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읽다 - 남해금산

[은유칼럼]


서울 강남역, 정오의 해를 받아 번쩍거리는 고층 빌딩들이 산처럼 우뚝하다. 마천루의 도시라도 온 양 감탄사를 연발하던 딸아이는 급기야 스마트폰을 꺼내 찰칵찰칵. “엄마, 여기가 강남이야?” 내 대답을 듣기도 전, 아이는 가장 기세 좋은 건물을 가리키며 어디냐고 묻는다. 


저 일대가 삼성타운이라고 했다. 아이가 흠칫한다. 우리 집은 수년 전부터 삼성 제품을 쓰지 않는다. 그래도 자기는 저런 ‘화려한 건물’에서 일하고 싶다며 나를 힐끗 본다. 입사도 어렵지만 갈 곳이 못 된다고 난 일축했다. 아이가 재차 묻는다. “내가 삼성 안 가면 백수로 산다고 해도 반대할 거야?” 


그때서야 빌딩 아래 비닐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삼성 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 ‘반올림’ 농성장. 몇 번 지지 방문을 갔을 땐 지하도에서 8번 출구로 나와 곧장 농성장에 들어갔다. 건너편에서 보긴 처음이다. 푸르스름한 유리 건물에 껌같이 희고 넓적하게 달라붙은 모양새다. 풍찬노숙 어언 600일째. 빌딩 꼭대기만이 아니라 저 아래까지 봐야 한다고, 저기에 76명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다고 딸아이에게 일러주었다. 초일류 기업에서 일하다가 죽은 사람들이라고. 


해마다 학기 초에 가정통신문이 온다. 아이의 질병이나 고민, 진로를 묻는 신상조사 설문지엔 ‘부모가 원하는 자녀의 직업’ 문항이 있다. 그 공란 앞에서 한참 망설인다. 아이의 욕망과 능력을 잘 알지 못하고, 좋은 직업을 설계하기 곤란한 사회에 산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다. 아무리 부모라지만 남의 직업을 내가 원한다는 설정도 마뜩지 않다. 당사자의 꿈은 수시로 변한다. “초라한 소기업은 질색”이라며 대기업에 다닐 것을 천명하다가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했다가 그냥 부자면 된다고도 한다. 욕망은 날것이고 희망은 계통이 없다. 


나는 딸아이가 선망하는 유수의 대기업을, 으리으리한 건물을, 사보 기자로 일하면서 수년간 드나들었다. 10년 전인데도 모기업 사옥에는 헬스장, 최신 커피 머신과 푹신한 의자가 비치된 카페가 있었다. 직원용 무료 시설이다. 처음엔 부러웠다. 그런데 직원들은 아침에 출근 카드를 찍으면 종일 건물에 갇혔다. 안에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일했다. 야근하고 회식하고 헬스장에서 땀을 빼고 책상으로 돌아갔다. 고득점을 위해 개인의 권리와 동선을 통제한 기숙형 입시학원처럼, 그곳은 고생산성을 위한 기숙형 회사 같았다. 노동자의 하루를 통째로 삼키며 기업은 몸집을 불려갔다. 


어머니, 저희는 금빛 거미가 쳐놓은 
그물에 갇힌 지 오래됐어요 
(…) 
어머니, 무서워요 
금빛 거미가 저희를 먹고 
흰 실을 뽑을 거예요 

- 금빛 거미 앞에서 (53쪽) 


20대에 나도 금빛 건물에서 일했고 30대엔 외부자의 시선으로 살벌한 내부를 뜯어보았다. 40대엔 삼성 직업병 문제, 이랜드의 아르바이트생 임금 체불 사건, 대한항공 임원의 갑질 사건, CJ제일제당 현장실습생의 자살, 연출가의 자살 소식을 접한다. 대기업이 무서워진다. 등 따시고 배부른 정규직도 있겠지만 소수의 안위는 다수의 희생과 침묵을 기반으로 한다. 한 사람의 죽음에 무감한 기업 문화가 미세먼지보다 더 공포스럽다. 아이를 피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가정통신문의 부모가 원하는 직업란엔 ‘예술가’라고 썼다. 피아니스트나 화가 같은 협의의 예술가가 아니다. 자기 삶과 노동의 균형,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삶의 예술가라는 이상을 담았다. 대기업 직원이든 작은 가게의 점원이든 대수랴. 일할 때 자기 의견과 불편을 말할 수 있고,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직장이고, 남을 눌러야 내가 사는 경쟁 구도가 아닌 자유로운 개인들로 존중하며 동료와 만나는 일이면 좋겠다. 


