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 민중총궐기 수업 풍경

[사람사는세상]

집회 참석으로 마음이 바빠서 합정동 말과활아카데미에서 광화문 근처로 수업 장소를 옮겼다. 

경복궁역 근처 '푸른역사아카데미' 강의실에서 이동 수업. 


마침 최승자의 시집 <기억의 집>을 읽는 시간. 




거리엔 전경차가 빼곡하고 낙엽이 흩어지는 가을 풍경을 등지고 

우리는 최승자의 시를 낭랑하게 읽었다. 



광화문에서 급한대로 한컷



사람 좀 빠져나가서 '대학광고' 같은 연출샷. 저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



해방구가 된 도심을 걷고 걷고. 휘엉청 달밝은 서울의 밤을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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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올드걸의시집]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집, 문학과지성사

 

 

가을맞이 영어세미나를 시작했다. 푸코의 마지막 저서가 된 <진실의 용기>다. 강연록이라 구문이 어렵진 않다. 단어가 생소하지. 그 말에 속아서 용기를 내보았다. 세 번 세미나를 참여한 소감은 괴롭다는 것. 부끄럽다는 것. 어렵다는 것. 단어 찾느라 몇 시간이 후딱 가버리고 한줄한줄 내 분량을 발표하면서 버벅거릴 때는 시간이 더디 흐르고 고개가 자꾸 수그러진다. 누구와도 눈 마주치고 싶지 않다. 오죽하면 정수샘이 그런다. 평소 나답지 않게 왜 이렇게 바짝 얼었느냐고. 안 얼게 생겼느냐고 했다. 영어를 자그만치 23년 만에 들춰보는 마당인데. 몹시 기분이 얄궂다. 생각해보니 내가 뭘 못하는 사람으로 어떤 자리에 놓인 게 참 오랜만이었다. 

 

니체 공부할 때도 막막하긴 했지만 모국어라서 두렵진 않았다. 제도교육도 그럭저럭 통과했고 회사생활도 하나하나 배워갔고 가사노동도 얼렁뚱땅 처리했다. 탁월한 요소도 없었지만 취약한 부분도 없이 살았다. 어른이 되면, 자신에게 불리한 입지는 선택적으로 피할 수 있다. 근데 난 지금 무리수를 두었다. 자발적으로 영어천민의 자리를 점했고, 견딘다. "인식에 이르는 길에 그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스스로 주입하면서 마음 다잡는다. 인식의 매력. 푸코가 던지는 사유의 말들이 아련하지만 복음처럼 다가온다. 첫 시간엔 그런 상상을 했다. 현재 상태 매우 엉망이나 한 십년 원서 붙들고 헤매고 배우면 나중에는 번역도 해보고 싶다고. 어떤 구체성도 없는 무근거한 바람이다.

 

나는 행하는 자로 산다. 금단의 땅에서 열매 구하겠다고 내동 서성인다. 이건 자기계발 담론이 부추기는 열정은 아니고 억척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불가피하다고 여길 뿐. 일부러 거러는 건 아니고 그렇게 살게 된다. 왜 그럴까. 나도 내가 궁금하여 생각해 보았다. 재작년인가. 사주명리학을 공부한 친구가 점을 봐줬다. 내가 자수성가형 인물이라고. (만세력으로 점 칠 때도 꼭 나왔던 점괘다. 부모덕이 없는 팔자라고) 그래서 공부를 해가면서 살아야한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인간은 단독자로 살 수 없다는 건 알겠다. 사람의 후원이 없으면 책의 지원으로 살아야한다는 건가. 셀프돌봄 하라는 뜻으로 접수했다. 그런데 말이 쉽지. 물적 토대가 갖춰진 중산층 지식인 여성처럼 책만 파고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싱크대와 노트북과 밥벌이와 두아이를 오가며 틈틈이 공부하는 일은 진척도 느리고 몸뚱이도 축난다. 살기 위한 본능이 아니라면, 이 고난의 길을 왜 굳이 누가 택할까. 그런데 시련중독이 되었는지 어쩌자고 책상 앞에서가 가장 좋다.  

