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일이다. 동대문을 아시아의 패션 메카로 만든 ‘70년대 봉제공 언니들’이 뭉쳤다. 첨단 패션경향과 기술을 가르치는 ‘수다공방’에서 실력을 연마한 그들은 직접 만든 옷을 입고 패션쇼를 여는 등 신바람 나는 일을 해마다 벌려왔다. 또 여기서 축적된 기술과 인력과 열정을 담아내기 위한 지속가능한 사회적 기업 ‘참 신나는 옷’을 창립, 새 브랜드 런칭을 준비 중이다. 웃음과 희망의 양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멋진 언니들’이 모인 곳, 수다공방을 찾았다.
참 신나는 배움, 참 신나는 옷, 참 신나는 사람들
서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 ‘창신2동 주민자치센터’ 안내판을 따라 방향을 틀면 조금 넓은 골목길이 나온다. 글자 한 두 개쯤은 떨어진 낡은 간판에는 치킨, 지물포, 푸줏간, 의상실 등이 새겨져 있어,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 옛 도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빼곡한 간판 숲 사이를 가로질러 걸음을 옮기다보면 시원하게 내걸어진 현수막이 나타난다. ‘2008년 12월 수다공방 패션쇼 디자인 공모전’을 알리는 내용이다. 그 앞 건물 3층이 ‘수다공방’이 자리한 참여성노동복지터(이하 ‘참터’)다. 참터는 동대문지역 영세사업장 여성봉제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과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 등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씨가 2003년에 설립한 단체다.
전태일 정신 이어받은 최고의 배움터 참터는 의류봉제 노동자들의 육아문제 해결을 위해 지역아동센터 ‘참 신나는 학교’를 운영, 방과 후 보충수업과 저녁식사 제공하는 등 일하는 여성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2006년 태어난 ‘수다공방’은 참터의 대표적인 희망사업이다. 우리나라 의류산업을 이끌어온 많은 손을 뜻하는 ‘수다(手多)’는 ‘참 신나는 학교’아이들이 엄마들을 위해 지어준 선물이라고 한다
“수다공방은 동대문에서 20-30년간 일한 고숙련 봉제기술자를 대상으로 하는 재교육 프로그램입니다. 봉제기술뿐 아니라 패턴, 재단, 리폼, 디자인 기초이론 등을 배웁니다. 또 세계적 수준의 패션의류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봉제기술인이 갖추어야 하는 기술교육훈련과 인성프로그램 등 자기개발 교육을 병행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발전해나가는 ‘장인’을 길러내는 교육입니다.”
전순옥 대표는 중국·베트남 등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값싼 옷들이 우리 봉제기술노동자의 삶을 옥죄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하며 그럴수록 가격중심이 아닌 가치중심으로 세계화 경쟁구도 속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수다공방’은 이를 위해 탄탄한 기술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인력양성의 장으로, ‘한국봉제기술의 자존심’을 이어갈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수다공방의 성과는 기대 이상이다. 현재 8기생이 수업을 받고 있으며 2007년까지 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들은 리폼가게, 맞춤옷 전문점 등 창업이나 동종업계 이직 등을 통해 자신의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
내가 만든 옷 입고 ‘패션쇼’에 서다
수다공방의 탐스러운 결실은 패션쇼에서 절정을 꽃피운다. 디자인은 공모를 통해 선정하고, 옷을 만든 당사자가 직접 옷을 입고 무대에 서는 ‘국내 유일의 패션쇼’가 수다공방 주최로 매해 개최된다. ‘창신동 아줌마 미싱에 날개 달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2006년 첫 행사는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1970-80년대 동대문 의류시장에서 10대부터 ‘시다(보조)’로 일을 시작했던 여성노동자들, 현재까지도 생계를 위해 동대문을 떠나지 않고 재봉틀을 돌리는 25-35년 경력의 프로 봉제사들이 수십 년 간 일하던 골방을 떠나 무대에 오른 사실이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 것. 또한 이상수 노동부장관, 강금실 여성인권대사, 심상정 의원, 전태일열사 모친인 이소선 여사 등이 모델로 나서 화제를 낳기도 했다. 올해도 12월 2일 세 번째 수다공방 패션쇼가 열린다. 전순옥 대표는 올 패션쇼에서 선보일 작품의 디자인 공모전은 2차 심사까지 완료된 상태라며 본선에 오른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만들 때 신나고 입을 때 신나는 ‘참신나는옷’
