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생존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7.14] 은수연-친족성폭력 첫수기 작가 (2)
  2. [2014.01.25] 소히 - 보사노바뮤지션 '너무 흔한 비밀을 노래하네' (4)

은수연-친족성폭력 첫수기 작가

[행복한인터뷰]

지옥 9년 기록 10년 작가 2년차, 난 평범해지고 있다

 

한겨레 박승화

 

 

딴사람, 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김수영, ‘생활의 극복’ 중

 

휴일이면 종종 도심의 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영어 공부 삼매경에 빠진다. 잠시 고개를 들어보면 자신처럼 다들 혼자서 꾸역꾸역 뭔가를 하고 있다. 한 층이 거의 비슷한 표정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그 개별적이면서도 집단적인 풍경이 새삼 놀라워 중얼거린다. “나는 너희와 다 얘기해보고 싶다. 혼자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니?”

그러는 당사자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서울 거주 30대 싱글 여성이다. 장마철 습한 공기를 머금은 바지통이 다리에 감기는 게 싫어서 반바지를 입었지만 책상물림 생활에 실해진 장딴지가 영 신경에 거슬린다. 젖은 머리 물기 탈탈 털어 고무줄로 짤막하게 동여매고 까만 안경테에 목에는 하얀 헤드셋을 걸치고 어깨에 멘 에코백에는 형광펜 그어진 영어교재가 한가득. 직장을 그만두고 ‘적금 깨서’ 영어학원에 다니는 중이다. 같은 학급 20대 초반 학생들은 남다른 열공과 연륜 포스를 내뿜는 그녀를 ‘골드미스’로 인식하나 자신들과 죽이 잘 맞다보니 언니 혹은 누나라고 부른다. 눈치 없는 젊은 강사가 그녀를 ‘이모님’이라고 칭하는 바람에 듣는 사람 발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늦깎이 유학 준비생의 고군분투. 한국 사회의 30대 여성치고 흔치 않은 일상을 산다. 그녀는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은수연.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나온 그 책은 ‘인면수심’ 친부의 성폭력 실상을 가감 없이 묘사해 한국 사회에 충격을 던져주었고, 저자 은수연은 얼굴 없는 유명인이 되었다. 신문 및 TV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그림자 연극의 주인공처럼 실루엣 혹은 목소리만 드러났다. 그런 상황들이 성폭력 피해자는 어둡고 침울할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확인시켜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매체 밖에서 만난 은수연씨는 들장미 캔디처럼 표정이 다채롭고 말투도 활달하다.

눈에서 살기가 빠진 유학 준비생

“제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그녀의 10대는 더욱 평범치도 평탄치도 않았다. 아빠에게 9년간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당한 아동 피해자로 살았다. 집을 뛰쳐나온 20대는 겹치기 출연 배우가 따로 없었다. 혼자 있을 때는 수치심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성폭력 생존자로, 밖에서는 밝고 야무진 금순이 캐릭터로 오락가락 지냈다. 틈틈이 글을 썼고 30대 들어서 작가의 이름을 얻었다. 작가이거나 학생이거나, 일상을 두 가지 버전으로 산다. 어느새 평범과 비범을 자유로이 즐기는 생의 곡예사가 됐다. 주변에서 그녀의 변화를 느끼는 지점은 따로 있다.

“저를 20대부터 봐온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그때에 비하면 눈에서 살기가 빠졌다고요. 제가 봐도 대학생 때 증명사진을 보면 눈이, 완전 무서워요. 하하.”

눈빛이 달라지는 것만큼 확실한 ‘딴사람’의 징표가 있을까. 이제 그녀는 선한 반달눈을 하고 하얀 치열이 다 보이도록 환하게 고개 젖혀 자주 웃는다. 카페에 서식하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까지 호기심이 발동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어졌다. 증오와 원한과 울분이 스르르 빠져나간 마음자리에 웃음과 수다, 공감 같은 것이 속속 들어차고 있다.

