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은 전태일을 기록하며

[은유칼럼]

1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가 모인 글쓰기 수업에서 <전태일 평전>을 읽을 때면, 그의 생애 만큼이나 뜨겁고 척척한 말들이 오간다. 감응의 지점이 세대별로 조금씩 다르다. 60대는 ‘신발에 물이 새지 않으면 다행인’ 찢어지는 가난에 좀 더 공감하고 40~50대는 ‘비참한 현실을 바꿔내는’ 집요한 싸움에 반응한다. 20~30대는? 가장 열렬하다. 전태일이 그리는 생생한 노동 현장 실태에 맞장구 치며 목소리를 높인다. 


“월급 받아도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전태일 말이 그때나 지금이나 틀리지 않구나 싶어요.” “먹고 살길이 막막한 젊은이들이 서울로 몰린다는 것도요.” “노동력으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는 문장이 팍 와 닿아요.”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렴풋이 생각이 확실해질 때는 퇴근 시간이 다 될 때이다.’ 이 대목 읽으면서 진짜 제가 쓴 줄 알았어요.” 


전태일은 48년 생. 살아있었다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다. 책에 나오는 수기는 1960년대 후반에 쓴 글들이다. 무려 오십년 전 어느 노동자의 참담한 수기를 ‘요즘 젊은이들’이 지루해하면 어쩌나 하는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무지와 편견이었다. 마르크스 말대로, 어떤 노동자가 어떤 자본가를 만나느냐는 우연적일 수 있지만 전체로서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을 만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인 법. 전태일의 평화시장이 그들에겐 편의점이고 사무실이다. 완장 찬 작업 반장 대신 CCTV가 감시할 뿐, 사람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 보는 현실은 너무도 닮았다. 


며칠 전 수업 때다. 머리카락 희끗한 어느 남자 학인은 <전태일 평전>을 읽고 무슨 예언처럼 이런 말을 보탰다. “전태일은 기록이 남아 있고 분신을 해서 후대에 알려졌지만 아마 그 당시 전태일 만큼 열심히 싸운 다른 노동자가 또 많을 겁니다.” 그리고 그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난 거짓말처럼 어느 노동자의 ‘부고’를 들었다. 


경기도 시흥의 스피로폼 파쇄업체에서 한 노동자가 파쇄기에 상반신이 끼어 압착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그는 이미 25세에 공단지역에서 일하다가 프레스 사고로 손가락 4개를 절단한 산재노동자이고, 그 사건을 계기로 수지 접합 산재노동자들을 돕는 일에 15년 간 종사한 활동가였다. 4년전 베트남인 여성과 결혼해 3살, 5살 두 아들과 다문화가정을 꾸리며 일상을 일궈가던 중 참변을 당한 것이다.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사례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2016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다룬 매체는 <한겨레>와 <민중의 소리> 두 곳 뿐이었다.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바둑 대결이 생중계 되는 첨단과학의 시대에, 기계가 사람을 삼켜버리는 영세 사업장의 무참한 현실은 뉴스가 되지 않았다. 아마 페이스북을 열지 않았으면 나도 몰랐을 일이다. 이십대에 손가락 네 개를 잃고 사십대에 온 몸이 찢긴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그렇게 조용히 세상에서 지워진다.


기억할 것 많은 4월, 기억 하나 더 얹는다. 남현섭(1967~2016). <전태일 평전> 한 귀퉁이에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쓴다. 기록되지 않는 전태일의 죽음을 기록한다. 다음 수업에 학인들에게 읽어줄 것이다. 이 찬란한 봄에 그가 꾸었던 소박한 꿈을.


‘자연이 연출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그리고 상상하고 있노라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아름다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 때까지 이렇게 몸과 마음이 다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2010년 4월 26일 '건강한 노동세상 소식지'에 고인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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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호 전태일노동대학대표 '이론은 맑스, 실체는 전태일'

[행복한인터뷰]

확고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면서
오 멋져라, 머리를 옆으로 흔드는 것은!
- 브레히트 <의심을 찬양함> 중에서

49년생 김승호, 48년생 전태일. 두 사람은 친구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던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를 원할 할 때는 서로를 몰랐다. 노동자와 대학생인 그들은 만날 수 없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야 인연이 열렸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피맺힌 외침에 삼동친목회 친구들 김영문, 신진철, 이승철, 임현재, 최종인이 ‘청계피복노조’를 만들었다면 “나를 따르라”는 간곡한 요청에는 김승호가 가만히 손 맞잡았다. 1970년 11월 13일 대학생 배지를 떼고 노동운동에 투신해 “아직도 전태일이냐”는 말을 들으며 새천년을 맞았고 그해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을 세웠다. 공부하는 노동자 전태일의 부활로 40년 세월 신실한 우정을 다지고 있는 김승호 대표를 만났다.


