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다. 과거 현재 미래의 분야가 다 다르다. 삼십대엔 언론운동 일선에서 뛰었다. 지금은 중고차딜러로 일한다. 훗날 노래공연과 영화감독에 도전할 참이다. 삶의 구성이 일간지 섹션처럼 다채롭다. 웃으면 다 감기는, 튀밥같이 순한 눈을 반짝이며 그가 터놓는다. 열심히 살았으며 살고 있고 살아가겠다고. 둥글고 따뜻한 마음의 힘으로 굴러가는 김시창라이프.
서대문 로터리, 칼날 같은 바람을 휘감고 날렵한 검은 세단이 서 있다. 비상등을 깜빡인다. 설마 저 차? 맞다. 차 안에서 그가 손짓한다. 미장센은 ‘모래시계’지만 내러티브는 ‘전원일기’다. 민언련 떠난 지 5년, 그는 좋은 차 몰고(무려 다이너스티다. 중고지만^^) 성공해서 돌아왔다. 뜨끈한 갈비탕 한 그릇 앞에 놓고 그의 금의환향 스토리가 전개됐다.
김시창 회원은 민언련 상근활동가 출신이다. 97년부터 2002년 말까지 기획부장으로 일했다.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고차매매상 ‘김시창닷컴(http://www.kimsichang.com/)’을 운영하고 있다. 민언련 활동도 5년, 중고차딜러도 5년째다. 대통령 임기를 꽉 채웠다.
“대통령들이 물러나면서 하는 말이 실감나더라고요. 뭘 하기엔 너무 짧았던 거 같고 아쉬움이 남아요.” 여 기서 저절로 묻게 된다. 언론운동 하다가 영판 다른 길을 가게 된 까닭은 무얼까. 사연은 이렇다. 그는 민언련 상근활동가가 된 이듬해에 결혼했다. 당시 월급이 80만원. 총각이면 모를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때 문에 고정수입을 늘려보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각종 매체에 만평을 그려 팔고, 글을 기고하고, 대학 학보사에서 글쓰기도 가르쳤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생계비 확보를 위해 고심하던 끝에 수입차관련 사업에 투자를 했는데 예기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두 발 벗고 나서 수습하다가 전업하게 된 것이다.
언론운동가에서 중고차딜러로... 꿈은 계속된다
“어쩔 수 없었지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았으니 경제적인 책임을 다하는 건 중요하니까요.” 하 얀 쌀밥처럼 담박한 결론이다. 크든 작든 책임감을 갖는 것은 모든 진정한 사랑의 기반이다. 사랑의 마음에는 한계가 없지만 사랑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는 가장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는 열심히 했다. 월드와이드웹에 김시창닷컴의 둥지를 튼 아비새는 성실히 먹이를 물어다 날랐다.
“이제 겨우 기반을 잡은 정도입니다. 그런데 회사원이나 다른 사업과는 달라서 직접 뛰어야 해요. 일하면 수익이 나오는 구조는 됐는데, 직접 뛰지 않으면 수익이 없어요. 이게 딜레마에요. 마음은 딴 데 가있는데...”
얼핏 시선이 허공을 훑는다. 황지우의 시어를 빌자면, 그는 ‘이삿짐 트럭 뒤에 떨궈진 생’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것의 정체는 언론운동보다는 예술적 끼다. 그는 만평을 직접 그릴 정도로 그림솜씨 뛰어나다. 또 노래를 좋아하고 아주 잘한다(고 한다). 투박한 목에 MP3가 걸려있다. ‘햇살’ ‘소리사랑’ ‘횃불소리’ ‘언제나플렛가끔샵’은 그가 활동한 노래패 이름들이다.
“대학생 때 노래패대회에서 자작곡으로 1등 한 적도 있어요. 비록 로비를 하긴 했지만” 수줍고 구수한 웃음을 흘리는 그. 무슨 곡이었는가 묻자 번개처럼 답한다. “혁명의 불꽃!”
