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들

[은유칼럼]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촛불 집회는 수업을 마친 후 학인들과 동행한다. 20대부터 50대까지 삼삼오오 몰려간다. 일전에 문화공연에 정태춘이 나왔을 때 사오십대는 작은 탄성을 냈고 이십대는 물었다. “정태춘이 누구에요?” “음유시인인데, 우리나라의 밥 딜런 같은 존재랄까?” 난 가사도 음색도 최고인 가수라고 한껏 들떠 소개했다. 설명을 듣던 친구는 검색 본능에 따라 스마트폰을 켜더니 날 보여준다. 실시간 검색어 1위 정태춘. 집회에 온 젊은이들이 ‘늙은 가수’를 모르는 것이다. 


지난 주말 집회에는 남성 댄스그룹 DJ DOC가 문화공연에 출연할 예정이다가 무산되는 일이 있었다. 현 국정농단 사태를 비판하는 노래를 발표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을 ‘미스 박’으로 칭하는 대목 등이 문제가 돼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이를 두고 SNS에서 논쟁이 일었다. 미스 박은 결혼 안 한 여자를 뜻하는 말이니 문제될 것 없다, 미스 박은 여성비하적 멸칭으로 문제다,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논리를 떠나서 나는 ‘미스 박’이란 말을 듣는 순간 불쾌했다. 사회초년생 ‘막내 여자’일 때 남자 직원들 커피 타주고 심부름을 해야했는데 그때 난 미스 김이었다. 동기 남자직원은 미스터 김이 아닌 ○○○씨라는 이름 석 자로 불렸다. 물론 문제제기를 했고 일부 시정되었지만 중년의 상사들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미스 김 호칭을 완전히 벗은 것은 노조에서 일하면서부터다. 그러니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미스 ○은 도구적 호칭이지 인격적 호칭은 아니(었)고, 성평등 문화를 저해하는 낡은 언어인 게 사실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현직 대통령의 무능과 부정을 비판하면서 왜 꼭 굳이 대통령의 성별을 들먹여서 여성들 전체의 억압된 기억을 들쑤시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집회에 온, 한 번도 미스 김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들은 미스 김이었거나 미스 김일 수 있는 사람의 처지를 모를 수 있다. 모른다는 것을 알았으면 무수한 말들을 귀담아 듣고 배우면 되는 일이다. 이건 표현의 자유가 아닌 시민윤리의 습득, 인간 존중의 사안으로 접근해 노력해야 한다. 


광장 밖에서도 말의 간극을 자주 확인한다. 한번은 수업 시간에 프랑스 문학 이야기를 하면서 ‘불란서’(프랑스)라고 했더니 한 친구가 불란서가 뭐냐고 물었다. 어떻게 불란서를 모르는가 싶어 당황했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젠 거의 쓰임이 없는 고어가 된 모양이다. 반대로 이십대가 쓰는 ‘금사빠’(금세 사랑에 빠지는 사람) ‘어좁’(어깨가 좁음) ‘딥빡’(깊게deep 빡침)이란 말을 난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음성메시지보다 문자메시지를 애용하고 SNS 기반으로 대화를 나누다보니 젊은 세대 중심으로 줄임말이 계속 생산되는 추세고 온라인 언어는 자연스레 오프라인으로 넘어온다. 새로운 말들의 진격 앞에서 어리둥절하지만 그래도 알아들으려 노력한다. 말과 생각을 나누고 살아야 하니까. 


우리는 같은 언어 생활자라도 다른 세계에서 산다. 일반 상식과 가용 어휘가 다르다. 여성의 언어를 남성이 모르니까 미스 박이 뭐가 문제냐고 말하고, ‘젊은이의 병을 늙은 의사가 모르니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말하고, 장애인의 언어를 비장애인이 모르니까 박근혜는 발달장애인이라고 말하고, 채식주의자의 언어를 육식주의자가 모르니까 골고루 먹어야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언어를 모른다는 것은 한 사람의 고통과 정서를 모른다는 말과 같다. 말을 못 알아듣는 한, 존재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 의심해본 적 없는 사람, 새로운 언어 표현을 발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타락한 정권을 욕할지언정 이 엉망인 국가 사회체계에서 사는 데 큰 불편이 없는 기득권자일 가능성이 크다. 아주 최소한의 단어로도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박근혜가 그걸 증명해준다. 


-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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