“치욕이여,/ 모락모락 김 나는/ 한 그릇 쌀밥이여(23쪽)” 밥 때문에 생겨나는 치욕 앞에 무릎 꿇지 않기를 부디 바랄 뿐이다. 직업엔 귀천이 없지만 삶에는 귀천이 있다.



시사인에 게재됨


저작자 표시
신고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 이성복

[올드걸의시집]

1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천국은 말 속에 갇힘
천국의 벽과 자물쇠는 말 속에 갇힘
말이 말 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홀례 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2

나는 <덧없이>지리멸렬한 행동을 수식하기 위하여
내 나름으로 꿈꾼다 <덧없이> 나는 <어느날>
돌 속에 바람 불고 사냥개가 천사가 되는
<어느날> 다시 칠해지는 관청의 재색 담벽
나는 <집요하게> 한 번 젖은 것은 다시 적시고
한 번 껴안으면 안 떨어지는 나는 <집요하게>

내 시에는 종지부가 없다
당대의 폐품들을 열거하기 위하여?
나날의 횡설수설을 기록하기 위하여?

언젠가, 언제가 나는 <부패에 대한 연구>를 완성 못 하리라

3

숟가락은 밥상 위에 잘 놓여 있고 발가락은 발 끝에
얌전히 달려 있고 담뱃재는 재떨이 속에서 미소짓고
기차는 기차답게 기적을 울리고 개는 이따금 개처럼
짖어 개임을 알리고 나는 요를 깔고 드러눕는다 완벽한
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여러 번 흔들어도 깨지 않는 잠, 나는 잠이었다
자면서 고통과 불행의 정당성을 밝혀냈고 반복법과
기다림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째서 육교 위에
버섯이 자라고 버젓이 비둘기는 수박 껍데기를 핥는가
어째서 맨발로, 진흙 바닥에, 헝클어진 머리, 몸빼이 차림의
젊은 여인은 통곡하는가 어째서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의 표현은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이
아닌가 어째서 시는 귀족적인가 어째서 귀족적이 아닌가

식은 밥, 식은 밥을 깨우지 못하는 호각 소리 ----


- 이성복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문학과지성사

더보기




신고

자연 / 이성복

[올드걸의시집]

 

1

내가 자연! 하고 처음 불렀을 때 먼 데서
무슨 둔한 소리가 들렸다 하늘 전체가 이야
내가 자연! 하고 더 작게 불렀을 때
나무들이 팔을 벌리고 내려왔다 네가 이야
내가 자연! 하고 마지막으로 불렀을 때
샘물이 흘러 발을 적셨다 나는 바싹 땅에
엎디어 남은 말들을, 조용히, 게워냈다  

2

안개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의 입모양도 지워지고 손짓만이...... 떨리는
손가락,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는 돌아서
무언가를 밀어젖혔고 그건 이었고 아름드리
전나무가 천천히, 쓰러져 갔다 굴러 떨어지며
그가 일으키는, 나는, 물결이었다  

- 이성복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엄마 요즘 왜 시집 안 읽어? 딸이 묻는다. 내가 시를 안 읽는 줄도 몰랐는데 딸이 일깨워 준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책상 위에 시집이 없단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는 시집 한 두 권은 책상에 나뒹굴고 있었다. 최근에는 시집을 한 권도 안 샀구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시야. 시 같은 글이야. 변명한다. 그렇구나. 엄마의 자장에 늘 머물러 있는 아이. 뒷짐 지고 생활태도를 살펴보는 나의 장학사.

