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초월 공포영화였다. 내겐 그랬다. <경계도시2>를 보는 내내 가슴이 옥죄어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주먹질 한 번 없지만 몹시 야만적이고, 장황한 말들이 오가지만 그럴수록 답답하다. 육신이 난도질 되어 유혈 낭자한 것 이상으로 영혼이 짓밟히어 비쩍 말라가는 것도 차마 두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경계도시2>는 송두율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세계인이 돼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길에 오른 그. 만리타국에서 1970년대 한국의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유럽 지역 반체제 운동을 주도한다. 학자로서 자신을 ‘경계인’으로 규정하고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한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김일성 장례위원으로도 참석했다. 그에 대해 국가정보원은 북한 권력서열 23위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인물이라고 확신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국 즉시 체포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다. 송두율은 자진출두를 약속하고 37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게 된다. 공항에 들어설 때만해도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잠시 뿐. 세계적인 석학이자 해외민주인사로 환대받았던 그는 귀국 열흘 만에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 간첩’으로 추락한다.
그 과정이 끔찍하다. 노무현 대통령과 한명숙 총리를 사지에 몰아넣는 방법과 동일한 방식이다. 검찰과 언론이 송두율 간첩사건의 합작드라마를 쓴다. 검찰은 피의사실 공표를 흘리고 언론은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재판 전에 이미 포토라인에 세움으로써 한 사람을 단죄한다. 달겨드는 카메라와 펜은 무기다. 지속적이고 집요한 공격이 가해진다. 마침내 반공이데올로기 광풍이 황사처럼 한반도를 뒤덮는다. 보수세력 총결집은 물론이요, 앞장서서 그의 귀국을 돕던 진보진영 사람들도 흔들린다. 너도나도 훈수하고 강요한다.
“당신 입장이 한마디로 뭐냐?” “노동당 입당해 놓고 무슨 경계인이냐?” “독일국적 포기하라” “전향하라”
송두율은 굴복한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대국민 사과와 국적포기를 선언한다. 그리고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후회 한다”고 싸늘하게 답한다. 국보법 위반으로 수인의 몸이 된 송두율은 8개월 만에 무죄판결을 받고 감옥을 나오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경계도시2>의 메인 카피는 이렇다. ‘2003년 그는 스파이였고, 2010년 그는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그의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실과 전향. 이것이 <경계도시2>를 공포영화로 만들었다. 전향. 사상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상의 전향’을 집단적으로 강요한다. 정말이지 몰상식과 무경우가 판을 친다. 그가 사회주의자인 채로 남한사회에서 통일을 위해 일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우리 사회는 확실히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 배타적이다. 다름에 대해 폐쇄적이고 폭력적이다. 삶의 다양한 결을 읽으려 하지 않고 표면적인 사실 몇 가지로 판단한다. 쉽게 끓고 쉽게 식고 쉽게 떠받들고 쉽게 내팽개친다. 성숙한 시민의식은 좌우 어디에도 없다. 집단의 논리를 내세워 한 사람에게 강요할 때 '집단은 사고하지 못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실. “사실이 뭐냐” 나도 많이 쓰고 많이 듣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없다. 해석만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해석된 사실’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코 컵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얀 컵, 머그 컵, 오래된 컵, 꽃그림 컵 등등 저마다 정의내리는 관점이 다르다. 사실이 뭘까? 없다. 송두율도 그랬다. 하버마스의 제자인 세계적인 석학 송두율, 노동당원 송두율, 현실이라곤 모르는 책상물림 학자 송두율, 해외민주인사 송두율, 회색주의자 송두율. 거물간첩 송두율, 반공이데올로기의 희생양 송두율 등등 그에 대한 해석이 사람에 따라 국면에 따라 오만가지로 변한다.
송두율도 혼란스럽다. 그는 감옥 안에서야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삶과 입장에 대해 가장 날카롭게 사유하고 법정에서 또박또박 주장을 펴는 모습을 보여준다. 37년 간 내세웠던 경계인이라는 개념에 대해 숙고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지난 수 십 년 간 많은 이들이 민주화를 위해 갖은 고초를 겪고 목숨을 바쳐가며 치열하게 싸웠다. 피맺힌 원혼이 떠도는 고국 땅의 배치에 송두율이 놓였을 때 ‘경계인’이란 자기규정이 얼마나 모호하고 팔자 좋은 타령이 될 수 있는가를,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경계밖에 있었기에 경계인으로 37년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같이 본 선배가 송두율의 귀국을 추진했던 단체에서 일했는데, 저 당시 진보세력이 송두율에 대해서 느꼈던 배신감과 당혹감은 매우 충격이었다고 증언한다. 실제로 영화에는 그의 변론을 맡은 김형태 변호사가 고뇌하는 장면 등 진보진영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의 생얼과 발언이 가감없이 공개된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송두율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시선을 통해 송두율이 아닌 그 사람을 볼 수 있다. 모든 해석은 자기 해석이니까. 그래서 송두율과 진보세력과 카메라를 든 감독과 관객까지, 레드콤플렉스에 흔들리는 자신을 직시하는 동안 우리는 충분히 아프고 괴롭다.
송두율이 북한서열 23위 김철수와 동일인인가 아닌가 하는 '사실'에 언론과 시민들은 연연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송두율을 이해하는데 가장 무쓸모한 정보였다. 외려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자 함정이었다. 사실을 규명할수록 사실에서 멀어지는 아이러니가 왜 발생하는가. 존재연관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대로 세계는 '힘들의 바다'다. 한 사건이나 한 사물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현재 우리에게 나타난 ‘사실’과 ‘의미’는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힘들의 배치의 결과다. 그래서 그는 2003년 그는 스파이였고, 2010년 그는 스파이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