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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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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민중총궐기 수업 풍경 집회 참석으로 마음이 바빠서 합정동 말과활아카데미에서 광화문 근처로 수업 장소를 옮겼다. 경복궁역 근처 '푸른역사아카데미' 강의실에서 이동 수업. 마침 최승자의 시집 을 읽는 시간. 거리엔 전경차가 빼곡하고 낙엽이 흩어지는 가을 풍경을 등지고 우리는 최승자의 시를 낭랑하게 읽었다. 광화문에서 급한대로 한컷 사람 좀 빠져나가서 '대학광고' 같은 연출샷. 저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 해방구가 된 도심을 걷고 걷고. 휘엉청 달밝은 서울의 밤을 누볐다.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최승자 시집, 문학과지성사 가을맞이 영어세미나를 시작했다. 푸코의 마지막 저서가 된 다. 강연록이라 구문이 어렵진 않다. 단어가 생소하지. 그 말에 속아서 용기를 내보았다. 세 번 세미나..
雨日 풍경 / 최승자 비 떨어지는 소리, 위에 떨어지는 눈물. 말라가던 빨래들이 다시 젖기 시작하고 누군가 베란다 위에서 그 모든 기억의 추억의 토사물을 한꺼번에 게워내기 시작한다. - 최승자 시집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되지요. 그건 보통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최승자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세상을 등지고 포항의 정신병원을 출입하던 그녀에게 한 기자가 "시를 쓰던 당신이 왜 폐인이 됐는가" 묻자 답한 말이다. 토요일 시세미나을 위해 최승자의 세번째 시집 을 꼼꼼히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절망의 와중에서 뭉기적뭉기적 시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사람. 그녀가 성냥개비처럼 삐쩍 마르고 일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게 마음 아팠는데, 점점 존경스러운 마음, 부러운 마음이 든다..
최승자, 절망의 골수분자 나의 삼십대는 두 번 기록될 수 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풍파도 보람도 넘실넘실. 많이 웃었고 많이 울었다. 고통과 행복이 쌍둥이처럼 나란하던 시절, 비극버전을 쓴다면 최승자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제목만으로도 목차와 내용을 메울 수 있을 것 같다. 등등. 처연하고 당돌한 웅성거림. 그 말들의 꽃다발을 덥석 받아 안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이 있다. 결혼과 출산을 마치자 가족이 마구 늘어났다. 정서노동의 분량은 인간의 기준치를 초과했다. 혹처럼 내 삶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들을 떼버리고 싶었다. 24시간 이인삼각 경기를 치르는 것처럼 절뚝절뚝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먹고 자고 멍하니 있는 생리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가 가장 괴로웠다. 그들이 제거되는 ..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14 나를 빨아들이는 길. 나를 뱉아내는 길. 빠져나올 수 없는 길. 들어갈 수 없는 길. 영원토록 길이 나를 가둔다. 영원토록 길이 나를 해방시킨다. 떠나야 할 시각이 길게 드리워진다. 그가 끝나도 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길 모퉁이에 이따금씩 추억의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다. 우연의 형식들로 다가오는 모든 필연을 견디면서 이미 추억이 다 된 나무 한 그루 백발의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다. - 최승자 시집 문학과지성사 악행을 저지르기를 대놓고 해본 적은 없는 거 같다.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악행이 된 경우는 많겠지만 말이다. 항상 강박에 가까운 임무의식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일터에서건 가정에서건 조직에서건. 완벽한 임무수행. 깔끔한 뒷마무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연의 형식들로 다가오는 모..
20년 후에, 芝에게 / 최승자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라'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江)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