의 개념으로 이해되지 않는 게 사회주의에요. <인간은 고귀하다>도 예전엔 착목하지 못했어요. 근데 고귀한데 어떻게 지배를 받아요. 고귀함 생각하는 순간 지배를 생각할 수 없어요. 사회주의 사상의 핵심이 여기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맑스-전태일의 재발견. 아는 것과 깨닫는 것 사이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그 강을 건너자 비로소 보였다. 인간해방을 꿈꾸었던 전태일은 맑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온몸으로 체현한 인물이었다. 100년의 시차를 둔 철학자와 노동자, 둘 사이에 말이 겹쳤다. 맑스는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경구를 가장 좋아했다. 전태일은 1969년 12월 31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김승호는 ‘이론은 맑스, 실체는 전태일’을 선언헸다. 그가 운영하던 <민주노동연구소>단체이름을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로 바꾸었다. 전태일의 “나를 따르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그 간결하고 악착스러운 진리에 다시 한 번 생을 건다.
운동가 김승호, 전태일과 인터넷을 결합하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전담반이 없어졌어요. 나보고 자수하라는데 개인과 운동의 자존심이 있지 못하겠더라고요. 노동운동이 개량국면이었죠. 치열성이 떨어지고 노조간부들은 술과 고스톱을 하고 공부를 안 하는 분위기였어요. 연구소나 교육단체에서 책자도 안 나왔죠. 공부를 안 하면 운동은 쉽게 타락해요. 2000년에 들어서고 인터넷이 깔리면서 이제는 디지털이다 사방에서 그런 말이 들렸죠. 저게 괴물일 거 같았어요. 전자민주주의를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다, 작은 단위에서 많은 동지들을 상대로 가능하겠구나.
전태일과 인터넷을 결합하자. 내가 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간 배운 전태일 사상과 맑스주의를 가르친다면 오른쪽 쏠림을 왼쪽으로 돌리는데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반 수배상태에서 동지들과 반년 간 검토하고 알음알음 타진했어요. 알아봤더니 캐나다에서 사이버 노동교육을 하더라고요. 2000년 6월에 한겨레신문에 광고 내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죠. 아마 맑스 노동대학 한다면 못하게 했겠죠? 전태일노동대학 한다고 하니까 안 잡아가더라고(웃음)”
새천년, 공부하는 노동운동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그의 제안에 전국에서 노조간부와 현장 활동가가 모였다. 초기엔 학교 분위기가 밝았다. 학생들도 교수진도 의욕에 넘쳤다. 그러나 9.11테러를 기점으로 전쟁 공포와 금융공황이 깊어지고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골화로 진보세력이 약화되면서 노동대학도 동력을 상실했다. 학생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무렵 2006년 베네수엘라를 방문해 차베스혁명의 사례를 보고 온 김승호 대표는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은 민중이 만들어간다’는 확신을 얻고 노동대학의 급진화를 꾀했다. 다음 해 노동대학 학생모집 공고에서 ‘사회주의를 상상하자’는 슬로건을 감히 내걸었다.
노동대학은 총 3년 과정이다. 수업내용은 분업에 종속된 인간의 1차적 사회적 기능에서 벗어난 ‘전면적 개인’ 산출을 목표로 한다. 1학년에는 철학, 역사, 인문, 미술, 노동운동사 등 기초교양과정, 2학년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비판과 인간해방의 전망을 모색하는 기본이론과정, 3학년은 전문실무과정으로 시야를 세계로 넓혀서 세계 노동운동사, 사회주의 노동운동론과 노조, 정당, 시민사회 운동 등 실천적 학문이 포함된다.
교수진이 탄탄하다. 김수행 교수가 영국의 자본주의와 노자관계, 황지우 교수가 일반교양, 허석렬 교수가 사회학 등을 가르치고 김승호 대표도 노동운동사를 강의한다. 수업방식은 교재 읽기, 온라인 강의와 오프라인 강의, 그룹별 학습 및 토의, 토론방과 게시판을 통한 온라인 토론 등 입체적으로 이뤄진다. 사실 입학생에 비해 졸업생이 많지는 않다. 10년 만에 졸업장을 받는 늦깎이 학생도 있다. 하지만 일단 공부한 사람의 눈빛과 자부심은 남다르다.
“문건 하나 읽는 것도 학출(학생운동 출신 노동자)은 괜찮지만 대학 안 나온 사람들은 힘들거든요. 자신감을 얻고 계급투쟁의 확신을 갖죠. 울산의 어느 동지가 그러더군요. 3년간의 가혹한 학습을 마치고 나니까 앞이 보인다고. 늘 울분에 찬 투쟁을 해서 성질만 나빠지는 거 아닌가했는데 옳음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고요.”
혁명가 김승호 – 의심을 찬양하다
울산 노동자로, 부천 이주노동자로 전태일은 부활한다. 김승호는 “한국사회에서 삶의 상상력을 자본이 독점하고 있다”며 “누구나 자본주의가 가장 인간성에 부합하는 것이고 경쟁은 필연이라고 생각한다”고 개탄했다. 하지만 맑스가 그랬듯이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며, 왜 노동자는 부한 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이 되어 ‘밑지는 생명’으로 살아야 하는지 전태일처럼 물어야한다. 위대한 의문부호를 품는 학문. 이것을 노동대학은 추구한다. 삶에 대한 분별을 깨치는 공부를 통해 혁명을 예비한다.
“공부만 잘 하기는 쉬워요. 암기력과 이해력만 있으면 돼요. 그러나 실천은 어렵죠. 누가 깨달은 걸 이해하는 건 참된 공부가 아니에요. 한 겹 뚫고 더 들어가는 것, 시간을 갖고 찬찬히 보면 깨달음이 깊고 넓어져요. 깨달음은 지능이 아닌 정신의 문제죠. 추구하는 가치가 뚜렷하고 치열할 때 지식을 맥락 속에서 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안다는 게 실천의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전태일은 생각이 많았어요. 왜? 왜? 왜? 라고 끊임없이 물었죠. 이것이 공부의 정석이고 공부하는 자세에요.”
사회주의, 고귀함, 노동자, 계급, 착취, 깨달음, 공부, 인간해방……김승호가 무시로 쓰는 이 농밀한 말들이 첫눈처럼 반갑다. 차고 시리고 따스한 눈송이 같은 말들. 한시도 길들여지지 않고 어지러이 떠도는 눈발 같은 말들. 그것은 40년 전 그의 몸에 괴물처럼 침입해 혁명정부를 세운 사람,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통탄하며 인간해방을 갈구한 전태일의 불꽃같은 소리다.
전태일이 스물 둘에 산화했고 40년이 흘렀다. 만약 삶의 유한성이 지속됐다면 김승호처럼 머리가 희끗하고 카디건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노년의 혁명가가 되어있으리라.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 사이에서 자리를 마련하고 인간의 고귀함을 설파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승호는 욕심낸다. <전태일 평전>을 젊은 세대한테 읽히고 싶다고. 그리고 또 확신한다. ‘희망의 가지를 잘린’ 젊은 세대들이 전태일을 알면 대단할 것이라고. 전태일이 불가피하게 부활할 것이라고. 40년 전, 김승호가 전태일에 감전되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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