 

최승자는 이십대에 벼락같은 시를 써놓고 홀연 사라졌다. 행하지 않는 자로 살았다. "나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무위를 위하던 바틀비처럼 그랬다. 초월적 세계를 탐문하다가 죽기 직전까지 말라갔다. 재작년에 나온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시세미나에서 읽었다. '쉬임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시도 담배도 맛이 없다/ 세월이 하 짧아/ 시 한 편, 담배 한 대에 한 인생이 흘러간다'(<잠시 빛났던>) 정신병동에서 쓴 시들도 몇 편 있다. 시시한 삶에 발 딛은 나처럼 '책상 앞에서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천국이었음을 깨닫는다'(<책상 앞에서>)고 고백한다.  한장 두장 넘기다보면 더듬더듬 흘러가는 시간들에 젖어든다. 그곳은 다른 세계다. 청송교도소처럼, 쉽게 볼 수 없고 접근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세계다. 자본의 질서로 돌아가는 복닥거림에 벗어나거나 등지거나. 장애가 있어서든 의욕이 없어서든. 행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의 나라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삶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영어 원서를 파는 것보다 덜 사는 것은 아닐 터다. 자연을 찬미하고 사색에 잠기는 가을만이 아니라 개 같고 매독같은 가을이 있듯이. 이 세상에는 지구본처럼 돌려볼 수 없는 '한 세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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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日 풍경 / 최승자

[올드걸의시집]

 

떨어지는

소리,

위에

떨어지는

눈물.

 

말라가던 빨래들이

다시 젖기 시작하고

 

누군가 베란다 위에서

그 모든 기억의 추억의 토사물을

한꺼번에 게워내기 시작한다.

 

 

- 최승자 시집 <기억의 집>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되지요. 그건 보통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최승자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세상을 등지고 포항의 정신병원을 출입하던 그녀에게 한 기자가 "시를 쓰던 당신이 왜 폐인이 됐는가" 묻자 답한 말이다. 토요일 시세미나을 위해 최승자의 세번째 시집 <기억의 집>을 꼼꼼히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절망의 와중에서 뭉기적뭉기적 시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사람. 그녀가 성냥개비처럼 삐쩍 마르고 일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게 마음 아팠는데, 점점 존경스러운 마음,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그녀는 비록 굶고 병들었지만 자기 본래적인 모습을 지키며 사는구나, 배운대로 살아가구 있구나,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침뉴스에서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여성의 뒤를 쫓아 들어가 성폭행하고 살인한 사건을 봤다. 범인이 성폭행 전과자라며 전자발찌의 무용성을 논했다. 나는 유치원에 간 사이 엄마가 사라져버린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허름한 연립주택가이던데 그리 경제적 여유가 있어보이지는 않았으니 더 걱정이다.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여학생이 주인의 성폭행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건도 나왔다. 죽고 죽이고. 피도 눈물도 없이. 뺏고 뺏기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혀를 차고 돌아서면 잊는다. 말로는 세상이 흉흉하다, 미친세상이다, 얘기하지만 다 살아간다. 눈 감고 외면 하고 망각하고. 나도 그런다. 일상에 지장 없을 만큼만 기억하고 분노한다. 온통 약자를 짓밟고 뭉개면서 유지되는 부조리한 이 세상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아파하면 살아갈 수가 없다. 최승자만이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나가떨어짐으로써, 온전히 살고 있구나. 모두가 긍정을 말하고 희망에 기대고 불안을 팔아서 자기 밥그릇을 챙기고 있는데, 최승자는 형형한 눈으로 말짱한 정신으로 직시한다. 절망의 나락까지 떨어지는 용기는 어디서 오는가.

