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가는 내게 산타 양말이었다. 뭐든지 다 들어가는 신축성 좋은 선물보따리처럼 일곱 빛깔 각양각색의 기쁨과 행복의 목록이 다 담긴 직업의 세계였다. 자유기고가의 활동영역은 다양하다. CEO, 생활수급자, 연예인, 최고액연봉자 샐러리맨 등등 각계각층의 인터뷰부터 여행기, 맛 집 탐험, 금융상품 소개, 각종 동호회 탐방, 현장 취재, 도서비평, 문화칼럼, 기업 브로셔 카피 등등 전방위적 글쓰기가 행해졌다. 신문으로 치자면 1면부터 16면 광고까지 아우르는 셈이다.
만으로 4년, 자유기고가로 일하면서 어설프게나마 신맛부터 쓴맛까지 감각적 글쓰기를 익혔다. 몸도 바빴다. 저 아래 제주도부터 삼팔선 넘기 직전까지 반도의 땅을 훑고 다녔으며, 서울시내 지하철의 거미줄 같은 노선의 각 역마다 발자국을 남겼다. 4호선 당고개역. 5호선 마천역, 6호선 봉화산역. 이런 곳은 종착역인데 제아무리 같은 서울이라 해도 심리적 거리가 대전보다 멀게 느껴진다. 지하철을 몇 번을 갈아타고 종착역에 내려서도 마을버스를 타고 서울의 끄트머리에 이른 적도 여러 번이다.
태엽이 짱짱하게 감긴 병정인형처럼 그렇게 전후좌우 쏘다니고 꼬박꼬박 일수 찍듯이 하루에 한두 개씩 한글파일을 저장하면서 살았다. 주말도 없었다. 컴퓨터에는 기업별 수십 개의 폴더가 생성됐다. 징그러운 양이다. 저걸 어떻게 했나 싶지만 좋았다. 낯선 세계로의 진입이 설렜고 빠져나오는 길엔 들떴다. 취재가 끝나면 에디터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목 끝까지 차오른 감동을 한 바가지 퍼내곤 했다. 그렇게 부푼 가슴의 바람을 살짝 빼주는 절차가 필요할 정도로 일에 빠져 살았다. 물론 상기된 마음 한편으로는 원고작성에 대한 부담감도 컸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해결됐다. 이번 원고를 써야 다음 원고를 쓰니까, 원리상 쉬운 일이었다.
일련의 시간들은 내게 좋은 여행이자 훈련이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서서히 열기가 식더니만 올해 초부터 거짓말처럼 시들해져버렸다. 사람이건 일이건 사랑이 식어가는 방식은 똑같은 거 같다. 바람둥이가 애인에 대해 하루아침에 냉정해지는 것처럼 ‘돌변’하는 기분이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므로 후회는 없지만 생소한 감정. 당황스럽다.
핑계거리도 적당했다. 둘째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이유로 주말 취재, 지방 취재, 오후 취재를 하나씩 거절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일이 줄었다. 새로 들어온 에디터들이 취재 의뢰차 전화해서는 꼭 묻는다. “작가님은 지방이랑 주말 취재는 안 하신다면서요?” 그럴 땐 유난 떠는 거 같아 미안하고, 자처한 일이지만 내 명이 다해가는 소리가 들린다. 취재원 전화번호, 사진기자 연락처, 약속 시간, 접선 장소 등의 메모로 문학소녀 낙서장처럼 빼곡하던 다이어리. 손 때 묻어 너덜너덜하던 취재수첩의 수난시대는 마감됐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라곤 연예인이나 저명인사 인터뷰뿐이다. 서울은 문화집중지대다. 이들을 지방에서 인터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이들은 시간이 곧 돈이라서 섭외도 엄청나게 어렵고 까다롭거니와 인터뷰가 성사가 돼도 취재시간을 박하게 준다. (이들이 차마 사보의 인터뷰를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이 기업공화국이라 그렇다.) 아무튼 30분에서 1시간 동안 취조하듯 취재를 마치고는 마치 이박삼일 밀월여행이라도 다녀온 사이처럼 달달한 소설 같은 원고를 써 넘기는 일에, 나는 전문가다. "작가님이 잘 쓰시잖아요. 꼭 해주세요." 이 말이 처음엔 기분이 좋았는데 자꾸 들으니까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한 때 인터뷰 전문가를 꿈꿔왔으나 얼치기 소설가가 돼가는 기분이다. 물론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사람들 만나는 게 즐겁기도 하지만 수박 겉핥기인 경우엔 감동도 금세 식는다. 블로그에 담기 꺼려지는, 존경을 보낼 수 없는 유명인도 많다. 그런 글 쓸 때는 정말 슬프다. 사보가 집에 배달돼 오면 우편물을 뜯지 않고 분리수거 통으로 직행하는 일이 잦아졌다. 취재를 잡아놓고도 ‘사정이 생겨 못 간다고 전화할까’ 유혹을 자주 받는다. 그럼에도 통장에 차곡차곡 원고료 입금되는 재미가 커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책값과 커피값은 벌어야 하니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되는 것도 아닌 금액이다. 그 돈을 벌고자 치러야하는 심리적 비용이 크다. 가끔씩 선배한테 전화해서 하소연 하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고상하게 사는 사람이 몇 이나 되냐! 밥벌이라 생각하라”고 구박받는다.
