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일기 / 이성복

[올드걸의시집]
입동이 지났는데도 딸아이는 여름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다른 운동화나 구두는 신지 않는다. 자기 발에 맞게 편안히 늘어난 것이 좋은가보다 싶어 그냥 두었다. 이번주부터 추워진다는 일기예보에 지난 일요일에 부추를 사러갔다. 다행히 맘에 드는 부추를 사서 집으로 가는 길. 우리모녀는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마을버스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는 무거운 쇼핑백을 들고는 낙엽이 뒹구는 창밖을 구경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런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서형아. 집에가면 엄마 원고 써야 하거든. 내일까지 써야할 게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엄마한테 자꾸 말시키지 말고 혼자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놀아야 해. 부추도 샀으니까 엄마가 부탁할게." 31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딸아이에게 나는 진심을 다해 이렇게 말했다. 그랬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가 시무룩하게 말한다.
"엄마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시집가는 거 같다." 잠깐 웃겼고 이내 슬펐다.



1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늙은 풍차, 휘이 돌려 보시지
몸은 녹슬은 기계, 즐거움에 괴로움 섞어
잠을 만드는 기계
몸은 벌집, 고통이 들쑤신 벌집
몸은 눈도 코도 없지만 몸을 쏘아보는 엽총과
몸을 냄새 맡는 누리의 미친개들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낡은 신발, 뒤집어 신고 날아 보시지
----당대의 몸 값은 신발 값과 같으니
당대의 몸이 헤고 닳아, 참으로 연한 뱃가죽 보이누나

2


한 마리 말을 옭아매는 마차의 끈은, 끊어지지 않는
마차의 사랑 마차의 꿈 사랑한다 가엾은 내.....
미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 올리는, 가늘은 낚싯줄은
물고기의 사랑, 사랑은 입으로 말하여지고 사랑은 입을 꿰뚫고
그래, 개를 걷어차는 구둣발은, 구두를 닮은
소가죽의 사랑 픽, 쓰러지며 소가 남긴 사랑

죽은 나무는 자라지 않지만 죽은 나무의 괴로움은 자라고
지금 밀물은 바로 그 썰물이었으며 애인은
애인을 닮은 수렁이었고 애인을 닮은 무딘 칼이었고
애인을 닮은 불안이었고

그래, 온 몸으로 번지는 매독의 사랑
문드러지면서 입술이, 허벅지가 표현하는 아기자기한 사랑
어머니, 저의 밥은 따뜻한 죽음이요 저의 잠은 비좁은 수의요
어머니 저는 낙타요 바늘이요 성자요 성자의 밥그릇이요
어머니, 저는

견디어라 얘야, 네 꼬리가 생길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마라, 아픈 것들의 아픔으로 네가 갈 때까지
네 혓바닥은 괴로움의 혓바닥이요 네 손바닥은 병든
나무의 나뭇잎이요

3

어느날 엄마, 내가 아주 배고프고 다리 아파 목마른 논에
벼포기로 섰다면 엄마, 그 소식 멀리서 전해 듣고 맨발로
뛰어오셔 얘야 가자 아버지랑 형이랑 너 기다리느라
잠 한숨 못 잔단다 집에 가자 내가 잘못했어 엄마, 그러시
겠어요?

그러실 테지만 난 못 돌아가요 뿌리가 끊어지면 물을
못 먹어요 엄마,제 이삭이나 넉넉히 훑어 가시지요

어느날 엄마, 내 살 길이 아주 가파르고 군데군데 끊어지
기도 한다면
엄마, 얘야 내 등에 업혀라 밥 많이 먹고 건강해야지 너만
보면
마음 아프구나 하시며 내 살 길처럼 타박타박 걸어가시겠
어요?
엄마 걸어가시겠어요? 발굽이 부러지면

등으로 기어 날 안고 가시겠지만 엄마, 난 못 가요
내 사지는 못박혀 고름 흘려요

엄마, 어느날 저녁 구름을 밀어내며 얘야
여기 예루살렘이야 통곡으로 벽을 만든 나의 안방이야
요단, 잔잔하단다 요단, 지금 건너라, 빨리 하시면

내가 건너가겠어요? 어느게 나룻배인가요? 아니예요
그건 쓰러진 누이예요 엄마, 누이가 아파요

이성복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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