은수연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가족치료를 공부할 때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사례를 참조했다. 이 가족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희생양은 누구인지 분석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정리해 글로 썼다. 어떤 생각과 감정이 떠다니던 게 말로 나오고 말을 글로 정리하면서 개념이 잡혀갔다. 이게 아니었구나, 이게 이거였구나. 논거를 찾지 못했던 감정이 정리돼가는 기쁨이 컸다. 또한 세상 밖에 나와서 지내보니 자신은 여러 면에서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빠라는 사람이 이상했던 거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피해 사실을 숨기고 수치스러워했는데, 수치심을 오롯이 느껴야 하는 사람은 아빠였다. 성장기의 고통과 치욕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풀어갈 수 있게 되자 조금씩 홀가분해졌다. 공부의 효능을 안 이상 중단할 순 없다. 더 하기로 했다.

“여성학을 할지 사회복지를 할지, 아직 고민이에요. 네가 세상과 소통하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뭐니, 스스로 묻고 있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도 공부가 필요한데, 내가 살아낸 삶에 대해서 그냥 악바리처럼 잘 살았어 이러는 게 아니고, 나의 감정 중에 뭐가 잘못됐는지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고 싶어요.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나를 붙잡고 있었던 시간이 꽤 길었으니까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내 몸이 붙잡고 있는 기억이 있어요. 공부해서 생각을 일깨우고 싶어요.”

9년의 폭력, 10년의 기록

은수연의 책이 나온 건 2012년 8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그 다음달이었다. 매체의 영향력이 컸다. 특히 <한겨레> 9월16일치 ‘조국의 만남’ 코너에 지면을 통으로 할애한 은수연 인터뷰는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아마 월요일이었을 거예요. 기사가 나간 날 아침에 조국 교수님한테 문자가 왔어요. 조회 수가 100만 건이 넘었다고, 이 정도면 1년에 손꼽는 대박이라고 하더라며 제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인터뷰 분위기는 따뜻하고 편안했다. 눈물은 딱 한 번 흘렸는데 그 장면이 공교롭게 기사화됐다. 은수연은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화할 수 있었다. 집을 나온 뒤 가해자를 맞닥뜨린 적이 있는지 조국 교수가 물었을 때, 은수연은 아버지의 출소가 1년 앞으로 다가오자 해코지의 두려움에 떨다가 직접 교도소에 찾아간 기억을 떠올렸다. 면전에 대고 말했다. ‘나는 당신이 망가뜨리려고 해도 망가지지 않았고, 더럽히려고 해도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걸 말하려고 왔다.’ 조국 교수는 물었다. “그게 왜 책에서 빠졌죠?” 이 극적인 장면, 성폭력 피해자가 눈앞의 거대한 악이자 자기 안의 끔찍한 공포와 대결하고 발언하는 장면은 그대로 기사 제목이 되었다. “아버지의 성폭력에도 난 더럽혀지지 않았어요.”

은수연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이렇다. 1994년 대학에 들어간 해, 집에서 탈출해 한국성폭력상담소 열림터에 갔다. 당시 최영애 소장이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그냥 흘려들었다.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피해 경험이 글감이 된 전례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막 집을 나왔을 때라 너무 힘들고 정리도 안 돼 있고 무엇보다 피해 경험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네 잘못이 아니다’ 같은 말이 계속 내 안에서 쌓여갔다.” 도전 의식이 생겼다. 한번 정리해보자.

직장을 다니면서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좌를 수강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겪은 일들을 써나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에 수기를 연재하면서 작업에 탄력이 붙었다. 글쓰기 전담 선생에게 글쓰기 묘사와 표현 등 개별지도를 받았다. ‘괴물 같은 사람이…’로 시작하면 안 되었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내러티브 원칙에 따라서 그 배경이나 표정, 말투, 심정을 되도록 상세히 묘사해라. 그 상황에 있는 피해자가 어떤 감정일지 읽는 사람이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너무 몰입해 공포와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다. 눈물의 방류 사태로 글쓰기를 중단해야 했다. 그럼에도 독자와 마감이 있어 글을 쓸 수 있었다. 회원들이 소식지를 받으면 가장 먼저 찾아본다는 피드백이 왔다. 끔찍하지만 재미있다고 했다. 상담자들도 피해자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많이 배운다고 했다. 피해자들에게 큰 용기와 위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힘든 시기를 써야 할 때는 끔찍한 기억에 붙들렸다. 길게는 2년 정도 손을 못 댔다.

