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여성들의 계절이라 그런가. 연달아 여성들의 잔치가 열렸다. 목요일(17일)에는 여성연합 후원의 밤. 다음날에는 여성공동체 ‘윙W-ing’ 축제. 두 조직의 주축 세력도 열성 당원도 아닌데, 그러니까 굳이 꼭 가야만 하는 자리도 아니었는데 나는 거기에 있었다. 실뿌리로 엉킨 인연의 타래와 운명적 끌림 때문에 종종 그런 곳에 흘러들어간다.
봉은사의 밤과 신길동의 밤.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강남의 천년 고찰 미륵불 앞마당에서 열린 지식인 여성운동가들의 밤. 여성연합 후원의 밤에는 학계, 노동계, 문화계, 정계 등등으로 테이블이 배치될 만큼 유명인들이 다 모였다. 정갈한 유기농 뷔페 음식을 나누며 긴 시간 할애해 자리를 빛낸 이름을 소개하고, 요즘 상황이 힘들지만 그럴수록 더 사서 고생하자. 추운 겨울을 견디면 더 평등한 세상 따뜻한 봄날이 온다는 다짐으로 자리를 마무리했다. 초가을 싸한 밤공기와 크나큰 미륵불과 여인의 고운 치맛자락의 나풀거림이 만해의 시처럼 여운을 남겼다.
강북 한 주택가의 낮은 지붕 마루방에서 열린 소외된 여성들의 밤. 여성공동체 윙의 축제기간 중에 열린 고병권의 강연에는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여성들 이십 여명이 형광등 불빛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제목은 ‘앎은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주제가 너무 쓸쓸했다.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고상한 물음이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디 한 군데 탈각된 것들이란 존재증명이 되는 것 같았다. 삶이 너무 은혜로우면 굳이 저런 주제에 눈길이 갔을까 싶다. 돈이 삶을 구원하는가도 아니고 앎이라니. 심히 시대착오적이다.
근데 나는 왜 다시 저 물음 앞에 무릎 세우고 턱 괴고 앉아있나. 이미 강의를 들었고, 그가 교도소에서 강의할 때 취재도 했었고, 그의 책 <추방과 탈주>에서도 읽었던 내용인데 말이다. 내가 품은 질문을 알기라도 하는 듯, 고병권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인류가 내 뱉은 말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안다는 것은 문장을 발견하는 것보다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말이지만 그것이 다르게 해석될 때, 이미 있는 말인데 그 말의 무게가 다르게 와 닿는 것이 아는 것이죠.”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방법 안양교도소에 자격증 23개를 가진 재소자가 있었다. 전과 5범이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자격증이 늘어도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여기에 자활사업의 한계가 있다. 자활이란 삶 전체를 바꾸는 거대한 ‘변혁’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하지 못하고 즉각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들은 세상이 발로 차서 추방된 사람들이다. 세상을 그대로 둔 채 다시 그들을 갖다 놓으니 또 차이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계가 딴 세계가 되어야 살 수 있다. 고통은 해석이다. 천국과 지옥은 같은 방의 앞문과 뒷문이라고 한다. 지금 이 동일한 세계를 두고 지옥으로 느끼는 자, 천국으로 느끼는 자가 있다.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는 다른 세계에 사는 것이다. 추방된 자들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자격증으로 안 된다. 다른 세계를 가지려면, 다르게 세계를 해석하는 도구가 있어야 한다. 그 도구가 인문학이다.
넓은 의미의 가난한 사람은 이 세계를 풍요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가난할수록 혼자인 경우가 많다. 가난한 사람끼리 같이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낙인, 빈곤, 신체적 결손의 문제는 모두 함께 해결해야 한다. 자기 개인의 문제를 우리 사회 모두가 고민해야할 문제로 공적인 장에 던질 줄 알아야 한다. 그 때 우리들 말이 명확하게 언어로 도달해야하는데 ‘인문학’이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종교는 죽어서 구원받는 것이고, 인문학은 살아서 구원받는 것이다. 몇 가지 구원의 사례가 있다. 교도소 인문학을 마치고 졸업식 날 피자와 커피를 놓고 조촐한 파티를 한다. 옆 자리 재소자에게 수업 어땠느냐고 무엇이 기억에 남느냐고 물었다. “개념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용기는 생겼어요.” 또 출소를 한 달 앞두고 시간이 너무 안 가서 시간이나 때우려고 인문학 수업을 들었다는 어떤 이는 말한다. “그간 시간을 왜 죽이려고 했을까요. 이제부터 시간을 살려야겠어요.” 이렇게 깨우쳤다는 건 용기가 생기는 것이고 죽었던 것을 살리고 싶은 것이다.
