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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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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수박 커다란 수박만 보면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는 전형적인 옛날엄마였다. 알뜰과 궁상의 화신. 그래서 여름에 수박을 살 때도 1만원이 넘으면 망설였다. 지금이야 물가가 올라서 1만원 이하 수박이 거의 없지만 4-5년 전만해도 내 기억에 1만 2천원이면 제일 크고 좋은 수박을 살 수 있었다. 근데 엄마는 소심해서 그걸 못 사고 꼭 7-8천 원짜리 수박을 샀다. 대략 아기 머리 크기의 수박이다. 운이 좋으면 잘 익은 것이지만 대부분 못난이 수박이라 그리 당도가 높진 않았다. 내가 5천원 차이로 웬 궁상이냐고 뭐라고 하면 엄마는 “시원한 맛으로 먹지~” 라며 끝까지 저가수박을 고집했다. 어쨌거나 ‘얼음’같은 수박을 주기적으로 먹어줘야 할 만큼 엄마에게 여름은 잔인한 계절이었다. 여름에는 입맛도 없고 음식도 잘 상하..
<안토니아스 라인> 미래를 낳는 엄마-되기 여자는 출산을 거치고 엄마가 되기 전까지 젠더를 크게 경험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호적과 아이에게 ‘몸’이 묶이기 전까지는 남자와 별반 다르지 않게 자유로운 개체로 맘대로 살 수 있고 그래도 사실 큰 탈이 없다. 적어도 한 생명이 굶어죽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아이가 생기고 ‘엄마’가 되면 제도의 벽, 일상의 벽에 자꾸 가로막힌다. 맞벌이를 해도 애가 아플 때 눈치 보며 조퇴하는 것도, 회식 때 먼저 일어나는 것도 대부분 엄마다. 불편하고 부당하고 답답한 게 많다. 나를 둘러싼 ‘삶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당연한 질서에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고민은 고민대로 하면서 끼니와 빨래의 영원회귀를 견디며 아이와 함께 매일을 살아낸다. 개인적으로 육아의 과정에서 나를 무화시키는 경험은 특이했다. 단단한..
내가 아프면 당신도 앓으셨던 엄마의 기일 엄마의 기일이었다. 돌아가신지 3년이 흘렀다. 긴 시간이었다. 여자에게 엄마의 죽음은 아이의 출산에 버금가는 중요한 존재사건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한 차례 변이를 경험했다. 세상을 감각하는 신체가 달라졌다. 삶이라는 것, 그냥 살아감 정도였는데, 엄마를 통해 죽음을 가까이서 보고 나니까 ‘삶’이라는 추상명사가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삶은 이미 죽음과 배반을 안고 시작된다. 그것이 ‘인생 별 거 없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죽으면 한 줌 재로 될 몸뚱이 나를 다 쓰고 살자’는 억척스런 삶의 방식의 변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엄마의 딸. 굳센 금순이가 됐다고나 할까. 이것은 존재의 깊이와 상관없는 강도다. 단단함. 억척스러움 같은 거...
87년 넥타이부대가 08년 유모차부대로 바뀐 까닭은 신자유주의는 '엄마'가 대세다. 유모차부대의 등장은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시대적 요청이다. 이제 ‘엄마’는 단순히 낳는 자와 기르는 자를 넘어 양육의 주체이자 소비의 주체, 노동의 주체, 노동력 생산(출산)의 주체이자 사회변혁세력의 주체로 그 지위가 변화되었다. 사회적 관계구성의 중핵이 엄마로 바뀐 것이다. 왜 여성도, 모성도 아닌 '엄마'인가. 왜 '엄마'의 주체화에 대해 사유해야 하는가 90년대 IMF 이후 사회는 급변했다. 서민층의 실직과 가계부채증가로 무려 300만 명의 신빈곤층이 발생했다. 실직가장이 늘어나고 상시적 정리해고가 횡행하면서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졌다. 구조조정으로 인해 기업과 상인이 도산하고 개발의 역풍을 맞은 농어촌은 사라졌다. 아빠들은 일터에서 쫓겨났다. 그전까지 아빠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