“수능 전날 호텔에 갇혀서 폭행당했던 장면을 쓸 때는 겁이 나서 글이 나아가지 않았죠. 그래서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보았어요. 아, 나 지금 저 안에 있지 않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글을 썼어요.”

재판이 진행됐던 법원 앞에도 찾아갔다. 글 쓰다가 막히고 찝찝하고 내가 왜 여기에 계속 붙들려 있지 그런 느낌이 들면 혼자 여행 가듯이 기억의 현장을 찾아갔다. 그렇게 한 장면씩 마주하고 사유하다보니 20대 후반에 시작해서 30대 후반까지, 10년이 걸렸다. 피해 기간보다 더 긴 집필 기간을 보내고서야 자꾸만 삐져나오는 통곡 같은 기억을 가지런히 언어화할 수 있었다. 피로 쓰고 온몸으로 쓴 덕분일까. “글이 사진처럼 생생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시인 이성복은 말했다. 정말 그랬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내용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것처럼 끔찍하나 책의 표지는 곱디고운 순백색이다. 이 책이 실제 은수연에게 숫눈길처럼 귀한 시간을 열어주었다.

2013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제29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은수연은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를 쓴 공로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처음엔 ‘이 상을 왜 나에게 주지?’ 하는 마음에 당혹스러웠으나 이제부터라도 그 상에 부응하는 역사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일에 기꺼이 행동하고 있다. 강의나 좌담회, 인터뷰 등에 응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전국에서 모인 성폭력 전담 판사 120명과 토론회를 갖기도 했다. 판사, 언론인, 가해자 전담 국선변호사, 의료인, 법조인 등과 얼굴을 맞댔다. 생존자가 직접 책을 내고 하는 강의는 처음이라고 했다. 은수연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여러분이 무얼 상상하셨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왠지 긴장된 공기로 팽팽하게 당겨진 강연장 분위기가 다소 헐거워졌다. 은수연은 교통사고 경험에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갔다. 직장에서 출장을 다녀오다가 하루에 두 번이나 사고가 났다. 나는 가장 먼저 보험회사에 연락하고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일을 처리했다. 운전자에게 ‘너 왜 이렇게 운전을 못하냐’ ‘하필 왜 그 시간에 이 터널로 갔느냐’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계신 판사님들은 법정에서 성폭력 사건을 특별하게 접근한다. ‘여자애가 왜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어?’ ‘치마 길이는 왜 짧지?’라는 식으로 묻는다. 성폭력 사건도 똑같이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교통사고처럼 사건 자체로 봐달라.

경청과 공감의 박수가 나왔다. 당시 판사모임의 좌장 판사는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교통사고 같은 사건사고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려줘 고맙다고 각별히 인사를 전했다.

지난해 전북 전주에서 북콘서트를 했을 땐 진땀을 흘렸다. 어떤 나이 든 남성이 질문을 한다더니, 아가씨가 너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거 아니냐, 자기 합리화가 심한 거 아니냐고 말한 것이다. 그 자리에는 성폭력 생존자 아이들도 와 있었다. 은수연은 꾹 참고 답변했다. 자기 합리화가 필요하다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그러곤 관객을 향해 말했다. 생존자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상처받을 수 있는데 무시하고,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 합리화 많이 해주시라고. 겨우 행사를 끝냈지만 놀라고 속상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무대 뒤에서 “엄청 울었다”. 얼마 전 양성평등원에서 직원 대상 강의를 할 때도 편견의 벽을 마주해야 했다. 한 중년 남성이 이런 교육인지 몰랐는데 얼굴이 빨개진다고 말한 것이다.

피해자다움과 피해자답지 않음 사이에서

“성폭력이란 얘기를 들으면 ‘폭력’보다 ‘성’과 관련된 걸로 받아들여요. 그런데 참가자들한테 매체에서 본 성폭력, 친한 사람이 겪은 성폭력, 자신의 성폭력 사례를 물어보면 이야기가 끝도 없이 쏟아져나오거든요. 저는 말하죠. 내 얘기는 별로 할 거 없고, 얼마나 일상적으로 성폭력이 일어나는지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가자고.”