몸이 늘어지고 기운이 없었다. 왜 그런가 싶었더니 도배의 여파다. 내가 도배를 한 것도 아니고 의자에 올라가 뒷마무리만 했는데도 전신이 쑤신다. 9시 아프다며 자리 펴고 누웠다. 딸이 온다. 내가 다리 주물러 줄게. 아냐, 아냐 괜찮아. 손사래를 쳤다. 열 살 꼬마아이 조막손이 알통 배긴 종아리를 주무르는 장면은 아름답지 않다. 전체적으로 궁상스러운 신이 연출되는 게 싫다. 옆에 눕는 딸아이. 조용히 말한다. 나는 평생 엄마 효녀로 살 거야. 느닷없는 고백. 안개 속에서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건 안 돼. 효녀는 고달퍼. 엄마는 효녀 아닌 딸이 더 좋아. 출렁이는 흙가슴. 납작 엎디어 남은 말들을 몇 마디 게워낸다. 가만히 있는 나에게로 밀려와 접촉하고 작용하는 딸.



신고

'올드걸의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세미나1 : 가재미 - 물렁물렁한 바퀴 되기  (0) 2011.10.19
해방촌, 나의 언덕길 / 황인숙  (6) 2011.10.01
자연 / 이성복  (15) 2011.09.24
시 읽기 세미나 - 말들의 풍경  (12) 2011.09.21
파랑도 / 이희중  (18) 2011.09.01
무심한 구름 / 허수경  (8) 2011.08.01

역전易傳 1 / 이성복

[올드걸의시집]


며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눈물 흘리는 짐승들이
슬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기를 먹었습니다
넓적넓적 썰은 것을 구워먹으니 맛이 좋습니다 그날 아
침 처형당한 간첩의 시체라고 했어요 한참을 토하다 고개
들어보니 입가에 피범벅을 한 세상이 어그적어그적 고기
를 씹고 있었습니다

- 이성복 시집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시장을 봤다. 월요일 화요일 이틀동안 김치찌개와 계란후라이에 밥 먹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장바구니를 챙겼다. 사실 좀 덜먹을 참이었다. 부산을 댕겨오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강건너 불구경을 한 것 같았다. 그동안 돼지처럼 꼬박꼬박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기름진 육체에서 나태한 사고가 나온다. 비대해진 몸으로는 세상의 외침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나름의 위기의식. 한살림으로 현대백화점으로 내 자식 먹일 온갖 고가의 식재료를 사러 다니는 내가 낯설었다. 자책과 반성을 빙자한 게으름으로 이불에 몸을 말기를 삼일. 기초식량인 우유와 계란마저 동이났다. 한살림엘 갔다. 콩나물, 두부, 감자, 상추, 초복용 삼계탕, 오징어젓갈 등을 담았다.  소고기 돼지고기가 들어있는 냉동고 앞에 섰다. 문짝에 붙은 가격표를 들여다봤다. 서너가지 부위의 가격을 외울 무렵. 에잇. 일주일이라도 참자. 밖으로 나왔다.

옆가게가 정육점이다. '장조림 오늘 하루 특가' 형광색 안내문이 붙어있다. "어머니, 이것 좀 사가세요. 오늘 고기가 너무 좋네~이런 가격 또 안 나와요.' 꼭 나한테 그런 건 아닌데 치마끝을 붙잡힌다. 아들의 대사가 말풍선으로 뜬다. "엄마 요새 왜 장조림 안해주세요?" 그래. 아예 안 먹을 순 없고 점진적으로 줄이자. 값이 쌀 때 샀다가 나중에 해먹여야지. "한 근만 주세요." 넙적살 고깃덩이가 리얼했다. 도축과정이 영상지원됐다. 그 벌건 살덩이를 두부자르듯이 토막을 내는데 갑자기 토가 쏠렸다. 눈을 감았다. 그냥 내 처지가 한심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저녁반찬 하기 귀찮아서 차돌박이까지 샀다. 부산에서 보았던 이색조직. 혁명적육식동맹 깃발이 떠올랐다. 거기에 가입이라도 하고 먹을까 싶으니 웃음이 났다. 오만원이 넘게 나왔다. 카드에 사인을 하고 영수증을 받아서 황급히 나왔다. "저기요, 고기 가져가셔야지! 우리 먹으라고 사주시는 거에요? 잘 먹을게요." 푸줏간 총각이 너스레를 떤다. 옆에서 기다리던 아주머니도 웃는다. 무슨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덜컹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손만 뻗어서 까만 봉지를 챙겨왔다. 