40과 10. 완벽한 균형을 지닌 숫자를 기념하는 풍토에서 올해는 각별하다. 전태일 분신항거 40주기이자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이하 노동대학) 개교 10주년이다. 김승호 대표의 일정표가 빽빽하다. 어제는 목포 오늘은 안산 내일은 구미. 전국 25곳을 돌며 노동대학 학생들과 간담회를 연다. 최근 화두는 <전태일 평전> 읽기 운동이다. 사서 읽고 돌려 읽으며 조직적 학습 분위기 조성에 힘쓴다. 말 뿐이었던 전태일 정신 계승을 위해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이다.

“올바름이 뭐냐, 목적이 뭐냐. 노동운동에서 이런 걸 얘기하는 게 다 무너졌어요. 공부가 지식 쌓기가 됐고, 니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다툼이 늘고 깊이가 얕아졌죠. 비리, 성추행 같은 도덕성 문제만 불거지고 노동현안이 실천적으로 쟁점화가 되지 않습니다. 대중운동이 긍정적 방향으로 가려면 올바른 것을 알아야 하고 주장해야 해요. 그러려면 공부가 필요하죠.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난 동지들은 ‘이걸 모르고 40년을 살았다니’ 라고 하죠. 전태일은 단지 투사가 아니거든요. 인간애와 통찰력과 문장력을 갖춘 그 사유의 깊이와 인간적 면모에 큰 감동을 받죠.”

대학생 김승호, 혁명을 꿈꾸다

그도 그랬다. 전태일은 번개처럼 다가와 천둥 같은 울림을 남겼다. 김승호는 69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엄혹한 시절이었다. 미국의 지원과 노동자 착취로 독점자본이 덩치를 키워갔고 자유당의 장기집권으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던 개발독재시대다. 그로서는 젊음의 고뇌와 역사의 고뇌가 중첩됐다. 입신양명의 욕망은 뒷전이고 사회변혁의 임무에 심장이 달아올랐다. 중국의 마오주의,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 우리의 6.3사태를 거치면서 “혁명은 엘리트가 이끄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막상 대학은 달랐다. 꿈꾸던 혁명본부가 아니었다. 69년 3선 개헌이 통과되면서 학생운동이 침체됐다. 서클과 학회도 미흡했다. 현실모순이 학습속도를 앞서갔다. 어쨌거나 몇몇이 머리를 맞대고 책을 파며 저항의 불씨를 키웠다. 박정희가 물러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구조적 모순을 봐야한다며 대외적 종속, 대내적 독점, 노동농민운동 강화까지,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더 나아간 전망이 논의되었다. 70년 11월 3일, 학생의 날 흥사단에서 학생회 내부의 토의내용을 발표했다. 그 자리에 백기완 선생이 참가했다. ‘민중주의’라는 새로운 조류가 대두되던 즈음이다. 그로부터 열흘 후 ‘민중 전태일’이 분신했다.

“분신이 불교에서도 없었고 부모님께 받은 생명이라 몸을 귀히 여기는 문화에서 몸을 불살랐으니 얼마나 절실했을까. 어렴풋이 양극화의 심각성은 알았지만 충격이 컸습니다. 우리 사회 제일 밑바닥에서 희생당하는 사람이 목소리를 낸 거죠. 역사의 주인공은 지식인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생각을 다듬어가던 중에 일어난 사건이니까 전태일의 죽음 앞에서 배웠다는 모습이 죄스럽고 부끄러웠어요. 그 순간 나는 지식인이란 거 내려놓는다. 이 대학은 졸업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청년 김승호, 친구를 따르다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 모두를 진지하게 만들던 때가 있었다(김정환). 전태일의 파장은 컸다. 노동계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내부에도 스스로 반성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동맹휴업이 일어났다. 교수들도 반성투쟁 대열에 합류했다. 학생 20명, 교수 10명이 학생회 휴게실에서 장작불 떼고 3박 4일간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그 자리에는 당시 교수였던 조순 전 총리와 김상곤, 장상환 등 진보인사들도 함께 앉아있었다. 한 목소리로 결의했다. 민중의 곁으로 다가가자고.

