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조연배우가 '꽃무늬' 셔츠와 걸쭉한 입담으로 튄다면, 그는 밋밋한 의상에 뭉근한 웃음으로 묻힌다. 조연배우들이 들썩들썩 극의 흐름에 돌출된 재미를 준다면, 그는 주섬주섬 극의 여백을 메운다. 있으면 좋은 캐릭터라기보다 없어선 안 될 인물이다.
<왕의 남자> 칠득이, <라디오스타> 박 기사, 최신작 <마이 뉴 파트너>의 배 형사까지. 배우 정석용은 광대패거리, 영월지국 스태프, 마약수사반 등의 무리에 어우러져 소리 없는 그림자처럼 극을 이끌었다.
장황한 대사는 없을지언정 대부분 화면에는 그가 보인다. 주인공이 소름 연기를 펼치고 누군가 감초 연기로 도드라질 때 그는 넌지시 배역을 살아냈다. 연기하지 않으면서 연기하는 그를, 우리는 만나지 않으면서 만나 온 것이다.
무난하고 무던한 그가 문득 한 마디씩 날리는 대사는 실없고 무구하다. <마이 뉴 파트너>에서 용의자를 찾는 작전회의 시간. 다들 기초자료와 논리적 추론에 근거해 의견을 발표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 경험상… 분명히 어딘가 있어요.”
<라디오스타>에서는 제대로 웃겼다. 술에 취해 ‘주름잡던 왕년’을 떠벌리는 지국장에게 “디제이도 하셨었어요?”라며 찬물을 끼얹는다.
미워할 수 없다. 선천성 선량함의 온기를 간직한 배우다. 그런 그가 <마이 뉴 파트너>에서 ‘미완의 악역’을 맡았다. 변신 가능성을 살짝 내비쳤다. 웃으면 다 감기는 튀밥같이 순한 눈이지만 웃음을 걷어내자 오싹한 결기가 감돈다.
“요즘 슬슬 눈매가 무섭다는 말을 듣는다. 이제는 이장, 옆집 아저씨, 순박한 노총각 이런 거 말고 제대로 된 악역 한 번 해보고 싶다.”
뭉근한 코믹 캐릭터... 상황에 맞게 표현 노력
- <마이 뉴 파트너>에서도 뭉근한 코믹 연기를 선보이셨어요. 그간 튀면 안 되는 조연을 주로 맡았는데, 대본을 자기식으로 소화하는 건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설정된 캐릭터가 그런 건가요.
“주로 뭉근한 캐릭터로 무난한 역, 순박한 역이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 보통 조연들은 걸쭉한 사투리, 과장된 몸짓 같은 재밌고 달착지근한 연기를 선보이잖아요. 원래 그런 역을 잘하는데 안 시켜줘서 못한 건지…. 궁금해요.
“아마 내가 못할 것 같으니까 그런 역만 들어오겠지요. (웃음) 음. 근데 연극에선 그런 과장연기가 필요해요. 저도 연극할 땐 다양한 캐릭터를 했어요. 여자 캐릭터도 해보고. 근데 영화에선 기회가 없었어요. 글쎄요. 조연은 좀 웃기고 분위기 풀어주고 주연을 받쳐주는데, 그 중에서 상황에 맞게 표현하는 게 가장 중요한 거 같아요. 물론 조연의 역할이 웃음도 주고 그러면서 (영화가) 풍성해지는 건데…. 그런 걸 좀 깬다고 할까요.”
- 튀는 역할의 경우, 어떻게 보면 훈련이 가능해 보이기도 하거든요. 그에 반해 튀지 않는 역할이 더 어렵지 않나 싶어서요.
“잘 안되죠. 힘들죠. 상황을 이해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거예요. 그래서 전 소위 ‘설정’이라고 하는 걸 안 하려고 해요. 대신에 상대방이 하는 걸 유심히 보면서 그때 그때 연기해요.”
<라디오스타>의 박 기사, 처음엔 대사 두 줄도 안 됐지만
- <라디오스타>에서 지국장이랑 말을 되받는 리듬이 좋았어요. 리액션의 박자를 살짝 틀어주니 웃기고 영화도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갈수록 박기사의 캐릭터가 살아났어요.