신고

또 비가오면 / 이성복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올드걸의시집]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 이성복 시집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더보기

신고

숨길 수 없는 노래2 / 이성복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올드걸의시집]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
  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이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
  이다

   - 이성복 시집 <그 여름의 끝> 

   


'우리가 여기에서 다시 만난 것은 어느 별이 도운 것일까요?' 삼류 멜로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 너무 순박해서 익살스러운 이것은 니체의 말이다. 니체가 평생 사랑했던 단 한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처음 보고 건넸다는 유명한 인사말이다. 38세의 니체는 21세의 루에게 변변한 데이트도 없이 청혼했다가 묵사발이 된다. 안타깝게도 루는 단 한번도 니체를 사랑하지 않았다. 루가 꽤 매력적이고 총명했나보다. 루는 훗날 릴케, 프로이트까지 당대의 지성들과 러브라인을 형성한다. 당시에도 철학도 파울 레와 동거중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 니체가 간청 협박편지를 보내기도 했단다. 아무튼 실연을 당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단 10일 만에 썼다고 전한다. 사랑의 몸살과 광기로 쓰여진 책. 1부에 글을 쓰려면 피로 쓰라는 말이 나오는데 자기가 밤새 쏟은 피눈물로 써서 그랬던 걸까. 가엾은 니체. 철학자로서는 멋진데, 한 남자로는 엉망이다. 철학의 대가도 울려버리는 사랑. 서툴어서 서러운 사랑. 

오랜 동거 끝에 선배가 결혼을 했다. 여름날의 야외결혼식. 유명한 시인이 직접 축시도 낭송해주었다. 일과 사랑에서 성하의 시절을 보내는 두 사람. 둘은 처음부터 사랑의 고수로 보였다. 사람을 외롭게 하는 재주가 있는 남자. 외로움을 초콜릿처럼 음미할 줄 아는 여자. 둘은 잘 어울리는 커플 아니라, 잘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사랑의 속절없음에 대해 흔들리지 않을, 흔들림을 놀이기구처럼 유희할 수 있는 강한 연인같았다. 그래서일까. 막상 결혼식을 보는데 쓸쓸했다. '사랑'이 어울리는 그들에게 '결혼'은 어쩐 일인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사랑이 끝나고 결혼이 시작되는 슬픈 축제였다. 더 오래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을 위해 결혼을 택하지만, 결혼과 함께 사랑이 끝나는 아이러니. 결혼을 하면 자식도 남고 노후의 벗도 남는다지만, 그 삶의 오물통 속에  왜 당신들까지. 하는 심정. 서러움의 박수만 정성스레 치다가 왔다.



신고

이성복 시인을 만나다

[차오르는말들]

좋아하는 시인을 만난다는 건 참 어색하다. 그가 낳은 자식과 연애하다 부모님 뵈러 가는 길처럼, 부담되는 자리다. 오래 편지를 주고받던 소울메이트와 만나는 자리 같기도 하다. 피하고 싶으면서도 궁금한, 보고 싶으면서 도망가고 싶은 수줍은 이중감정. 피고름 같은 시를 온몸으로 짜내는 그가 너무 반듯해도 이상할 거고 너무 헝클어진 모습이어도 서운할 거 같았다. 교수다운 노신사 분위기도 섭섭하다. 시인다우면서 시인의 모습을 배반하길 기대했다. 욕심도 많지.  

