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절대로 하지 마

[은유칼럼]

‘자유로운 영혼 뒤에는 울부짖는 처자식이 있다.’ 넥타이 맨 사람보다 기타 든 사람에게 쉬이 매료되던 내게 선배가 해줬던 충고다. 연애 상대자의 미덕이 결혼하면 악덕이 될 수도 있다는 그 생활 격언에 따라 기타 치는 직장인과 결혼했고, 아이를 둘 낳았다. 가족제도 울타리에 들어앉은 나는 애 낳고 사는 일상이 갑갑할 때마다 영화나 문학(같은 삶)으로 도피했다.


소설 <마담 보바리>류의 몰락 서사는 늘 매혹적이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리는 인생이라니. 사진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와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사랑은 또 어떤가. 여자는 아이를 원하지만 남자는 출산에 반대한다. 스물세살 연상 남편이 ‘핏줄’을 거부하고 아내의 일을 독려하는 이국 문화는 낯설고 부러웠다.


여성이 책을 낼 수 없었던 19세기,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애 둘 데리고 이혼한 뒤 뭇 예술가들과 자유연애를 구가한 스캔들의 여왕이자 쇼팽의 뮤즈였던 소설가 조르주 상드에서 1930년대 파리지앵과 바람나서 이혼당하고 행려병자로 죽은 우리의 신여성 예술가 나혜석까지. 금기와 위반의 서사는 사랑, 자유, 욕망, 존엄 같은 큰 물음 앞에 나를 세워놓았다.


어설픈 몽상가 아줌마를 현실로 데려온 건 홍상수였다. 술과 말이 흥건한 그의 영화는 지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장한 울부짖는 중년 남자의 민낯을 전시했다.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을 가진 그의 영화를 난 꼬박꼬박 챙겼다. 그는 사랑의 위대함이 아닌 집착, 질투, 미련, 지배욕망 같은 지지하고 시시하고 이중적인 감정들을 보게 했다.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을 자꾸만 생각하게 했다.


얼마 전 공개된 홍상수와 김민희 연애 소식을 나는 스크린 바깥으로 흘러넘친 영화라고 보았다. 그들이 일에서 보여준 존재감 그대로다. 길들여지지 않는 눈빛을 가진 배우다웠고 영화와 현실을 뒤섞는 능청스러운 감독다웠다. 역시 어느 시대나 다르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다르게 사는구나 싶었다. 안전한 삶보다 모험적 사랑에 존재를 던지는 선택은, 지리멸렬한 관계의 파고를 넘는 평범한 삶만큼 존중받고 보존해야 할 사랑의 역사가 아닌가.


일각에선 단죄 여론이 들끓었다. ‘전지적 홍상수 부인 시점’으로 접근한 기사들은 한 사람을 온전한 사랑의 주체가 아닌 작정한 가정파괴범으로 지목했다. ‘나이 어린 년’은 어떤 이슈에서도 약자다. 실제로 아버지나 남편의 외도를 경험한 주변인들이 자신은 이런 사건을 ‘쿨하고 힙하게’ 받아들일 수 없음을 고백했다. 그런데 그들은 또한 가장의 부재로 생존에 위협을 느꼈던 자기 고통을 진술하고 남겨진 자의 아픔을 헤아려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영혼 뒤에는 내적 성숙을 이뤄가는 처자식도 있는 것이다.


“이유(EU)도 해체될 거 같은데 우리는 해체 안 해?” 기타 치는 일보다 차트 보는 일에 골몰하는 남편이 묻는다. “언제든”이라고 나는 눙친다. 결혼도 이혼도 인연의 방편이자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라고 여기면서도 삶의 관성을 깨지도 못하고 사랑의 물음을 놓지도 못하고 나는 살고 있다. 좋은 영화, 좋은 문학이 품어온 사랑과 자유의 가치가 일상의 문화 감각으로 승인되는 일은 요원할까.


합리성과 익숙함으로 최적화된 세상에서 인간 정신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그러니 ‘사랑을 목발질하며’(기형도) 살아가는 희귀종들을 그냥 살게 두면 안 될까 싶다. 홍상수는 <옥희의 영화>에서 사랑 꼭 해야 하냐는 질문을 던지고 이렇게 답한다. “사랑 절대로 하지 마. 정말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딱 버텨봐. 그래도 뭔가 사랑하고 있을걸?”



<한겨레> 삶의 창, 2016. 7.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0579.html?_fr=m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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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 - 등 뒤의 화살표

[극장옆소극장]

안 쓰고 안 만나고 살았다. 조금은 의도적으로 납작 엎드려 지냈다. 이 세상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하루를 살고 나면, 사십대의 황지우가 그랬듯이 하루를 저질렀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러고 싶을 땐 그래야 한다. 마음에 쏙 드는 나의 개인기. 직감에 민감하다는 것.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홑겹 인생인지라 느낌 대로 사는 게 몸에 배인 편이다. 강의 하러, 세미나 하러, 회의 하러 일주일에 세 번 연구실만 댕겼다. 시내를 지날 때는 유혹에 흔들렸다. 시청에서 지하철을 타면서 핸드폰을 꾹 쥐고는 <북촌방향> 유준상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할 거다.’ 