어떤 앎이 삶을 구원하는가 대학에서 강의할 때와 중증장애인이나 재소자들과 현장인문학 강의할 때 차이점이 있다. 학생에게 지식은 정보이고, 공부는 그것을 저장하는 것이다. 가령 니체의 개념을 설명하면 이전에 자기가 알던 철학자 누구의 이런 개념과 비슷하군요 라며 기존의 앎과 견주어 앎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삶을 전해주지 않고 앎만 전해주는 게 가능하다.
반면에 야학에서는 다르다. 앎에 삶을 참조한다. 철학적 개념을 설명하면 자기 얘기를 꺼낸다. 선생님 이게 이런 말인가요? 그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라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 심지어는 선생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겠느냐? 며 “앎으로 삶을 뚫어보라”고 질문을 던져 진땀을 흘린 적도 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엎드려서 듣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일어나라고 하니까 “엎드려도 다 들려요.”라고 말했다.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들리는 게 사실이니까. 그 날 강의를 마치지 않고 돌아왔다. 엎드려서 들어도 되는 사람들에게 내가 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자기의 막힌 삶에서 벗어나고 싶고 구원받고 싶어 하는, 앎이 절실한 사람들을 찾아다녀도 부족할 시간에 말이다. 그래서3년 전에 대학 강의를 그만 두었다.
가르친다는 ‘교수’의 원뜻은 고백한다는 뜻이다. 자기 삶을 고백하고 살아갈 것을 약속하는 사람이고, 그 길의 벗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말한 대로 살지 않아도 되는 시대, 사는 대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됐다. 그러므로 ‘앎이 삶을 구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물어야 한다. '어떤 앎이 삶을 구원하는가.' 앎을 낳는 앎인가, 삶을 낳는 앎인가.
만물은 만물에게 가르친다 한번은 어느 장애인이 이렇게 물었다. “장애를 왜 극복해야만 하나요. 장애인인 채로 행복하면 안 됩니까.” 그 장애인은 정상인이 뭔가 싶어 사전을 찾아봤으나 뜻이 나와 있지 않다고 했다. 한 군데 사전에는 비정상인이 아닌 사람이라고 나와 있단다. 정상인은 정의조차 내릴 수 없는 허깨비다. 그런 점에서 장애인은 장애를 극복해야하는 게 아니라 정상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시대 진리가 우리시대 어리석음이다. 낙인효과, 편견은 객관적 편견 보편적 편견이 됐다. 이것이 도덕과 됨됨이와 진리로 포장돼 있다.
플라톤은 오류를 극복하라고 가르쳤지만, 그 장애인은 나에게 진리를 극복하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학교다. 학생과 강사 내남없이 배움이 일어나는 곳.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자에게도 가르친다는 말이 아니라 배우게 한다는 말이 맞다. 서로가 서로를 배우는 것. 어부는 그물치는 법을 거미에게 배우고, 뮤즈는 노래하는 걸 새에게 배운다. 만물은 만물에게 가르친다. 지식인의 책무는 없다.모든 사람의 책무는 똑같다.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 강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해보았다. 교도소에서도 여성공동체에서도 고병권은 참 잘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참가자들은 두 시간 동안 마루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미동도 없이 몰입했다. 강의가 어색하고, 철학자의 이름이 낯설 그녀들이지만 두눈 반짝이며 경청했다.
삶을 창조하는 앎인가 나 역시 행복했다. 가볍게 포도주 한 사발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앎은 나의 삶을 구원했는가 묻는다. 내가 지금 들뢰즈와 푸코를 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왜 인문학을 공부하는가. 처음엔 그 재소자의 말대로, 개념은 희미해도 어떤 용기가 생겼다. 깨우침은 깨뜨림이다. 통념이 깨질 때 새로운 사유가 일어난다. 세상이 다르게 해석되니까 살면서 불편했던 지점들이 해소됐다. 나를 둘러싼 사회적 규범과 관습과 도덕이라는 마음의 감옥, 그 창살이 보이니까 하늘도 보이고 일단은 숨통이 트인다고 할까. 이젠 올드보이처럼 날마다 저 벽에 조금씩 균열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펜을 날카롭게 다듬어야겠구나.'
이성의 공적사용 단계. 나의 문제를 공적인 장에 언어로 던지기 위해서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할 테고 큰 용기는 큰 깨우침에서 나올 것이다. 라디오를 들을 때면 묘하게도 나 혼자만 갇힌 게 아님을 느낀다. ‘4092’님 ‘3411님’ 서로를 핸드폰 뒷자리 번호로 부르는 수인의 시대. 위치추적이 가능한 감시의 시대. 경쟁하고 내몰리다 죽어가는 세상.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발로 차이는 지점. 그 근본문제에 다가서기 위해서, 효과적인 '통방'을 모색하기 위해 앎을 재촉한다. 인식의 밧줄을 꼬며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앎이 아니라 '세상과 엮이고 사람과 묶이는' 배움을 위해 책장 넘기고 말 건넬 일이다. "삶을 창조하지 않는 앎은 무의미"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