 

'지난해 겨울, 대산문학상 시상식이 있던 날, 뒤풀이를 끝내고 포항으로 다시 내려가는 최승자를 배웅하며, 나는 그 갸날픈 어깨에 얹었던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허공에 뜬 가랑잎을 쥐는 것만 같아 힘주어 붙잡을 수 없었다. 이 욕망의 거리에서, 아무 것도 쌓아둔 것이 없고 아무 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사람만이 마침내 그 슬픈 어깨를 얻는다고 해야할까. 끌어안기조차 어려운 이 어깨,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기대야할 어깨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 황현산 <잘표현된 불행> 중에서

 

 

최승자의 네번째 시집 <내 무덤, 푸르고>를 읽는다.

말라가던 빨래들이 다시 젖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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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절망의 골수분자

[올드걸의시집]


나의 삼십대는 두 번 기록될 수 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풍파도 보람도 넘실넘실. 많이 웃었고 많이 울었다. 고통과 행복이 쌍둥이처럼 나란하던 시절, 비극버전을 쓴다면 최승자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제목만으로도 목차와 내용을 메울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여인의 종말> <우우, 널 버리고 싶어> <부질없는 물음> <꿈꿀 수 없는 날의 답답함> <억울함>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등등. 처연하고 당돌한 웅성거림. 그 말들의 꽃다발을 덥석 받아 안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이 있다.

결혼과 출산을 마치자 가족이 마구 늘어났다. 정서노동의 분량은 인간의 기준치를 초과했다. 혹처럼 내 삶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들을 떼버리고 싶었다. 24시간 이인삼각 경기를 치르는 것처럼 절뚝절뚝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먹고 자고 멍하니 있는 생리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가 가장 괴로웠다. 그들이 제거되는 ‘사악한 꿈’을 꾸기도 했다. 본디 인간은 누구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단 한사람 엄마는 그렇게 살아가도록 트랙이 깔렸고 스위치가 켜졌다. ‘나의 불모가 너희의 영원한 풍요가 되는’ 삶. <꿈꿀 수 없는 날의 답답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면 주문처럼 외던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

움직이고 싶어
큰 걸음으로 걷고 싶어
뛰고 싶어
날고 싶어
깨고 싶어
부수고 싶어
울부짖고 싶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치고 싶어
까무러쳤다 십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고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시’던 서른 중반 어느 날, 선배랑 여자의 고단한 삶을 주제로 수다를 떨면서 “이렇게 살다가 마흔에 내 모습이 어떻게 돼 있을지 궁금하다”고 했더니 선배가 말했다. “난 마흔은커녕 눈 떴다 감으면 70살이면 좋겠어.” 그녀는 알아버린 것일까. 십년 후에 깨어나도 별로 달라질 게 없음을. 세월은 ‘길고 긴 함정’에 지나지 않음을 말이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왜 결혼은 했는지 ‘부질없는 물음’과 입씨름하면서 그렇게 ‘절망의 골수분자’가 되어가던 즈음 <올 여름의 인생공부>가 시작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해석에 따라 세계가 달라진다는 은혜로운 팁을 니체오빠에게 전수받았다. 사유의 근력이 자기배려의 기술이며, 남을 바꾸는 것보다 나를 바꾸는 게 더 신속한 자유와 해방의 길임을 깨달았다. 자기연민으로 주춤거리다가 자기초극의 스텝을 밟아보려 낑낑거렸다. 안 쓰던 근육을 쓰느라 탈골과 찰과상으로 비틀비틀. 덕분에 일상의 번다한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너무도 자유로와 쓸쓸한 세상’ 생일조차도 <슬픈 기쁜 생일>일 수밖에 없던, 늘 슬픔이 앞서가던 ‘후즐근’한 그 시절. 승자언니 시집을 가슴팍에 올려놓고야 잠들던 나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삼십대를 가까스로 통과했다.

지금까지는 어느 필모의 비극적 감수성 극뽁기이고, 세계와의 화해가 선천적으로 불가능한 사람도 있다. 천생 시인 최승자처럼.