성폭력을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로 감각한다는 건 무엇일까. 은수연은 막내올케의 반응을 들려주었다. 언니한테 어떤 일이 어느 정도 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는데 되게 많이 울었다며 말했단다. “근데 나는 언니가 참 존경스러워. 옛날에는 내 딸들이 절대 어디 가서 그런 일 당하지 말기를 바라는 맘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그런 일을 겪어도 언니처럼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맘이 생겼어….”

한 몸에 쏟아져내린 험난한 인생사를 통과한 사람. 오직 생존이 목표였던 지옥에서의 9년. 그녀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그 힘든 시기를 통과했느냐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울면서 기도하는 게 취미였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너는 성격 때문에 산 거 같다”고 했다. 이 또한 사실이다. 은수연은 나쁘게 보려는 마음이 없고 일상을 반듯하게 살려는 자세가 있다. 강인한 면, 나약한 면, 새침한 면, 예민한 면, 호탕한 면, 그것들 모두 은수연이 기르는 자아의 모습이다. 그런데 책 속에서는 우울하거나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만 그려진 것 같다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는 일상에서 반복되고 재생산된다. 영화 <여자, 정혜> <텔미 썸딩>이나 드라마 <보고 싶다> <야왕> 등에서 나타난 성폭력 피해자는 대부분 어릴 때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우울하거나 무기력하거나 복수욕에 불타거나 보호받아야 하는 여자 어른으로 나오는데, 그게 은수연은 못마땅하다. 성폭력 피해가 지독한 상처를 남기지만 그렇다고 피해자가 그 시간, 그 감정에 꼼짝 못하고 멈춰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금방 씻기는 상처도 아니지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도 아니다. 은수연도 경험적으로 알아갔다. 스무 살엔 ‘성폭력 피해자’라는, 만들어진 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벗어나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찾아가자마자 한 일이 정신과 검진이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내가 과연 정상일까’ 심리검사를 받고 전문가의 정상 판정에 안도했을 정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과 비정상, 그 유동하는 경계에서 오뚝이처럼 흔들리며 산다. 누구라도 그러하다면 은수연도 그러하다.

“자기를 다뤄간다고 할까요. 그게(고통이) 올라오면 또 느껴주고. (웃음) 인생의 목적이 상처를 치유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사는 거죠. 계속 따라오지만 병적인 반응을 하지 않게 된 거고요.”

더 이상 상처와의 동거가 불편하지도 일상을 방해하지도 않는 삶. 이걸 평범한 삶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녀는 자신의 삶이 평범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너무 많이 울었어요. 예전에는 대구지하철 참사나 서해 페리호 참사같이 큰 인명 피해 사건에도 아무 느낌이 없었거든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할 때 사이코드라마가 진행됐어요. 다른 사람이 힘든 얘기를 하면 다들 안타까워하는데 나는 사과를 씹어 먹으면서 구경하고 있었대요. 누가 얘기해줘서 알았지, 내가 그러는 것도 몰랐어요. 왜 저런 걸로 힘들다고 난리야, 생각했겠죠. 내 아픔이 너무 크니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공부도 못했어요. 내가 온 국민과 하나가 된 것처럼 슬퍼하고 있더라고요.”

일상의 평범함, 오래 동경한 삶이다. 현모양처가 어릴 때부터 꿈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앞치마 두르고 간식을 차려주고 놀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품었다. 해보지 못한 일이라 더 해보고 싶고 막상 해보면 “오글거려서 앞치마를 벗어던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평범한 가정, 평화로운 일상을 소망한다.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과 야참으로 라면 먹기도 꼭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자세와 능력도 이미 갖춰져 있다. 가사일을 좋아한다. 웬만하면 손빨래를 하고 물걸레질도 즐긴다. 햇살 좋은 날 이불을 널고, 밤이면 햇볕 냄새 든 이불을 덮을 때 더없이 만족스럽다.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하곤 하는데 “요샌 화가 안 나서 집이 무척 더럽다”며 또 깔깔 웃는다.