참터는 이 같은 신바람 나는 일들의 소중한 결실인 기술력과 열정을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 구축하기 위해 얼마 전 ‘참 신나는 옷’을 창립했다. 잘 나가는 IT업체를 그만두고 ‘참 신나는 옷’에 합류한 김방호, 김진화 씨는 10월 장충동 공장 오픈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마케팅과 기획업무를 맡고 있는 김방호 실장은 “수다공방의 지속적인 재교육으로 얻은 전문기술, 수년째 천연염색과 재료를 다뤄온 노하우 등 좋은 원단, 친환경적인 염색, 높은 봉제품질로 만들어진 착한 옷인 만큼 수다공방 옷들은 시장에서 반드시 통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공정무역 등의 취지에 공감해온 ‘착한 소비자들’이 수다공방 아줌마들이 만든 옷을 접할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 판매를 벌이겠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전순옥 대표는 “만들면서 신나는 옷은 입으면서도 신날 것”이라며 얼마 전 받은 문자를 소개했다. ‘참신나는옷을 입고 길을 나서니 정말로 상쾌하고 상큼하고 행복했습니다. 왜 참 신나는 옷인지 절감했지요.’(원자경)
전순옥 대표는 천연소재나 봉제기술 등 소재와 기술적 측면만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의 투명성을 강조했다. 인터넷을 통해 누가 만들고 어떻게 만드는지 생산자의 실명과 만들어지는 과정을 공개해 “소비자가 의미를 갖고 구입하고 상호 신뢰 속에 소통할 수 있는 옷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향후 수다공방의 제품이 높은 품질과 공정 거래, 공정 이윤으로 사랑받는 브랜드가 될 경우 ‘참 신나는 옷’ 1호점, 2호점 매장이 늘어나게 되고, 수다공방을 통해 배출되는 교육생에게는 지속적인 고용창출의 기회가 만들어지는 등 지속가능한 판이 짜인 셈이다.
“배우니까 꿈도 꾸고 행복해요”
바로 여기. 희망의 첫 단추가 끼워지는 곳 ‘수다공방’ 교육장에는 오후 6시부터 진행되는 ‘고급반’ 과정을 위해 10여 명의 교육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유일한 청일점은 1기부터 지도를 맡아온 한상민 강사다.
“인테리어부터 현장과 똑같은 구조로 이뤄져 있어 여기서 교육받으면 바로 현장 투입이 가능합니다. 워낙 베테랑인 분들이 스스로 선택해서 왔기 때문에 배움의 열기가 대단합니다. 고급반은 패션쇼라는 목표가 있으니까 더 활기가 넘칩니다. 직장이 있어서 피곤할 텐데 결석도 없고요. 나이가 있는데도 자기발전을 위해 열심히 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제가 배웁니다. 저한테 스승인 분들이죠.”
그는 “가르칠 땐 바늘 끝 같이 날카롭게 쉴 때는 개그맨처럼 재밌게 해주는 선생님”으로 불린다. 김옥 씨는 “문화센터 같은 데랑 차원이 틀려요. 막히는 게 없죠.”라며 자랑했다. 30년간 한복을 만들어온 장금숙 씨는 수다공방에서 ‘장모님’으로 통한다. 한복은 전문가이지만 양장은 경험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데, 그 때마다 한상민 강사가 든든한 사위처럼 ‘한서방’을 자처하며 나타나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손정옥 씨는 나중에 어른들을 위한 점잖은 옷을 만들어 팔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며 소녀처럼 꿈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인사동 같은데 개량한복은 값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합리적인 가격으로 좋은 옷을 만들어 팔고 싶어요. 겨울에는 명주로 여름에는 시원한 모시로 만들어서 어른한테 선물하면 좋을 거 같아요. 여기서 배우니까 꿈이라도 꾸고 행복해요. 하루는 남편한테 ‘여보, 당신이 내 덕에 밥 먹고 살지도 몰라~’라고 했더니 좋아하더라고요.” 웃음을 희망으로 엮어내어 참 신나는 옷을 짓는 참 부러운 기술을 가진 ‘언니들의 수다’는 끝없이 이어졌다. 김송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