김현은 『말들의 풍경』에서 ‘최승자의 시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다’라고 썼다.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은 이성이나 절대자, 때로는 단순한 대상이나 바람 같다고 했다. 나는 다르게 읽힌다. 최승자의 시는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의 곡소리다. 사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은 가장 큰 자기애다. 그녀는 절대자나 한 남자의 사랑을 간구하는 신체 건강한 꽃청춘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있던 사랑은 이미 ‘몇 세기 전의 겨울’의 추억일 뿐. 시집 전체에 도저히 흐르는 자기부정의 언어는 ‘단다한 슬픔의 이빨’로 ‘갈라진 혀끝’으로 ‘컹컹’ 짓는다.

첫 시 <일찍이 나는>에서부터 스스로를 ‘마른 빵에 핀 곰팡이’이자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이며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로 소개했다.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선포한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의 '영원한 트라이앵글'에 갇힌 채 ‘슬픔의 독이 전신에 발효하기를 기다리’는 이 극단의 허무주의자가 그리는 <자화상>이란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되’는 ‘어둠의 자손’일 뿐이다. 밤이면 ‘감긴 철사줄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린다.

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
나는 내 피의 튀어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

이것은 고급한 성장통이 아니다. 가혹한 운명이다. ‘자신이왜사는지도모르면서 육체는아침마다배고픈시계얼굴을하고’ 그렇게 매일을 살아가는 일이 선천적으로 자연스럽게 영위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하기에 시인은 시대의 흐름과 어긋나면서도 세상과 보조를 맞추려 노력한다. 부단히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애쓰고 시쓴다.

왜 어느 별은 하얗게 웃으며 피어나고
왜 어느 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가
조용히 나는 묻고 싶었다.

그리고 ‘외로움을 장전’한 채 <네게로> 간다. 살기위해 매달린다.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콜처럼
알콜에 엉키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 균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한 없이 오래 죽고 싶’은 방식으로 영생을 기원하는 그녀. 하지만 시집의 마지막에는 <불안>을 예감한다. ‘죽음이 나를 겨누고 있다’ ‘쨍! 죽음이 나를 향해 발사한다’는 환청을 듣는다. ‘어둠의 아가리’에서 발버둥 치던 한 사람. ‘정신이 아프고 인생이 아프다’며 ‘문간에 나가 앉아’있던 ‘긴 슬픔의 몸뚱어리’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삼십대를 보내고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마흔>(『내 무덤, 푸르고』,1993)을 맞는다.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최승자는 1993년 ‘따뜻한 무덤’을 뚫고 나온 말들로 네 번째 시집을 냈다. 여전히 고독한 자의식에 붙들려 세계의 오염을 견뎌내(이광호)던 불혹의 시인은 결국 정신병원으로 망명한다. 2010년 ㅈ일보 인터뷰에 따르면 최승자는 11년간 심신쇠약과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입퇴원을 반복하며 기초생활수급자로 연명했다고 한다. 개량한복 입은 향기롭고 원숙한 중년이 아닌 환자복 걸친 ‘불 꺼진 신호등 같은’ 얼굴이 되었다. 죽음의 자리를 사수하면서 삶의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던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되지요. 그건 보통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조화와 안정으로 귀결되지 않는 비타협과 난국의 목소리 쟁쟁하다. 어떤 위안도 거짓낙관도 없다. 몸이 쪼그라들도록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 것이다.

‘꽃, 상처, 스물 넷’에 이미 시인은 선언했다.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겠다고. 현실을 부정하는 난폭한 파괴가 꿈꾸는 건강한 힘이라고. 그리고 쓴대로 살았다. 그 풀리지 않은 모순을 견디며 시로 하여금 말하게 했다. 그렇게 ‘쓸쓸해서 머나먼’ 나이 예순까지 흘러왔다. 이 병든 시대에 진짜로 병자가 되어 살아가는 한 시인이 있어 나는 놀랍고 아프고 반갑고 서럽다. 자기파멸로 자기생장을 이루는 화해불가능성의 생(生) 시(詩). 그것은 고착인가. 무능인가. 비정상인가. 불행인가. 건강함인가. 고귀함인가. ‘행복행복행복한 항복’인가…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법은 내게 ‘귀신처럼’ 다가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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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14

[올드걸의시집]

나를 빨아들이는 길.
나를 뱉아내는 길.
빠져나올 수 없는 길.
들어갈 수 없는 길.