용서는 숙제가 아니다

“내 문제에 스스로 충분히 애도하고 다른 사람들도 애도해줘서 슬픔을 건넌 것 같아요. 나 인복 완전 넘치는데 집에서 부모복만 없어, 그러거든요. (웃음) 인생의 멘토들, 친구들의 도움으로 트라우마가 극복됐어요. 사실 사람에 대해 신뢰를 갖지 못하는 것만큼 큰 상처가 없잖아요. 사람에 대한 상처를 사람으로 잘 극복한 것 같아요.”

은수연의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반짝인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에 추천사를 써준 인연으로 이금희 아나운서에게 받은 선물이다. (“촌스럽게” 이거 너무 자랑하고 싶으니 꼭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TV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나오는 이미지 그대로 실제 봐도 푸근하고 자상한 큰언니 같은 분이라며 자랑에 여념이 없다. 이처럼 은수연은 사람이 살면서 사람들한테 받아야 하는 것들, 부모가 무너뜨린 것들을 좋은 인연으로 채울 수 있었다.

“용서하려고 애쓰지 마라.” 친한 목사님의 말씀도 일상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용서가 의무나 숙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용서가 어느 순간에 되는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하는 거더라고요. 자신의 요구, 자기의 필요에서 나와야 해요. 누구를 미워할 때 나도 같이 썩어가는 것 같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자기를 위해서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어학 공부에 몰두하느라 ‘그 사람’이란 단어가 떠오를 시간이 없어요. 예전에는 같이 방구석에 있어도 두렵지 않은 존재이길 바랐는데 지금은 마음에 들여놓을 영역이 없는 거죠. 그 사람은 지금 저에게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수연 개인도 변하고 사회적 통념도 변했다. 스무 살 때 처음 만난 상담교사는 성폭력과 가정폭력 사실을 말하자 “아빠가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꼭 잠그고 자라”고 충고했다. 그랬다간 가해자의 분노를 사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당시엔 친족 성폭력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그녀조차 자신이 당한 일을 뭐라고 명명할지 몰랐다. 강간? 느낌이 이상했다. 지금은 성폭력이란 단어를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니 변하긴 변한 거다. 성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 <도가니> <소원>도 흥행했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는 지금까지 5쇄가 나갔다. 전례 없는 출판 불황과 소재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이다.

이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일단 성폭력이 사회 일반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은 분명하다고 그녀는 본다. 대학원 석사 논문 주제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 대한 사회복지적 지원에 관한 것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놀랍게도” 그것들이 얼추 갖춰졌다. 기본적인 하드웨어가 바뀌었으니 소프트웨어가 바뀌는 일이 남았다. 생존자의 변화, 그리고 생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

“성폭력 피해 경험이 내 직업도 아니고 나를 특별하게 하는 것도 아니에요. 나를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얼굴을 안 보이고 싶어요. 꼭 성폭력이 아니어도 각자 자기 상처를 편하게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쟤, 그런 일 있었어’ 하면서 아래로 보거나 쑥덕거리지 않고 같이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은수연은 그날을 그려본다. 나의 기쁨과 세상의 필요가 만나는 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필명보다 더 예쁜 본명으로, 어쩐지 쓸쓸한 뒷모습이 아닌 선한 눈빛을 나누며 마주할 수 있기를. “얼굴을 돌리고 나는 너를 기다린다”는 독일 시인 넬리 작스의 시구처럼, 그렇게 은수연은 ‘얼굴을 돌리고’ 기다린다.

