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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단어를 채집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 <무진기행>  

아름다운 문장 한 줄 읽는 것으로 시작하자. 빼어난 문장이다. 독창적인 글쓰기의 묘미가 한껏 드러난다. 사랑한다고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는 것이야 문학작품에서 늘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새롭다. 덤덤하면서도 절절하다. 나는 읽으면서 내가 그가 된 것처럼 어색해서 고개 숙이고 입술을 비틀었다 폈다 했다. 저 문장의 핵심단어는 ‘국어’같다. 흔해 빠진 말인데 사랑, 어색과 배치되니까 신선하다. 색다른 울림을 자아낸다. 더군다나 하나도 꾸미지 아니한 담백하고 솔직한 아이 같은 표현의 어른스러움이라니.  

좋은 문장은 어려운 단어나 고급한 개념어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평범한 단어도 이웃한 단어들에 따라 의미가 살아나면서 선명한 전달력을 갖는다. 적재적소의 미학이다. 글 쓰려면 단어를 많이 알고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글의 기본 재료도 연장도 오직 ‘단어’다. 

살아있는 단어를 쓰라  

이외수는 <글쓰기 공중부양>에서 단어를 생어와 사어로 나누고 생어를 쓰라고 권한다. 생어는 오감을 각성시킨다. 아직 글쓰기에 발군의 기량을 습득하지 못했다면 될 수 있는 한 생어를 많이 사용해야 한다. 생어는 글에 신선감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시각: 달빛, 주름살. 청각: 천둥, 자명종. 후각: 비린내, 박하. 촉각: 모래, 양탄자. 미각: 꿀물, 고추장 등이 있다. 반면에 사어는 절망. 허무. 총명. 지혜 등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단어들이다. 사어로만 된 글은 이미지가 남지 않아서 글을 따라가기 어렵다. (하지만 김승옥의 <무진기행> 사례에서 보듯이 사어는 작가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생어로 변모한다. 기본을 충분히 습득한 다음의 이야기다.)

그놈은 흉기로 자주 자해를 하는 습관이 있다. 라는 문장보다는 
-> 그놈은 뻑하면 회칼로 자기 배를 그어대는 습관이 있다. 라는 문장이 훨씬 선명한 전달력을 가진다.
흉기와 자해라는 '사어' 대신에 회칼이나 배를 그어댄다는 '생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글쓰기비법에는 단어노트나 글감노트를 만들라는 것이 꼭 나온다. 그만큼 ‘단어’가 중요하다. 이외수도 오감에 해당하는 단어를 감각별로 하루에 최소한 열 개씩만 찾아서 노트에 정리해두라고 한다. 사실 나는 몇 년 전 이 부분(20쪽)을 읽다가 책장을 덮었더랬다. 중학교 때 연습장에 영어단어 써서 외우기 숙제가 생각나서다. 난 그 시간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글쓰기공부도 영어공부랑 비슷하다.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떤 학원에서는 수업시간마다 영단어 100개씩 외우게 하고, 어떤 학원은 스토리북 읽으면서 문장 속에서 모르는 단어 뜻 찾아가며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한다.

나는 후자를 택한 셈이다. 나도 단어/문장 노트가 있는데 감각별로 상황별로 단어를 정리하지 않고 아름다운 문장과 단어를 볼 때마다 적어놓는다. 비록 쓰자마자 휘발되어버리지만 ‘단어노트’의 잠재성은 크다. 내 손으로 한번 쓰는 행위를 통해 내 몸 어딘가에 저장하는 기분이다. 쓰는 동안이라도 그 단어와 문장을 되새길 수 있다. 그것이 반복훈련이 되면 단어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고 말을 부릴 줄 알게 된다. 글이 안 풀릴 때 훑어보다가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이외수의 단어훈련법 한 토막을 소개한다.

지금 그대 두변에 방치되어 있는 단어들을 무작위로 적어보라. 초겨울, 창문, 바람소리, 골목, 외등, 새벽, 눈시울 이란 단어를 채집했다고 가정하자.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이것만으로도 진실을 전달할 수 있다.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는  / 초겨울 바람소리 / 행여 그대가 아닐까 /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골목 저 멀리 외등 하나 /  눈시울이 젖은 채로 /
새벽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위에 널린 좋은 단어를 색색이 꿰어 보배로운 문장이 탄생했다. 그리고 단어를 고르고 이어붙일 때 ‘뜻’만이 아니라 ‘소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읽은 소리를 따라 읽는다. 리듬과 운율은 모든 문장에 필수요소다. 고요한과 평온한은 어감이 많이 다르다. 자꾸 읽어보면서 단어의 배치를 바꾸고, 더 참신한 단어, 더 적합한 단어로 바꿔보자. 활력 있고 울림 있는 문장이 될 때까지. '국어의 어색함'을 발견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