활동가 재교육 등 시민운동 인재관리 필요하다
당시 ‘애국청년 시창’의 가슴에는 뜨거운 혁명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나 보다는 우리로 사는 삶의 행동양식을 고민하던 그에게 졸업은 곧 현장진출을 의미했다.
“ 노동현장을 가는 것이 수순처럼 되었었는데 우리 때는 꼭 공장에만 갈 필요는 없다고 해서 사무직이든 시민사회단체 어디든 활동범위를 넓혀보자는 분위기였어요. 제가 86학번인데 10년 만에 학교를 졸업했거든요. 그리곤 ‘말’지 사업팀에서 일했습니다. 자연히 한 사무실을 쓰던 민언련을 알게 됐고요. 제가 언론학교 10기에요.”
언 론운동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민언련을 알고 나서 언론운동의 중요성을 깨우쳤다고 한다. 아는 만큼 산다고 했던가. 그는 언론개혁에 힘쓰는 ‘언론운동가’로 완벽 변신했다. 언론개혁하려는 사람들의 전문성 확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언론정보대학원에 진학하는 등 자질의 충실함도 기했다. 그는 시민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사람에게 투자해야한다고 말했다.
“ 특히 언론운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신문사 방송국 등 그 분야에서 10년 이상 일한 전문 인가를 상대합니다. 그들과 논쟁도 하고 문제점도 지적하려면 활동가도 전문인을 양성해야죠. 이를 위해 활동가 재교육이나 경제적인 문제 해결 등 제도적인 뒷받침이 마련돼야합니다. 시민사회단체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참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시 민운동의 가장 귀한 자산은 사람이라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오랫동안 일한 활동가를 꾸준히 성장하도록 지원하고 설사 그만두더라도 후임자에게 같은 능력이 재생산되도록 힘써야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활동가는 돈 보고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5년, 10년 뒤의 비전을 제시하고 일하는 가치를 제공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민언련이 이런 부분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공연도 하고 영화도 만들고, “나 비상하리라~”
“ 인생이 참 금방이에요. 내일 죽을지 100살까지 살지 잘 모르겠지만 민언련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할 때 5년, 회원활동 3년, 그 때가 참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광주순례도 한 해도 안 거르고 갔고 송년회 등 거의 모든 행사에 한 번도 안 빠지고 참석했거든요.” 민언련 활동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면 대학생활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로 꼽는다.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가서 일신의 안위만을 챙기고 염려하는 판에, 그래도 동시대 사람들을 걱정하고 또 대의를 위해선 기꺼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꿈꾸기, 그리고 뜨겁게 살기는 그의 삶의 고유한 호흡방식이다. 일하는 중에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며 꿈의 보자기를 펼친다. 소박한 꿈 하나, 굵직한 꿈 하나. 자잘한 꿈들 여럿.
“ 젊었을 때 불렀던 노래를 모아서 공연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인생의 소중한 기억을 남기고 싶어요. 또 영화도 만들고 싶고요. 먼저 시나리오부터 배우려고 작년에 한겨레 문화센터 에 등록했죠. 젊다고 생각했는데 수강생 스무 명 중에 제 나이가 두 번째로 많더라고요.” 아 무려나,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삶이 녹아든 그의 시나리오는 ‘기대작’으로 뽑혔다. 비록 미완성에 그쳤지만 말이다. 그는 올해에는 시나리오를 꼭 완성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밖에도 노래, 미술, 그림 등 여건 되는 선에서 다 해볼 작정이라며 소년처럼 웃는다.
집 으로 가는 길, 그의 차에 동승했다. 강북강변을 달린다. 음악이 흐른다. 어깨춤이 절로 나는 거북이의 빙고. ‘사는 게 고생이라 하지만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 이내 삶이 끝날 그 마지막 순간에 나 웃어보리라 나 바라는 대로~’
햇살에 반짝이는 은빛 강물을 배경으로 그가 말한다. “나 이런 가사 좋아요.” 민언련 회원을 대신해 말해주고 싶었다. ‘선배님의 꿈꾸는 삶도 좋은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