“개인적으로 <라디오스타>는 날로 먹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로 하는 일 없이 반응하는 거 찍고. 물론 그게 저도 쉽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그 때는 그냥 마음 비우고 했어요. 사실 영화에서 대사 몇 마디 하지만, 원 대본에는 전체 대사가 두 줄이나 됐을라나. 이준익 감독님하고 그래도 전에 같이 일했는데…. 솔직히 대사가 너무 없지 않느냐고 했더니 감독님이 ‘잘해낼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러더라고요. 물론 시키려고 한 말이겠지만(웃음).”
- <마이 뉴 파트너>에서도 예의 그 어눌한 말투로 ‘제 경험상 분명히 어딘가 있어요’ 할 때 좀 재밌었어요.
“감독님이 그 부분을 나름 ‘코믹코드’라고 해서 나름 부담이 되게 많았어요. 쉽게 찍은 거 같지만(웃음).”
- 이번 영화에서는 막판에 악역으로 변신하려다가 미완에 그쳤어요. 철저히 악해질 수 없는 인물이었지요.
“근데 이제 점점 악역이 들어올 거 같아요. 주위에 감독님들이 점점 제 눈만 보면 예사롭지 않다고 말해요. 제 바람이에요. 저도 하고 싶죠. 그 흔한 깡패역도 한 번 못해봤어요.”
- 이번 영화가 순한 역에서 악역으로 가는 브릿지 영화가 될 거 같네요.
“그렇게 되면 좋죠(웃음).”
- <왕의 남자>는 촬영장 분위기가 다른 촬영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기애애했다고 들었어요. 영화에서도 팀워크의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많은 작품에 출연했으니 알 것 같아요. 현장 분위기와 흥행이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흥행은 몰라도 작품(의 완성도)엔 영향이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 혹은 친구로 나오는 배역들도 안 친해보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적어도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촬영 전에 술도 댓번은 먹고…. 사실 그날 처음 만나서 하면 잘 되겠어요? 어색하죠.”
- <왕의 남자>에서 남사당패는 계속 같이 몰려다니잖아요.
“아유, 지겹도록 다녔죠. 우리 육칠팔(육갑, 칠득, 팔복) 셋은 원래 연극판에서부터 친했고요. 또 장생(감우성), 공길이(이준기)랑은 초반에 북 치고 장구 치고 흉내만 냈지만 그러기 위해서 몇 달간 많이 연습했어요. 다들 술 한 잔씩 하는 사람들이니까(웃음). 끝나면 술도 마시고 친해졌지요.”
그는 숭실대 극회 출신이다. 스물여덟이던 1998년 대학로에 진출했다. 늦깎이 배우가 됐지만 마음은 일찌감치 먹었다. 장래희망이 배우는 아니었다. 전공은 경영학과다. 어렴풋이 나중에 대학 가면 연극동아리를 하리라 생각했다. 무작정 시작했다. 극회에서 연기를 했고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다가 동아리 선배들이랑 오비(OB)합동 공연을 했는데, 연출하는 선배에게 ‘혼쭐’이 났다. 처절히 뭉개졌다.
밟히자 일어섰다. ‘아, 연기가 쉬운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은 '그러므로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로 이어졌다.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무작정 해보자'고 결심했다. 연극반으로 그를 몰아준 운명은, 용기도 함께 주었다. 왠지 배우로서 안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천대는 받지 않겠다’ 싶은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인가. 쉽지 않을 길이었건만, 마흔을 목전에 둔 그의 얼굴엔 이상하리만치 여독(旅毒)이 없다. 안빈낙도, 유유자적 예까지 왔다.
스물여덟에 연극판으로... ‘천대는 받지 않겠다’
- 무명시절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인가요.
“언젠가 되겠지 생각했어요. 아주 무책임한 생각이죠(웃음). 실은 늦게 데뷔해서 그 때는 조바심도 났어요. 또 혼자니까. 바로 IMF도 닥치고 극단에서 단원도 안 뽑고…. 그래서 여기저기 한 사람 알면 술자리 껴서 술 마시러 가고 그러면서 한 사람씩 알고 그렇게 됐죠.”
