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에 휩싸인 혼란된 관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스피노자는 ‘공통개념’ 형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물에 대한 공포를 벗는 길은 나와 물의 공통리듬을 인식하는 것이다. 수영을 할 줄 아는 것은 물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외적 일치가 아니라 내적 일치. “신체들의 운동과 정지 또는 신체들 간의 결합과 해체의 관계를 그 내부로부터 찾아내는 일” 이것이 수영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는 것이고 수영을 할 줄 알면 물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공통개념은 사물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개념이다. 우리가 상상의 바다에서 벗어나 분명하고 뚜렷한 관념, 적합한 관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공통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고, 인식하는 것은 생산하는 것이다. “공통개념은 기쁨의 변용, 능력의 증대”를 가져온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자. 남녀가 만나서 부부라는 더 큰 개체화를 이뤘을 때 서로 능력의 증대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부부의 윤리학, 아이를 낳아서 엄마가 되었을 때 더 큰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한 노력이 엄마의 윤리학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쉽지 않다. 여자는 결혼과 출산을 통해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구속받는다. 관계가 단절된다. 엄마가 양육에 대한 부담, 불안, 공포와 같은 정서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이와 공통개념을 형성하는 일일 것이다. 나의 좋음이 아이의 좋음으로 표현되는 내적 일치. 공통개념 형성하기. 이는 끊임없는 시도와 물음 속에서 매번 발견해야 하는 ‘노동’이다.
첫애 세살 때. 예전 모임에 가느라 저녁에 아이 떼어놓고 외출했다. 그날따라 아이가 너무 많이 울었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억장이 무너졌다. 술자리 내내 좌불안석 죄의식에 시달렸다. 나는 B급 페미니스트이기도 했지만 동정과 연민이 많은 모성의 화신이기도 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 후로 ‘엄마도 엄마 인생이 있단다’는 얘기를 아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댔다. 5살 때는 아이 떼어놓고 나의 친구와 단둘이 동남아로 일주일 여행도 다녀왔다. 아이가 크면서 공부, 일 등 나의 활동을 늘렸다. ‘엄마의 자유=아이의 자유’가 되도록 매순간 고민했다.
덕분에 아이들이 어느 정도는 자립적으로 컸다. 사교육은 최소화했다. 둘째아이는 거의 안 한다. 아이들과 ‘내적일치’를 이루기 위해 인터뷰하고 온 다종다양한 사람들 얘기나 공부한 내용을 들려주는 등 ‘좋은 삶’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려 애쓴다. (잘 안 되지만^^;) 아들 녀석의 학업성적표는 좀 섭섭하다. 도무지 성에 안 찬다. 그런데 얼마 전 반에서 행복지수 테스트를 했는데 큰 점수 차이로 1등을 했단다. 아주 긍정적인 성격으로 나온 걸 보고는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단다. “엄마가 잘해주는구나!” 그 얘길 듣고 으쓱했다. 나의 부재가 아이들의 지옥이었던 초기에 비하면 엄마행복=아이행복으로 간극을 좁혀가고 있는 셈이다.
5. 엄마의 도덕 VS 에티카
‘아무도 믿지마. 엄마가 구해줄게’ 봉준호 감독 <마더>의 메인카피다. 난 저 문구가 불편했다. 모든 가치를 무화시키는 모성의 성전에 바치는 헌사. 이 땅의 모든 엄마에게 마더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다. 아이를 구원하는 건 삶이어야지 엄마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마더 권하는 세상에서 좋은 엄마로 살아가기. 엄마의 윤리학을 위해서는 니체 말대로 제2의 피부처럼 달라붙은 도덕부터 벗어야 한다. 도덕은 선악을 잣대로 무조건적 명령에 의해 강제되는 당위의 법률이라면 윤리학은 “특정한 조건 아래서 좋음과 나쁨을 파악하는 관계들의 규칙”이다. 도덕은 처벌과 심판이 가능하지만 윤리학에서는 어떠한 처벌도 심판도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선악개념에 의존하다보면 판단능력이 박탈된다. 도덕은 사물의 본성과 원인에 대한 이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당위, 명령, 의무로 주어진다. 그렇게 모든 상황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초월적 권한을 따르는 것은 판단능력의 상실이자 무지와 무능력이다. 예속을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고자 하면 도덕위에서 춤출 수 있어야 한다. ‘엄마는 이래야 한다’ ‘무슨 엄마가 그러느냐’는 사회적 통념과 강제를 넘어서 ‘엄마다움’을 새롭게 발명해내야 한다. 그렇게 사유하고 실천할 때 나의 고유의 능력을 발견하고 확장시켜 여성들이 엄마인 채로 바뀔 수 있으며, 그 변용능력만큼의 능력(자유)를 획득할 것이다.
