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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어떤 재회


서울에 60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이틀만에 집밖을 나가 단지내 하얀 눈밭을 보노라니 가장 먼저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사랑 태지도, 못잊은 그놈도 아니다. 예전에 계시던 경비아저씨다. 지나치게 정직한 연상작용에 나 자신도 당황했지만,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낭만으로 바라보기엔 눈이 산사태 수준이고 도로가 빙판길이라 걱정이 앞섰다. '아저씨가 계셨다면 우리 동네 앞에 눈도 더 많이 치워주셔서 주민들 다니기가 한결 수월했을 텐데...'싶어 아저씨를 그리워했다.



며칠간 눈이 치워진 오솔길로 다니며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오늘 처음 주차장엘 갔다. 방학을 맞아 온종일 방과 부엌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 냉장고보이 냉장고걸 덕분에 식량이 바닥나버렸다. 대대적으로 장을 보고자 근 5일간 방치된 차를 찾았다. 우리차는 백설기보다 훨씬 두꺼운 높이의 눈으로 새하얗게 덮여있었다. 트렁크에서 밀대를 꺼내 눈덩이를 부셔뜨렸다. 눈은 다행히 백설기처럼 부드럽게 잘려나갔다. 그런데 발 아래 눈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이수일과 심순애 연극의 한 장면처럼 눈구덩이가 내 발목을 꽉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한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무게값도 못하고 휘청거리면서 눈을 치우는데 저쪽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모님, 잘 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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