 

한겨레 <나들> 내 몸, 파르헤시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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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히 - 보사노바뮤지션 '너무 흔한 비밀을 노래하네'

[행복한인터뷰]

[내 몸, 파르헤시아] 보사노바 뮤지션 소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방법 방법/ 약간은 낙관적으로 강해질 것/ 남들의 시선을 나에게 대지 말기/ 잘할 수 있는 일들에 열중하기/ 부드럽게 환하게 서로를 지켜보기/ 나보다 세다고 눈감아주지 말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중

소히 1집 <앵두>(2006)에 수록된 노래다.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붙였다. 일용할 양식과도 같은 가사에, 흥겨운 보사노바 리듬을 입혀서 청아한 음성으로 부른다. 그해 처음 반팔 셔츠를 꺼내 입은 날 살갗에 떨어지는 노란 햇살처럼 묵은 감각을 깨우는 기분 좋은 노래다. 아니다. 그해 처음 내리는 겨울비가 콧등에 떨어질 때처럼 시큰하기도 하다. 경쾌하거나 애잔하거나. 소히의 노래는 빙긋이 웃게 한다. 이름의 주술적 힘일까. ‘소히’(sorri)는 포르투갈어로 ‘미소짓다’란 뜻. 본명 최소희(昭喜) 역시 웃는다. 기쁘게.

데뷔 이전부터 서울 홍익대 앞 인디신을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해온 소히는 보사노바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어느 뮤지션은 “우리나라에서 소히보다 브라질 음악을 깊게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고, 어느 팬은 “완전 동안 보사노바 가수”라고도 했다. 한국 가요와 브라질 음악의 섞임이 돋보이는 2집 <밍글>(Mingle·2010)에 이어 세 번째 앨범 <데이케어>(2013)를 낸 소히는, 어느 인터뷰에서 “보사노바 말고도 하고 싶은 음악이 많다”고 했다.

“이번에 3집 음반은 제가 직접 프로듀싱을 했는데 밝은 음악만 있지 않거든요. 슬프고 우울한 면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1집, 2집 때 보사노바 이미지 때문에 시종일관 미소지어야 하고 샤방샤방해야 했어요. 그걸 벗어나니까 사람들이 무거워졌다고 느끼더라고요.”

기타를 잡은 지 10년. 소히는 외려 자신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면의 어둠을 표현할 만큼 비로소 ‘낙관적으로 강해진 것’이다. 워낙 기질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방 안에 오도카니 놓인 소녀가 음악과 사랑에 빠지게 된 걸까 싶지만 그 반대다. “혼자 있어서 음악을 만난 게 아니라 음악을 만나서, 음악만 듣느라 혼자 있게 됐다”며 웃는다.

 

흑인음악과 보사노바, 사춘기 반려음악

순수한 마음은 상처받기 쉽고/ 커다란 눈은 세상과 싸우고/ 영악하지 않으면 거친 세상에 살기 힘들 거란 생각에/ 모두 초조해지고/ 그리워라/ 따사로운 시선/ 느끼고파/ 연결된 기분/ 느끼고파/ 혼자가 아니란걸 <왈츠> 중

중1 때 <지구촌 영상음악>이라는 TV 프로를 보았다. 흑인음악이 잠깐 나왔는데 그루브한 리듬앤드블루스(R&B) 음악이었다.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듯 넘실대는 흥겨운 리듬에 단박에 사로잡혔고 그때부터 음악을 찾아들었다. 더 어릴 때 김완선의 무대를 보면 가슴이 뛴 적도 있다. 열정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할까. 기타를 처음 잡은 것은 고3 때다. 록을 좋아하는 사촌언니를 따라 라이브클럽 ‘드럭’에 갔다가 음악 하는 친구들과 가까워지면서 밴드를 하게 됐다. 고등학교 때 한 달 정도 기타를 배우고 그때부터 혼자 연습했다. 소히의 첫 그룹은 슈게이징 록밴드 ‘잠’이다.

“흑인음악은 듣는 건 좋은데 직접 하려면 힘들었어요. 감정을 오버해야 하는데 제가 과하게 표현하는 걸 못 견뎌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러다가 스무 살 때 ‘잠’에 들어가서 베이스를 쳤죠. 슈게이징(Shoegazing)이 고개 푹 숙이고 신발만 보고 연주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거든요. 록밴드지만 액션 없이 정적으로 하니까 좋았어요. 성장기의 우울함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이었죠.”

