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삶을 물어올 때, 한 권의 책을 내밀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 것인가. 그처럼 말이다. 1944년생인 그는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한 성장기록을 엮어 ‘분단조국과 함께 태어나’란 책으로 펴냈다.
35년간 사립고교 수학교사로 일하면서 전교조,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활동한 그의 삶은 곧 시대정신의 내밀한 증언이기도 하다. 언론학교도 1기와 55기 두 차례나 수료한 아주 특별한 회원, 이윤 씨를 만났다.
촉촉한 봄비 내리는 4월 초순. 베레모가 잘 어울리는 중년신사가 한 손엔 서류봉투를 다른 한 손엔 우산을 들고 들어선다. 문득 민언련 2층 강의실은 어느 시골 학교의 교실이 된 듯 아늑해진다. 마치 오래전 흑백화면으로 보았던 ‘TV문학관’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몸에 무수한 이야기가 담겨있으리라는 예감은 어긋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일컬어 “꼬장꼬장하고 피곤한 사람”이라며 수줍게 웃더니만 그는 이것저것 자료를 내민다. 평생 써 놓은 일기를 토대로 엮은 자서전 <분단 조국과 함께 태어나>와 옥천신문에 실린 기사, 정년퇴임 인사말, 개성 방문기, 2008년 1월부터 3월까지 독서 도서목록 등 여러 장의 문건이다. 각각의 인쇄물은 네 귀퉁이가 조금도 어긋남 없이 정확하게 네 등분되어 접혀있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완벽한 관리와 진지한 애정이 흠뻑 배인 이것들 앞에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만다.
언론의 성지 ‘옥천’서 태어난 6·3세대
“나의 고향은 ‘한국 언론의 성지 옥천’입니다. 옥천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안티조선’의 메카이면서 오늘도 꿋꿋하게 풀뿌리의 파수꾼 자리를 지키는 옥천신문이 있는 자랑스러운 도시죠. 사는 곳은 서대문형무소 근방의 현저동 극동아파트고요.”
어쩌면 그에게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행위다. ‘나’라는 존재는 늘 ‘역사 속의 나’였기에 시대와 동떨어진 ‘이윤’은, 그것이 사소한 것이라도 말해질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는 1944년생이다. 태평양전쟁으로부터 한국전쟁 사이에 태어난 바로 이 나라의 해방과 연륜을 같이한 세대다. “태어날 때부터 분단국가의 반쪽으로 운명지워진 채 맹목적인 친미반공의 외눈박이 교육을 받고 성장한 비극적 증인”이라며 한마디로 ‘자아상실의 세대’라고 규정했다.
“우리보다 10년 앞 세대들은 해방공간에서 민족주의 내지 진보진영이 좌파 빨갱이로 몰려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희생을 치렀는지 생생히 가슴속에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보다 10년 뒤 세대들은 냉전체제가 와해되는 1970년대에 청춘을 불사르면서 시대를 거역하는 유신독재에 저항했지요. 이에 반해 우리 세대들은 사물을 인지하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최고이자 유일한 가치기준으로 미국에 대한 일방적 숭상과 공산주의에 대한 절대적 증오만을 배웠습니다.”
친미반공. 그는 이 커다란 시대적 화두에 짓눌렸던 사무친 청춘시절을 회상했다. 1960년대를 대학생으로 보낸 대표적인 6·3 세대로서 학교생활의 대부분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길거리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친미반공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학생들에게 일부 진보적이거나 통일지향적 의식을 가진 운동가들은 내부에서도 좌파성향의 문재인물로 기피됐다고 한다. 오늘날, 당시 학생운동을 전개했던 세력이 진보개혁 진영보다는 수구야당과 보수단체에 많이 들어가 있다는 게 증거라고 그는 말했다.
<전환시대 논리>로 ‘친미반공’의 굴레 벗어나
“그들이 과연 한때나마 민족과 구국을 외치던 그 젊은이들이었는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치밀어 오릅니다. 제 경우 친미반공 세대의 부끄러운 속성을 자각한 계기는 우연히 접한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 논리><8억인과의 대화>등을 통해서입니다. 죽의 장막 저 너머 세계인 중국과 베트남에 대한, 당시로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진실의 기록을 접하고는 세상을 이렇게 달리 볼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초임교사 이전부터도 그의 취미는 ‘독서’였다. 현재 3000여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책을 이고 지고 살지언정 둘 곳도 없으면서 사회과학 분야에서부터 시사월간지까지 차곡차곡 쌓아나갔다며 웃는다. 신문은 동아일보를 보았는데 백지광고까지 내면서 몇 달씩이나 버텨주던 그 기개에 감동하여 없는 돈으로 격려광고를 내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그때 모아둔 동아일보는 재작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언론계에 친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광주혁명도 먼저 알았는데 신문방송이 침묵하는 것에 울분을 토했었지요. 언론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언론학교도 자연스럽게 다니게 됐습니다. 1991년 11월 6일 언론학교 1기를 듣고, 지난 2005년 14년 만에 55기에 재수강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그의 아들은 언론학교 19기를 수료했다. 14년 만에 재입학, 부자동창생 배출 등 언론학교에 관한 진귀한 기록은 모두 그의 몫인 셈이다.
책보고 컴퓨터 배워 한평생 삶을 편찬하다
지난해 8월, 이윤 회원은 35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갔다. 흔히 정년퇴임 후 겪는다는 우울증은 그에겐 딴 세상 얘기다.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단언한다. 그간 읽고 싶었던 책도 맘껏 읽고 또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이 많다”며 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터놓는다.
그가 회원으로 가입한 여러 민주시민단체의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해놓고 일주일에 1~2 군데 좋은 강연과 교육을 듣고 있으며, 일주일에 두 번 동네 도서관에서 컴퓨터를 배운다. 액셀을 열심히 배워서 일 년 치씩 연표를 만들어 중요한 삶의 기록들을 정리할 계획이다. 그동안 써놓은 일기장이 40권도 넘는데 “나도 못 읽고 죽겠다 싶어서” 정리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과거를 정리하면서 현재를 밀고나가는 이윤 회원. 이 같은 일련의 ‘자료화’는 그간의 크고 작은 사건을 단순 계열화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숙고는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어지게 마련인 법. 여전히 기본적인 문제들은 해결이 안 된 채 새로운 해답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이기에, 그는 여전히 가슴 뜨거운 청춘으로, 형형한 정신으로 깨어있으며 삶에 복무하는 것이다. 그의 자서전 첫머리에 쓰인 볼테르의 말을 가슴에 되새기며 말이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견해를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