김승호는 얼마 후 강제징집을 당했다. 견고한 현실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였다. “민중이 당하는 것을 같이 당해야 같이 느끼고, 같이 분노해야 같이 싸울 수 있지 않겠는가.” 군대생활 3년 동안 먹물티를 뺐다. 휴가를 나와서도 대학 동료나 선후배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의 어려운 한자를 일러주고 법률용어를 해석해줄 친구, 신나게 데모하는 법을 가르쳐줄 아는 사람 하나 갖길 바랐던 전태일의 삶이 중지된 그 자리로, 김승호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지나온 다리를 끊었다.

“전태일은 나를 원래 위치로 돌아오게 했죠. 사고에 활기를 불어넣고 깨달음을 주는 친구였어요. 전태일 같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전태일이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요. 서울법대 뒤 낙산 언덕에서 학생들 시위하는 장면을 부러움에 차서 지켜보기도 하고……근데요, 만약에 전태일이 대학에 들어갔으면 얻은 것도 많겠지만 실망이 컸을 거예요.”

노동자 김승호, 세 번의 수배 받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학연대의 물꼬를 틔웠다. 김승호는 ‘적대의 장소’ 공장으로 들어갔다. 사회적으로도 시위나 항의를 넘어 시민들의 자기각성이 이뤄졌다. 80년대는 운동단체들, 위장취업자들, 해고노동자들이 조직화가 봇물을 이뤘다. 87년 7,8,9월 노동자총파업 깃발이 전국에 나부꼈다. 노조의 합법성이 커졌다. 그러나 90년대 사회주의혁명 전망이 스러지면서 노조운동의 기세도 사그라졌다. 그럼에도 김승호는 제조업을 넘어 철도, 체신, 전력 등 기간산업 등 노동운동 외연확장에 나섰고 한국통신 파업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견인한다.

“우리나라는 한국전력과 한국통신이 노조가 취약했어요. 외국의 사례를 봐도 기간노조는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부분이죠. 통신 동지들과 가까워졌고 95년 한국통신 5만 명 파업을 이끌면서 위험인물로 찍혔죠. 국가전복을 꾀한다. 배후에 주사파 있다. 간첩 소굴이다 등등. 근데 그게 아니에요. 90년대 들어서 노동운동 하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갔거든요. 남아 있더라도 사회주의 혁명은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나는 중간에 있었는데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이 다 오른쪽으로 가니까 어느 날 제가 제일 왼쪽에 남아있는 거예요!(웃음)”

김승호는 5·6공과 김영삼 정부까지 총 세 번의 수배령을 받는다. 처음은 86년 말 안산의 노동자권익투쟁위 활동과 관련해서 한번, 91년 2월 경수지역노동자연합 사건이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는 컸다. 한국통신 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다. 그가 지도위원으로 있던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에 이적단체라는 혐의까지 씌워졌다. 그러나 정권의 악착같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그해 11월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탄생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죽은 태일이가 살아 돌아온 듯 기쁘다”라고 말하던 감격의 순간이었다. 한쪽에선 그를 간첩처럼 묘사한 전단지가 나붙고 김승호 전담반이 꾸려졌다. 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간 수배는 풀리지 않았다.

수배자 김승호, 맑스-전태일에 눈뜨다


인생의 휴가가 도래했다. 청춘의 숨 가쁜 질주를 잠시 멈추고 호흡을 고르는 시기. 얼굴을 어루만지는 한낮의 햇살에 취해도 보고 느릿하게 책장을 넘기며 어둠을 맞은 불혹의 수배자는 “조용히 엎드려 지냈다.” 윗목에 밀쳐주었던 맑스-엥겔스 저작선집에 손이 갔다. 두툼한 600쪽 분량 6권을 팠다. 자본론도 1장 상품 편부터 완벽히 이해될 때까지 부딪혔다. ‘공황’ 편으로 IMF 분석에 도움을 받는 등 공부에 탄력을 받았다. “맑스의 이론은 빈틈없이 정확했다”