충무로 방향. 얼굴 안 보고 일을 처리하려고 용건만 간단히메일을 보냈다가 께름칙해서 전화를 넣었다. 충무로에 들렀다. 예전에 셋이 자주 뭉쳤던 그의 후배랑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추억의 삼자회동. 나를 위해 남겨두었다는 쭈꾸미불고기 몇 점을 먹었다. 입에서 녹는 맛. 오가는 정담. “누나를 마지막으로 본 게 신촌이야. 돈가스 사줬잖아. 그 집 아직도 있더라. 얼마 전 여자 친구랑 지나가면서 그 때 얘기 했거든...” 기억의 복원. 80년대 명동 경양식집 분위기 물씬한 구닥다리 카페. 정직한 공간구획과 낡은 소파가 좋아서 애연가 친구들과 자주 가던 곳이다. 후배의 얘기를 들으면서 누군가에게 나는 붙박이 장처럼 장소와 함께 기억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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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의 영화 - "홍상수 영화에 약 탔나봐"

[극장옆소극장]

사랑은 교통사고인가에 관한 물음

'난 사랑은 교통사고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피할 수 있다는 거?’ ‘응’ ‘음... 그래.  어떤 점에서 그런지 더 설명해줘’ ‘주체는 자기 의지와 윤리적 선택에 따라 형성되는 거잖아. 먼저 결정돼 있는 게 아니고.’ ‘그래도 싫은 사람을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잖아.’ ‘그런데 좋은 사람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나는 어떤 남자에 굉장히 빠졌었거든. 그 때 외로워서 그랬던 거 같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거야.’ ‘왜? 섹스하고 싶어서?’ ‘응. 근데 뻔히 보였어. 굉장히 강하고 복잡한 사람이었어. 저 사람을 사랑하면 내가 고통으로 몸부림치겠구나’ ‘복잡한 사람 사랑하면 지옥이지’ ‘엄청 참았어. 지금 생각해도 잘 한 거 같아. 사랑하지 않은 건’ ‘난 그렇게 이성이 판단하기 이전에 일어나는 사건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의지나 결심마저 무화시키는 소용돌이. 어떤 격정.’ ‘그런 거 없어. 다 자기의 판단과 선택이야.’ '타당한 면이 있네. 더 생각해 볼게.'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가 시작됐다. 역시 사랑. 통속적인 사랑. 재밌고 웃기고 남루하고 쓸쓸한 사랑.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만났다 헤어지는 둘레를 가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 사는 동안 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게 인생이라고 홍상수는 얘기한다. 좋아서 미치겠다. 이 세계의 비밀을 자기만의 언어로 농밀하게 심상한 듯 풀어내는 그를 나는 거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번에는 스태프 5명에 5천만 원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전 작품보다 더 저예산에 더 즉흥적으로 제작한 실험적인 영화였다. 앙상블이 뛰어나다. 묘한 울림과 애상을 자아낸다. 괜히 가슴이 뛰고 웃음이 났다. 옥희 역의 정유미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다. “학교에 무슨 약 탔나봐? 요새, 다들 나 좋다고 난리다. 난리” 나는 홍상수가 영화에 약 탄 거 같다. 요즘 들어 좋아 죽겠다. 기자 간담회에서도 홍상수 빠돌이빠순이 기자들이 난리가 났다. “먼저 일 년에 두 편이나 감독님 영화를 보게 돼서 기쁘단 말씀 드리고 질문하겠습니다.” 맘속으로 맞장구쳤다.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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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그리 대단한 사랑은 없다

[극장옆소극장]

나를 키운 8할은 오빠들이다. 지나고 보니 열아홉 이후에는 늑대소굴에서 살았다. 그들을 남자로 보았을 리 만무하다.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킬 여지도 없었다. 성적인 것에 무지했다. 순결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줄도 모른 채였다. 당시 내게 남자란 이성理性. 다른 성별이 아니라 합리적 존재였다. 같이 있으면 말도 통하고 배우는 것도 많고 즐거웠다. 좋은 사람의 좋은 기운에 끌렸고 그들도 나를 국민여동생처럼 예뻐했다.  

가장 따랐던 선배A. 나의 사수였다. ‘대학에 가도 이런 공부만 하니까 내가 가르쳐 준다’며 호의를 베풀었다. 몇 개월 토요일에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녹두에서 나온 감색 책 ‘세철’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책을 읽고 묻고 답하고 정리했다. 영화 보면 과외선생님이랑 정분이 나기도 하던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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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상수식 인간이해의 '금자탑'

[극장옆소극장]

웃으면 지는 건데
극장에서 이렇게 많이 웃어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평일 조조였다. 텅 빈 극장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벽을 치고 다시 나의 옆구리를 찌르니 웃음에 포박당한 기분이었다. 커다란 스크린에 지나가는 장면은 홍상수영화답다. 주인공이 영화감독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지 않다. 생활여행자의 길 떠남의 풍경인데, 거기에 배치된 인물들 간의 얽힘과 오가는 대사가 재밌다. 딱히 김수현식의 능란한 촌철살인이라기보다 능청맞고 투박하고 격앙되고 오버스러운데 그것들이 시의적절하고 적나라하고 섬세하고 의미심장하다. 같은 이유로, 예전에는 그의 영화가 재밌지만 불편하고 불쾌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부끄럽고 불편해서 재밌다. 홍상수 영화, 웃으면 지는 건데. 내가 변한 걸까, 홍상수가 변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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