이번 자리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운영하는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내가 쓴 시 내가 쓸 시'라는 단기강좌다. 이성복, 김정환, 김혜순, 최승호 시인이 매주 초대된다. 첫 시간에 이성복 선생님이 오신 거다. 어울리게도, 가장 추운 겨울날, 살을 에는 고통의 날. 나는 까만 나무처럼 전신 까만색으로 꽁꽁 두르고 갔는데 선생님 역시 까만 연필심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의실로 납시었다. 교실을 꽉 채운 수강생들 30여 명과 난방장치의 텁텁한 공기 속에서 드디어 만났다.

선생님의 시집을 처음 산지 5년 만에, 5권의 시집을 가방에 담고서. 

 

더보기

 

신고

사랑일기 / 이성복

[올드걸의시집]
입동이 지났는데도 딸아이는 여름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다른 운동화나 구두는 신지 않는다. 자기 발에 맞게 편안히 늘어난 것이 좋은가보다 싶어 그냥 두었다. 이번주부터 추워진다는 일기예보에 지난 일요일에 부추를 사러갔다. 다행히 맘에 드는 부추를 사서 집으로 가는 길. 우리모녀는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마을버스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는 무거운 쇼핑백을 들고는 낙엽이 뒹구는 창밖을 구경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런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서형아. 집에가면 엄마 원고 써야 하거든. 내일까지 써야할 게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엄마한테 자꾸 말시키지 말고 혼자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놀아야 해. 부추도 샀으니까 엄마가 부탁할게." 31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딸아이에게 나는 진심을 다해 이렇게 말했다. 그랬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가 시무룩하게 말한다.
"엄마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시집가는 거 같다." 잠깐 웃겼고 이내 슬펐다.



1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늙은 풍차, 휘이 돌려 보시지
몸은 녹슬은 기계, 즐거움에 괴로움 섞어
잠을 만드는 기계
몸은 벌집, 고통이 들쑤신 벌집
몸은 눈도 코도 없지만 몸을 쏘아보는 엽총과
몸을 냄새 맡는 누리의 미친개들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낡은 신발, 뒤집어 신고 날아 보시지
----당대의 몸 값은 신발 값과 같으니
당대의 몸이 헤고 닳아, 참으로 연한 뱃가죽 보이누나

2


한 마리 말을 옭아매는 마차의 끈은, 끊어지지 않는
마차의 사랑 마차의 꿈 사랑한다 가엾은 내.....
미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 올리는, 가늘은 낚싯줄은
물고기의 사랑, 사랑은 입으로 말하여지고 사랑은 입을 꿰뚫고
그래, 개를 걷어차는 구둣발은, 구두를 닮은
소가죽의 사랑 픽, 쓰러지며 소가 남긴 사랑

죽은 나무는 자라지 않지만 죽은 나무의 괴로움은 자라고
지금 밀물은 바로 그 썰물이었으며 애인은
애인을 닮은 수렁이었고 애인을 닮은 무딘 칼이었고
애인을 닮은 불안이었고

그래, 온 몸으로 번지는 매독의 사랑
문드러지면서 입술이, 허벅지가 표현하는 아기자기한 사랑
어머니, 저의 밥은 따뜻한 죽음이요 저의 잠은 비좁은 수의요
어머니 저는 낙타요 바늘이요 성자요 성자의 밥그릇이요
어머니, 저는

견디어라 얘야, 네 꼬리가 생길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마라, 아픈 것들의 아픔으로 네가 갈 때까지
네 혓바닥은 괴로움의 혓바닥이요 네 손바닥은 병든
나무의 나뭇잎이요

3

어느날 엄마, 내가 아주 배고프고 다리 아파 목마른 논에
벼포기로 섰다면 엄마, 그 소식 멀리서 전해 듣고 맨발로
뛰어오셔 얘야 가자 아버지랑 형이랑 너 기다리느라
잠 한숨 못 잔단다 집에 가자 내가 잘못했어 엄마, 그러시
겠어요?