영원토록 길이 나를 가둔다.
영원토록 길이 나를 해방시킨다.

떠나야 할 시각이 길게 드리워진다.
그가 끝나도 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길 모퉁이에 이따금씩
추억의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다.

우연의 형식들로 다가오는 모든 필연을 견디면서
이미 추억이 다 된 나무 한 그루
백발의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다.


- 최승자 시집 <내 무덤, 푸르고> 문학과지성사


악행을 저지르기를 대놓고 해본 적은 없는 거 같다.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악행이 된 경우는 많겠지만 말이다. 항상 강박에 가까운 임무의식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일터에서건 가정에서건 조직에서건. 완벽한 임무수행. 깔끔한 뒷마무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연의 형식들로 다가오는 모든 필연을 견디면서, 그렇게 살아왔고 그래서 문제였다. 빠져 나가는 길을 몰랐다. 크게는 결혼이 그랬고. 위클리 수유너머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러질 못했다. 창간부터 재미와 감동으로 일했는데 어느 순간 동력이 떨어졌다. 아마 글쓰기 강의를 시작하면서 즈음같다. 살림하고 공부하고 강의하고 취재까지 하려니 웹진이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인터뷰도 글쓰기도 자기복제가 되는 느낌이 들어서 불만스럽고 시시해졌다. 용기를 잃어갔다. 근데 그만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인생은 뒷심'이라고 떠벌렸던 입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나까지 빠지면 가동인력이 너무 없어서다. 그러다가 악행을 저질렀다. 편지한통 보내놓고 편집회의에 무단결석했다. 내심은 니체수업 끝날 때까지로 기한을 정했는데 같이 밥 먹자는 요청까지 뻔뻔스럽게 '아니'라며 외면했다.         

어제 니체수업이 끝났다. 평일이라 겨울이라 마땅한 장소가 없어 엠티를 못가고 연구실에서 낮1시부터 밤12시까지 에세이를 발표했다. 할 때는 재밌었는데 몸에 무리가 간 걸까. 아침에 일어났더니 전신이 욱신욱신 쑤셨다. 침대에 이불 말고 누워 한나절을 보냈다. 입맛이 쓰고 마음이 휑하다. 글쓰기수업 한번 하고 끝날 때마다, 나는 이별한다. 징하게 이별한다. 시한부사랑처럼 각오된 슬픔이겠으나 비극적이고 궁상스러운 마음이 된다. 행복한데 불행하다. 힘을 받고 진을 뺀다. 왜 그런가. 각각의 삶 속에 깊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그럴까. 글쓰기 수업이 굿판인가. 돼지머리도 없구만; 모르겠다. 수업 끝나는 날에 맞춰 문의전화가 왔다. 다음 수업 언제 하느냐고. 뒷풀이할 때 동료들도 물었다. 다음 수업은 언제 하느냐고. 대답 못했다. 또 수업을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해야하는지, 할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 계획없이 사는 삶이 이럴 땐 불편하다. 일년 계획, 하다못해 일사분기 일정이라도 세워놓았다면 그대로 진행하겠지만. 하루하루 주사위 던져 사는 인생이니, 이 막막함 쓸쓸함 허전함의 트라이앵글 감내해야지. 지금은 길 모퉁이를 서성이며 인연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있다.  


* Mischa elman plays Zigeunerweisen 미샤앨먼의 연주로 듣는 지고이너바이젠. 너무 날카로워 차마 부드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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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후에, 芝에게 / 최승자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라'

[올드걸의시집]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江)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자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_____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 최승자 시집 <즐거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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