앎은 삶으로 넘쳤다. 어떻게 행동하고 살 것인가, 개별주체의 윤리적 물음. 장기 침체를 겪는 노동운동의 돌파구 어디서 찾을 것이며 대중 사상으로 무엇을 움켜쥐어야 혁명과 해방을 포기하지 않고 갈 수가 있을까, 집단주체의 이념적 물음. 두 가지 물음에 천착했다. 그렇게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던(김수영) 어느 밤, 우연히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한 구절 한 구절 마치 성서처럼 와 닿았다. 생생한 직관에 무릎을 쳤다. “진리는 가까운 데 있다는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평전을 다섯 번 정독했다. 현미경 댄 듯 두 눈에 달려드는 전태일의 말말말. ‘나의 전체의 일부’ 그리고 ‘인간은 고귀하다’

“그전에는 그 말이 그냥 스쳐갔어요. 대학생 때는 전태일 수기 타자본이 돌았고 그 뒤에도 여러 판형으로 전태일 평전을 읽었는데도 몰랐죠. 이게 키워드구나. 그동안 나는 왜 전태일을 착한 사마리아인 정도로 생각했는가. <나의 전체의 일부>란 표현은 휴머니스트의 연민 수준이 아니에요. 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나’라는 사적존재의 개념으로 이해되지 않는 게 사회주의에요. <인간은 고귀하다>도 예전엔 착목하지 못했어요. 근데 고귀한데 어떻게 지배를 받아요. 고귀함 생각하는 순간 지배를 생각할 수 없어요. 사회주의 사상의 핵심이 여기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맑스-전태일의 재발견. 아는 것과 깨닫는 것 사이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그 강을 건너자 비로소 보였다. 인간해방을 꿈꾸었던 전태일은 맑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온몸으로 체현한 인물이었다. 100년의 시차를 둔 철학자와 노동자, 둘 사이에 말이 겹쳤다. 맑스는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경구를 가장 좋아했다. 전태일은 1969년 12월 31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김승호는 ‘이론은 맑스, 실체는 전태일’을 선언헸다. 그가 운영하던 <민주노동연구소>단체이름을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로 바꾸었다. 전태일의 “나를 따르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그 간결하고 악착스러운 진리에 다시 한 번 생을 건다.

운동가 김승호, 전태일과 인터넷을 결합하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전담반이 없어졌어요. 나보고 자수하라는데 개인과 운동의 자존심이 있지 못하겠더라고요. 노동운동이 개량국면이었죠. 치열성이 떨어지고 노조간부들은 술과 고스톱을 하고 공부를 안 하는 분위기였어요. 연구소나 교육단체에서 책자도 안 나왔죠. 공부를 안 하면 운동은 쉽게 타락해요. 2000년에 들어서고 인터넷이 깔리면서 이제는 디지털이다 사방에서 그런 말이 들렸죠. 저게 괴물일 거 같았어요. 전자민주주의를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다, 작은 단위에서 많은 동지들을 상대로 가능하겠구나.

전태일과 인터넷을 결합하자. 내가 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간 배운 전태일 사상과 맑스주의를 가르친다면 오른쪽 쏠림을 왼쪽으로 돌리는데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반 수배상태에서 동지들과 반년 간 검토하고 알음알음 타진했어요. 알아봤더니 캐나다에서 사이버 노동교육을 하더라고요. 2000년 6월에 한겨레신문에 광고 내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죠. 아마 맑스 노동대학 한다면 못하게 했겠죠? 전태일노동대학 한다고 하니까 안 잡아가더라고(웃음)”

새천년, 공부하는 노동운동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그의 제안에 전국에서 노조간부와 현장 활동가가 모였다. 초기엔 학교 분위기가 밝았다. 학생들도 교수진도 의욕에 넘쳤다. 그러나 9.11테러를 기점으로 전쟁 공포와 금융공황이 깊어지고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골화로 진보세력이 약화되면서 노동대학도 동력을 상실했다. 학생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무렵 2006년 베네수엘라를 방문해 차베스혁명의 사례를 보고 온 김승호 대표는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은 민중이 만들어간다’는 확신을 얻고 노동대학의 급진화를 꾀했다. 다음 해 노동대학 학생모집 공고에서 ‘사회주의를 상상하자’는 슬로건을 감히 내걸었다.

노동대학은 총 3년 과정이다. 수업내용은 분업에 종속된 인간의 1차적 사회적 기능에서 벗어난 ‘전면적 개인’ 산출을 목표로 한다. 1학년에는 철학, 역사, 인문, 미술, 노동운동사 등 기초교양과정, 2학년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비판과 인간해방의 전망을 모색하는 기본이론과정, 3학년은 전문실무과정으로 시야를 세계로 넓혀서 세계 노동운동사, 사회주의 노동운동론과 노조, 정당, 시민사회 운동 등 실천적 학문이 포함된다.