- 2001년 <무사>가 첫 영화입니다. 그즈음 한국영화가 르네상스를 맞이하면서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연극배우 출신들이 조연배우로 영화판에 대거 입성했잖아요. 늦게 데뷔한 편인데, 그 사이 동료 연극배우들이 하나둘 뜨는 동안 심정이 묘했을 거 같아요.
“어, 그래도 전 빨리 됐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무사>가 사극인지도 몰랐어요. 중국 가는 것도 당연히 모르고요. 친구들이랑 우르르 몰려가서 오디션을 본 거죠.”
- 영화의 맛을 본격적으로 알게 해준 작품은 무엇인가요.
“<무사> 할 때부터 재밌었어요. 영화나 연극이나 TV나 연기는 안 틀린 거 같아요. 그냥 그대로 했어요. <무사>는 액션신이 많아서 힘들었지만 영화에 대한 걸 많이 배웠어요. 중국에서 5개월을 있었는데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으니까요. 주인공이 아니면 그런 기회가 없거든요. 운동도 그 때 시작했어요. 오디션 때 감독님이 제 몸을 만져 보고 ‘몸이 너무 후졌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부터 운동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 악역 하시려면 몸 만드셔야죠. 조폭 이런 역 하시려면요.
“에이, 그 정도는 되죠. 그래도 액션배우로 데뷔했는데. <무사>가 액션영화잖아요.”
- 배우수업을 어떻게 하시나요. 예를 들어 비디오 보기, 책 읽기, 술 마시면서 인생배우기 등등.
“정말 연극할 땐 술 많이 마셨어요. 선배들이 술 잘 마셔야 연기 잘한다고 해서 많이 먹었어요. ‘영혼을 살찌워야 해~’ 이러면서(웃음). 정서적으로는 책을 많이 읽어요. 비디오는 보고 싶은 거만 봐요. 요즘엔 주로 등산 많이 가요.”
- 안성기씨랑 바둑 수가 비슷하다던데요. 승부에도 집착하시고요.
“그냥 동네 바둑이죠. 두다 보면 집착하게 돼요. 안 선생님도 집착하세요(웃음).”
- 바둑이 연기랑 비슷한 거 같아요. 한 번 정념을 태우고 다시 무(無)로 돌아가잖아요.
“그러네요. 취미에요. 이기는 재미죠.”
“배우가 배부른 건 위험하다”
<왕의 남자>의 원작은 연극 <이>다. 그는<이>에서 홍 내관으로 출연했다. 그 인연으로 <왕의 남자>에도 출연하게 됐다. 그즈음 어느 인터뷰에서 <왕의 남자> 흥행에 힘입어 연극 <이>에 관객이 많이 들자, 예전엔 조금만 관객이 많아도 흥이 났는데 나중에는 으레 많이 올 줄 아니까 그런 흥이 안 나더라고 했다. "자기도 모르게 배가 부른 거죠. 배우에겐 위험한 일이에요"라고.
그 얘기를 꺼내자 내내 웃음 띠던 그가 자못 진지해진다. “연극은 특히 절실한 어떤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그렇게 안 하면 작품이 잘 안 나오는 거 같다”며 조금 전 한 말을 다시금 끄덕끄덕 인정한다. 물론 편하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려고 노력하지만 “여유가 보이는 건 괜찮은데 대충하면 안 된다”는 결론을 짓는다.
또 한 가지. “배우는 근본적으로 착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이기적이지 않아야 한다. “스태프도 있고 여럿이 같이하는 작업이니까” 그렇단다. 아무튼 착해야 한다. 그에게 착한가 묻자 조용히 웃으며 답한다. “조금 착해요.”
- 정말 착해 보이세요. 얼굴은 살아온 날의 반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휴머니즘이 좀 깔렸어요. 어릴 때 뭐 하고 놀았나요.
“동네에서 다방구하고 구슬치기 하고 놀았죠. 중학교 때까지 그렇게 놀았는데 내가 그렇게 공부를 못하는지 몰랐어요. 고등학교도 못 가겠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했어요. 그랬더니 소질이 있는지 성적이 좀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정도 하니까 더 이상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때부터 술을 좀 마셨죠(웃음).”
- 출연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물론 좋지만, 흥행이 배우로서 성취감의 전부는 아닌 거 같아요. 열심히 하고 나면 흥행 안 해도 흐뭇하고 뿌듯한 그런 마음이 들지 않나요.