그러실 테지만 난 못 돌아가요 뿌리가 끊어지면 물을
못 먹어요 엄마,제 이삭이나 넉넉히 훑어 가시지요

어느날 엄마, 내 살 길이 아주 가파르고 군데군데 끊어지
기도 한다면
엄마, 얘야 내 등에 업혀라 밥 많이 먹고 건강해야지 너만
보면
마음 아프구나 하시며 내 살 길처럼 타박타박 걸어가시겠
어요?
엄마 걸어가시겠어요? 발굽이 부러지면

등으로 기어 날 안고 가시겠지만 엄마, 난 못 가요
내 사지는 못박혀 고름 흘려요

엄마, 어느날 저녁 구름을 밀어내며 얘야
여기 예루살렘이야 통곡으로 벽을 만든 나의 안방이야
요단, 잔잔하단다 요단, 지금 건너라, 빨리 하시면

내가 건너가겠어요? 어느게 나룻배인가요? 아니예요
그건 쓰러진 누이예요 엄마, 누이가 아파요

이성복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신고

<원스> 시간을 견디는 사랑이 있을까

[극장옆소극장]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제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란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빛 도는 날개를 곧추 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의 사랑에 값할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덧 당신은 내게 '사랑하는'분이 아니라, '사랑해야할 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왜 내가 자꾸만 당신을 떠나려 하는지를.
사랑의 의무는 사랑의 소실에 다름아니며,
사랑의 습관은 사랑의 모독일 테지요.
오, 아름다운 당신,
나날이 나는 잔인한 사랑의 습관 속에서 당신의 푸른 깃털을 도려내고 있어요.

다시 한번 당신이 한껏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남으로써만......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성복 시인의 글이다. 내가 많이 아끼는 시집 <남해금산> 뒷표지에 적혀있다. 과연 '시간을 견디는 사랑이 있을까' 궁금했다. 이 글은 사랑에 관한 모든 답을 정리해주었고 꿈을 심어주었다. 가을날, 햇살 좋은 아침이면 한번씩 소리내어 읽어보곤 한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가을이면 어김없이 생각난다. 읽다보면, 너무 맑은 하늘에 눈이 시리듯 코끝이 시큰해진다. 끝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밤에도 슬프다. 글을 쓰다가 손끝이 시려지면 시집을 꺼내 읽으며 몸을 덥힌다. 가장 빨리 데우기 위해선 이성복의 시집이 좋다. 특히 이 글이. 사람은, 사랑을 하면 사랑을 함부로 대한다. 집착하고 훼손한다. 그런데 이 제목없는 글에서는 사랑을 소중히 대한다. 사랑에 대한 예의바름, 오롯함, 솔직함. 그것이 아름다워서 가끔씩 좋은 사람에게 이 시집을 한권씩 분양해준다. 아름다운 사랑, 멀리 멀리 민들레 꽃씨처럼 퍼져나가라고.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피어나라고.   



영화 <원스>는 어쩌면 이성복의 글이 영화로 환생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절묘했다.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고 간결하면서도 여운이 깊은 영화였다. 시간을 초월한 사랑, 아닌 시간을 견딘 사랑이다. '사랑의 의무는 사랑의 소실이며, 사랑의 습관은 사랑의 모독'임을 아는 이들의 사랑. 그래서 아름답고 눈물겹다. 피아노가 선율을 만들듯이 무수한  감정의 결을 생성해내는 사랑. 영원한 사랑. 필시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피아노 한 대 선물하고 떠나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또 나는 '도를 믿으십니까?'하는 사람처럼 떠들고 다녔다. '원스 보셨어요?'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퍼날랐다. 시집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꺼내볼 수 없으니 음악을 틀어놓고 살았다. '원스'가 핏줄을 타고 온몸을 돌아다녔다. 입김으로 먼지로 우주의 공기로 흩날렸다. 한없이 부푼 선율은 '凋落하는 가을빛' 따라 낮은 숨결로 잦아들었다. 며칠 전부터 몸에서 'If you want me'가  들린다. 어미들이 매년 출산일즈음에 산통을 겪듯이, 나는 가을을 알아차렸다. 가슴으로 가을을 낳는다. 이성복의 시집과 <원스>를 쌍둥이처럼 품고 있다. 다시, 가을이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