교수진이 탄탄하다. 김수행 교수가 영국의 자본주의와 노자관계, 황지우 교수가 일반교양, 허석렬 교수가 사회학 등을 가르치고 김승호 대표도 노동운동사를 강의한다. 수업방식은 교재 읽기, 온라인 강의와 오프라인 강의, 그룹별 학습 및 토의, 토론방과 게시판을 통한 온라인 토론 등 입체적으로 이뤄진다. 사실 입학생에 비해 졸업생이 많지는 않다. 10년 만에 졸업장을 받는 늦깎이 학생도 있다. 하지만 일단 공부한 사람의 눈빛과 자부심은 남다르다.

“문건 하나 읽는 것도 학출(학생운동 출신 노동자)은 괜찮지만 대학 안 나온 사람들은 힘들거든요. 자신감을 얻고 계급투쟁의 확신을 갖죠. 울산의 어느 동지가 그러더군요. 3년간의 가혹한 학습을 마치고 나니까 앞이 보인다고. 늘 울분에 찬 투쟁을 해서 성질만 나빠지는 거 아닌가했는데 옳음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고요.”

혁명가 김승호 – 의심을 찬양하다

울산 노동자로, 부천 이주노동자로 전태일은 부활한다. 김승호는 “한국사회에서 삶의 상상력을 자본이 독점하고 있다”며 “누구나 자본주의가 가장 인간성에 부합하는 것이고 경쟁은 필연이라고 생각한다”고 개탄했다. 하지만 맑스가 그랬듯이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며, 왜 노동자는 부한 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이 되어 ‘밑지는 생명’으로 살아야 하는지 전태일처럼 물어야한다. 위대한 의문부호를 품는 학문. 이것을 노동대학은 추구한다. 삶에 대한 분별을 깨치는 공부를 통해 혁명을 예비한다.


“공부만 잘 하기는 쉬워요. 암기력과 이해력만 있으면 돼요. 그러나 실천은 어렵죠. 누가 깨달은 걸 이해하는 건 참된 공부가 아니에요. 한 겹 뚫고 더 들어가는 것, 시간을 갖고 찬찬히 보면 깨달음이 깊고 넓어져요. 깨달음은 지능이 아닌 정신의 문제죠. 추구하는 가치가 뚜렷하고 치열할 때 지식을 맥락 속에서 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안다는 게 실천의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전태일은 생각이 많았어요. 왜? 왜? 왜? 라고 끊임없이 물었죠. 이것이 공부의 정석이고 공부하는 자세에요.”

사회주의, 고귀함, 노동자, 계급, 착취, 깨달음, 공부, 인간해방……김승호가 무시로 쓰는 이 농밀한 말들이 첫눈처럼 반갑다. 차고 시리고 따스한 눈송이 같은 말들. 한시도 길들여지지 않고 어지러이 떠도는 눈발 같은 말들. 그것은 40년 전 그의 몸에 괴물처럼 침입해 혁명정부를 세운 사람,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통탄하며 인간해방을 갈구한 전태일의 불꽃같은 소리다.

전태일이 스물 둘에 산화했고 40년이 흘렀다. 만약 삶의 유한성이 지속됐다면 김승호처럼 머리가 희끗하고 카디건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노년의 혁명가가 되어있으리라.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 사이에서 자리를 마련하고 인간의 고귀함을 설파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승호는 욕심낸다. <전태일 평전>을 젊은 세대한테 읽히고 싶다고. 그리고 또 확신한다. ‘희망의 가지를 잘린’ 젊은 세대들이 전태일을 알면 대단할 것이라고. 전태일이 불가피하게 부활할 것이라고. 40년 전, 김승호가 전태일에 감전되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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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의 가을 / 최영미

[올드걸의시집]