6. 자유로워지기 위한 공동체
“신체가 다른 물체와 공통으로 갖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신은 더욱더 많은 것을 타당하게 지각할 수 있다.” 에티카는 4부 정리38부터 공동체로 나아간다. 정리71에서는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서로에 대해 가장 감사한다.”며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서로 가장 유익하며, 또한 가장 밀접한 우애로 결합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유인은 각자 고유한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기쁨의 관계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을 자신의 원리로 삼는다는 것. 개인적으로 에티카에서 가장 매혹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관계맺음으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무얼까. 아는 사람이 많으면 살기 편하고 좋은 인맥중심의 사회를 말하는 것, 즉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윈윈 전략과는 어떻게 다를까. 자유인의 연합은 CEO들의 인맥 넓히기와는 다를 것이다. 자본가의 정신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은 ‘참된 관념’의 자기 확장이 아니라 '개인의 부'를 증식하기 위한 사적 소유 확대의 수단일 뿐이다. 통장의 숫자는 부자가 망해도 3대 가는 토대일 뿐, 인류의 삶의 구원에 기여하지 못한다. 스피노자는 죽지만 에티카는 남는 것처럼, 실존의 소멸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들인가 아닌가를 척도로 삼을 필요가 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경우는 어떠한가. 공동육아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관계맺음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이를 혼자 키우면 온갖 정서에 휩싸이기 쉽고 양육과정에서 명석판명한 관념을 갖기 어렵다. 내가 편하고 내 아이를 잘 키우는 것에서 나아가 ‘합리적인 육아의 메커니즘’을 닦아놓는 일이 필요하다.
지난 토요일 수유너머N을 방문했다. 어떤 선생님이 한 달 된 아가를 안고 연구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나도 아이를 좀 안아주고, 다른 사람들도 번갈아 돌보았다. 신생아를 집에서 키웠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텐데 선생님은 틈틈이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엄마의 윤리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다. 아마 나 같으면 다른 사람 공부하는데 방해될까봐 감히 아이 데리고 가지 못했고 데려갔어도 쉬이 맡길 수 없었을 것 같다. 나의 생각은 언뜻 예의바른 태도 같지만 결국은 ‘핏줄주의’에 갇히는 족쇄라는 걸 깨달았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겠다는 것은 곧 나도 피해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 숨어있었다. 엄마와 아이는 고립되고 이는 관계의 단절을 초래한다. 그것은 침해받지 않을 자유가 아니라 어떤 운동과 생성이 일어나지 않은 나태한 평화다.
수유너머N 구성원들은 아이의 출생부터 성장과정을 날마다 지켜볼 것이다. 아이는 ‘결코’ 귀엽지만은 않다. 공부하는데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 괴롭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질적인 존재, 나의 삶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와 관계 맺는 법을 배울 것이다. 엄마-되기를 경험하면서 또 다른 감성이 촉발된다. 변용능력만큼이 ‘나’라는 측면에서 이는 존재의 확장이 될 것이다. 또 어떤 상황과 (악)조건에서도 나의 이로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라면 그들은 서로 자유를 선사한 셈이다. 아이를 키우는 선생님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육아에 대한 좋은 전례가 뿌리내리고 어쩌면 나중에는 어린이집이 생기는 등등 또 다른 생성이 촉발될 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존재와 엮이고 더 많은 삶의 실험을 이어감으로써 자유로워질 것. 이것이 나와 내 아이의 좋은 삶을 위한 기술, ‘엄마의 윤리학’이다. 끝.
(첫 문장을 쓰지 못하고 몸부림 치던 나를 위해 두 시간 넘도록 통화하며 감성촉발을 일으켜준 해피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