“맞아요. 그동안 운이 좋았다고 봐요. 작품을 잘 만났어요. 제 작품이라서 그런지 허접하다고 해야 하나 암튼 질이 낮은 작품이 없었어요. 속마음은 흥행이 되면 좋지만 진짜 속마음은 그런 게 기준이 될 거 같아요. 자기에게 부끄럽나 안 부끄럽나.”
- 출연작 중에 흥행에 실패한 제일 아까운 영화가 뭔가요.
“<그해 여름>이요. 작품이 좋은데 아까워요. 흥행은 운이 있는 거 같아요. 사실 <왕의 남자>도 그렇게까지 될 줄 몰랐어요. 완전 붐이었잖아요. 만들 땐 그렇게까지 될 줄 몰랐어요.”
- <왕의 남자> 흥행의 원인을 뭐라고 보세요.
“우선 소재가 평범하진 않았잖아요. 소재의 신선함에 원작도 탄탄하고 동성애 코드도 약간 있고 여성분들이 좋아했죠. 특히 연기자들이 광대잖아요. 주위의 동료 배우나 친구들이 울림이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일단 재밌어야 해요. 완성도도 있고. 내 역할의 비중이 좀 작더라도 재미있으면 선택해요. <마이 뉴 파트너>도 재밌게 봤어요.”
- <마이 뉴 파트너>는 너무 정직하게 가니까 끝에 긴장이 떨어지더라고요. 예측 가능한 결말이 나와서 좀 맥 빠졌어요.
“모든 작품이 대부분 예상한 대로 가죠.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문제인데 그건 감독 성향 같아요. 보통 ‘작품이 너무 착해’ 그러잖아요. <추격자>처럼 세게 만들수도 있지만 이런 성향도 있고. 아, <추격자>는 정말 재밌게 봤어요.”
- 배우는 직업으로서 어떤가요. 비정규직에다가 선택당하는 입장이잖아요. 앞길을 알 수 없는 불안감 같은 게 있으세요.
“조금 있죠. 근데 어쩔 수 없죠. 이렇게 자유로운 직업이 없잖아요. 감당해야죠.”
평생 배우의 길... “악역? 몇 년 뒤에 보여주죠, 뭐”
- 직업 만족도가 높으신 거 같습니다.
“전 너무 재밌어서요. 주위에도 보면 지금 슬슬 다른 일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아직까진 그런 맘이 안 생겨요. 생활력이 없다고 봐야죠(웃음).”
- 어떤 점이 그렇게 재밌으세요.
“전체적으로 재밌어요. 자유스럽고, 여러 사람 만나는 것도 즐겁고요. <왕의 남자>도 분위기 좋았지만 <마이 뉴 파트너>는 현장 분위기가 훨씬 더 좋았어요. 스태프나 감독님이 예전부터 같이 했던 팀원들이고. 어디나 대장들이 성격이 좋아야 분위기가 좋은데 촬영감독 조명감독 등 성격이 좋으니까 분위기가 좋았어요. 촬영장에 항상 웃음이 있었어요.”
- 왠지 사람들을 웃기는 쪽이실 듯해요.
“내가 좀 웃기나 봐요. 나 보고 많이 웃더라고요. 말빨은 별로 없는데 분위기로 웃겨요.”
- 박 기사처럼?
“네. 하하.”
꽃피는 5월이면 TV에서 그를 볼 수 있다. MBC 미니시리즈 <스포트라이트>에서 방송사 보도국 사회부 차장으로 나온다. <하얀거탑>의 이기원 작가 작품으로 방송기자들의 삶을 다룬 전문드라마다. 모처럼 '화이트칼라' 역을 맡았다. 하지만 극 중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의 그 '휴먼 캐릭터'다.
그래도 간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이미지 변신? 그건 다음에 해도 되니까, 급하게 생각 안 한다. “(악역은) 몇 년 뒤에 보여주겠다”며 허허 웃는다. 앞으로 잘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꾸준히 나올 것 같다며 스스로에게 긍정의 주문을 건다.
기꺼이 기다리자. 한번 찬연하게 타오르고 마는 불꽃같은 배우가 있다면 정석용처럼 ‘오래 타는 땔감’ 같은 배우도 있으니. 김송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