나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슬프다고 다 우는 게 아니고 눈물이라고 다 순결한 게 아니다.  두 눈에 눈물이 삐져나올 때 '지금 나 슬픈가?' 생각해보면 정말로 가슴 미어질 때도 있고, '울기엔 좀 애매한' 상황인데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내겐 눈물이 방귀처럼 몸에서 삐져나오는 액체 정도. 수정같은 눈물 아니고 습관성 방귀나 집중호우 같은 개념이다. 내가 잘 우는 이유는 지난 수년간 집중적인 훈련으로 뇌에서 눈까지 눈물이 다니는 길이 닦인 것 같다. 스스로도 기가 막힐 때가 많다. 특히 오후 8시무렵 주차장 씬. 시장보고 오는 길에 차 댈 때 멜로배우처럼 운전대 앞에서 멍하니 눈물 흘린다. 클래식, 가요, 락 등 장르불문. 어둑한 밤길에 흐르는 음악이 나를 가을날 창가로 데려간다. 얼마전 라디오에서 이동원의 이별노래가 나왔다. 직효다. 가슴에 바람 한줄기 휭하니 지나가더니 일초만에 낙엽지듯 눈물졌다. 시동 끄고 마저 울고 일어난다. 장바구니와 휴지보따리 양손에 들고 뒤뚱 거리며 집에 들어가서는 꽃수레 쌀강아지 불러가며 호들갑 부리고, 밥 하고 찌개 끓여서 아무렇지도 않게 밥 한그릇을 뚝딱 비운다. 연기력 쩐다.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20년 전 맹렬히 학습할 때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으로 봤었다. 돌베개에서 조영래 변호사님이 쓴 걸로 <전태일평전>이 나왔는데 사려다가 말았다. 안 봐도 '비디오'처럼 다 아는 이야기라고 여겼겠지. 헌데 책을 읽고서 그간 전태일이란 이름 석자만 알고있었다는 걸 알았다. 전태일은 생각보다 많이 가난했다. 생각보다 많이 고생했고 생각보다 훨씬 똑똑했다. 그의 존재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맑스의 <자본론>의 초과노동 공부할 때는 전태일이 보이지 않았는데 전태일에서 <자본론>이 보였다. 자본의 포악함이 살갗을 할퀴었다. 그가 노동소외니 인간소외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노동자를 '밑지는 인생'이라고 표현할 때 죄스러움의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눈물은 쓸모있었다. 울어 마땅한 대오각성의 눈물. 이주노동자가 우린 기계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난 왜 전태일을 떠올리지 못햇을까. 난 자본이 왜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존속하는가를 치밀하게 고려하지 못했을까. 아직 짙게 물들지 아니한 초록 잎들 사이로 수많은 전태일이 보였다.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졌다. 강수확률 높아지는 계절 가을. 눈물이 있으면 나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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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성노동복지터 수다공방] 창신동 언니들, 미싱에 날개달고 훨훨

[좋은삶공동체]

3년 전 일이다. 동대문을 아시아의 패션 메카로 만든 ‘70년대 봉제공 언니들’이 뭉쳤다. 첨단 패션경향과 기술을 가르치는 ‘수다공방’에서 실력을 연마한 그들은 직접 만든 옷을 입고 패션쇼를 여는 등 신바람 나는 일을 해마다 벌려왔다. 또 여기서 축적된 기술과 인력과 열정을 담아내기 위한 지속가능한 사회적 기업 ‘참 신나는 옷’을 창립, 새 브랜드 런칭을 준비 중이다. 웃음과 희망의 양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멋진 언니들’이 모인 곳, 수다공방을 찾았다.

참 신나는 배움, 참 신나는 옷, 참 신나는 사람들

서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 ‘창신2동 주민자치센터’ 안내판을 따라 방향을 틀면 조금 넓은 골목길이 나온다. 글자 한 두 개쯤은 떨어진 낡은 간판에는 치킨, 지물포, 푸줏간, 의상실 등이 새겨져 있어,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 옛 도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빼곡한 간판 숲 사이를 가로질러 걸음을 옮기다보면 시원하게 내걸어진 현수막이 나타난다. ‘2008년 12월 수다공방 패션쇼 디자인 공모전’을 알리는 내용이다. 그 앞 건물 3층이 ‘수다공방’이 자리한 참여성노동복지터(이하 ‘참터’)다. 참터는 동대문지역 영세사업장 여성봉제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과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 등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씨가 2003년에 설립한 단체다.

전태일 정신 이어받은 최고의 배움터
참터는 의류봉제 노동자들의 육아문제 해결을 위해 지역아동센터 ‘참 신나는 학교’를 운영, 방과 후 보충수업과 저녁식사 제공하는 등 일하는 여성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2006년 태어난 ‘수다공방’은 참터의 대표적인 희망사업이다. 우리나라 의류산업을 이끌어온 많은 손을 뜻하는 ‘수다(手多)’는 ‘참 신나는 학교’아이들이 엄마들을 위해 지어준 선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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