하는 수 없이 도살장 가듯 무거운 발걸음 끌고 가면, 어떤 날은 또 인터뷰가 의외로 재밌게 풀려서 언제 그랬냐 싶게 온갖 시름이 싹 사라진다. 온몸에 피가 새롭게 충전되는 그 카타르시스의 강렬함을 나는 '인터뷰 오르가즘'이라고 부른다. ‘이거 안 왔으면 어쩔 뻔 했어. 역시 난 인터뷰 체질이야’ 중얼중얼 혼자 히죽거린다. 조증과 울증의 반복. 여러 가지 징후가 자유기고가로서 종말을 예고한다.
자유기고가 입문기. 2005년 집안에 IMF가 닥치고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10대부터 20대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산 거 같은데 어쩜 그렇게 이력서에 쓸 내용이 없던지. 초라한 이력서가 부끄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신경질 났다. 하지만 꼭 간절하게, 나는 글 쓰는 일로 돈을 벌고 싶었다. 잘할 수 있었다. 구직사이트에 붙어서 온종일 검색해 봐도 학력제한 없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글 쓰는 일은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하나 발견해 클릭했더니 집 앞 오피스텔에 있는 회사인데 야한소설 쓰는 일이었다. -_-; 그리고 양천신문에서 ‘건강한 시민’을 대상으로 기자를 뽑는다기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가방끈 짧고 불온한 시민의 최후는 비참했다.
글밥은 포기했다. 다음은 커피밥. 이럴 바에야 커피전문점에서 커피향이나 진탕 쐬자 싶어 카페 아르바이트를 알아봤더니 나이제한이 35세까지였다. 간당간당 턱걸이 신세. 그 무렵 선배랑 밥 먹다가 구직에 실패하고 커피점에서 알바 하기로 맘 굳혔다고 했더니 글 세편만 메일로 보내라 했다. 선배가 절친인 사보기획자에게 내 글을 보냈고 며칠 후 연락이 왔다. 구사일생으로 사보업계에 데뷔했다. 첫 취재 나가기 전에 샘플원고를 봤는데 솔직히 시시했다. ‘별거 아니군. 이 정도면 나도 충분히 쓰겠네.’
선배가 확실히 AS를 해줬다. 선배가 학보사 출신이라 주변에 글쟁이가 많다. 기자, 소설가 등 자기친구들에게 내 원고를 돌려서 빨간펜을 받아줬다. 고쳐야할 점을 소상히 일러주고는 쿨하게 한마디 던져줬다. “너 가능성 있대. 잘 해봐라” 남몰래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열심히 했다. 딱 두 가지를 유념했다. 약속을 잘 지키고 내 색깔을 보여줬다. 자기개발서에 나온 지침대로 ‘하니까 됐다.’ 자꾸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나중에는 일이 넘쳐서 '정은유'라는 필명까지 써야했다. 사보담당자들을 만나면 이런 인사를 받았다. "작가님이 우리나라 사보 다 하세요?" 2007년 김용철변호사 양심선언 때는 삼성그룹사외보를 그만두기도 했다. 양심과 재미를 따지고 골라가며 일해도 좋았다. 프리랜서는 선택당하는 직업인데 어느 순간 일의 선택권이 내게 와 있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커피도 뻥뻥 마시고 책도 원 없이 사고 아이들 꽃단장도 시키고 좋은 사람에게 푸짐한 선물도 하고 두 번의 전세금도 올려줬다. 다시 내년 8월에 전세계약이 돌아온다. 딸내미는 우리 집이 너무 좁아서 개미굴 같다며 눈물짓는데, 난 고민하고 있다. 돈이 아니라 일 때문에. 노동에선 열정이 나오지 않는다. 글의 가치와 삶의 가치는 같이 간다. 나를 만족시키는 행복한 글쓰기가 그립다. 잠 못 자도 안 피곤하고 새벽에도 벌떡 눈이 떠져 나를 컴퓨터 앞에 앉히는 그런 신나는 글을 쓰고 싶다. 그리 대단한 인생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타협하고 어정쩡하게 살지는 않았다. 자꾸 온몸이 신호를 보낸다. 정리를 준비할 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