‘내 몸’에 가까운 음악은 따로 있었다. 보사노바가 소히의 귀를 두드렸다. 우연한 계기다. 서점에 갔다가 브라질 가수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의 베스트 앨범을 반값에 팔아서 반가운 마음에 샀고, 들었고, 반했다. 풍부한 리듬에 절제된 감성이 깃든, 그 건조함에 매료됐다. 음악이든 일상이든 감정을 발산하기보다 억누르는 것을 추구했던 소히다. 그 길로 인터넷 보사노바 동호회에 가입했고, 그곳에서 베이시스트를 구한다는 공지가 떠서 오디션을 보고 브라질 음악 밴드를 시작했다.

보사노바(BossaNova)는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경향’이란 뜻이다. 삼바의 복잡한 리듬에 모던재즈 기법을 도입해 세련되고 단순하게 발전시킨 브라질 음악으로, 1960년대 세계적인 유행과 더불어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국내에서는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 한영애의 <어느 날>,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 등이 보사노바 장르에 속한다. 브라질 음악으로 앨범 전체를 소화하는 뮤지션은 소히가 유일무이하다.

왜 브라질 음악일까. 음악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음악으로 청춘을 기대고 영혼을 돌보고 앨범을 채운다는 것은 호기심이나 의지를 넘어서서, 존재의 요청이다. 브라질 음악의 어떤 요소가 소히와 부합했는지 묻자 소히는 ‘쇼로’(Choro) 이야기를 꺼낸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으면서 음악도 영향을 받았대요. ‘쇼로’라는 전통음악이 있는데 되게 슬프거든요. 원래 아프리카 노예들을 통해서 브라질에 흑인음악이 들어왔으니까 역사적 배경에 따른 특유의 정서도 있겠지만, 쇼로의 영향으로 브라질 음악이 밝지만 슬픔이 있어요. 삼바를 들어봐도 리듬을 잘게 쪼개고 박자가 빠르지만 멜로디는 구슬프거든요. 포르투갈 음악 자체가 슬픔을 깔고 있대요. 쇼로가 ‘운다’라는 뜻이거든요.”

 


‘웃으면서 말하기’ 모방하고 싶다

나나나나 나나나나/ 하고 싶은 말 있어/ 나나나나 나나나나/ 에겐 슬픈 일이 많아/ 나나나나 그래 너처럼/ 모두 내 잘못인 줄 알았어/ 하필이면 왜 나였는지/ 그냥 재수가 없었어/ 나나나나 참 웃긴 건/ 하필 나인 사람 너무 많아 <나나나> 중

울음이 끝난 뒤 하늘 같은 무구한 표정으로, 소히는 아동 친족 성폭력 피해 경험을 얘기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이 정말 절망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뭔가 부자연스럽고 정상이 아닌 것 같았고 긴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해 긍정하지 못했지만 스스로 괴로워했다기보다 주위의 시선이나 매체에서 다루는 기사로 인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쉬이 상처받고 자주 위축되는 상황에 처하면서 그 사건을 많이 탓했다.

“아동 성폭력의 괴로움은 우선 내 편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가족, 친구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죠. 어머니가 알게 됐는데 구체적인 피해 사실까지는 모르고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저를 엄청 혼내셨어요. 뭐가 잘못인지도 모르고 혼이 나니까, 잘못했구나 생각했죠. 돌이켜보면 그때 엄마도 당황하신 거 같아요. 나이가 들고 학생이 되고 나서 제가 겪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내가 한 것도 아닌데 내 잘못이고 그런 게 괴로웠고, 큰 비밀이었어요.”

2007년 8월, 소히는 피해 사실을 남들에게 처음 말했다. 홍대 앞 인디신에서 친하게 지내던 ‘소규모아카시아밴드’ 멤버 송은지의 제안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에 참여할 때였다. 앨범 제작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정민아·송은지 등의 가수 외에도 글 쓰는 이들까지 6명이 위안부 관련 세미나를 듣고 학습 친목모임을 꾸렸다.

처음 모인 날, 술을 마셨는데 여성주의에 관한 이야기로 흐르면서 ‘나 이런 적 있다’며 성폭력과 성추행 얘기가 나왔다. 그 자리에서 소히도 자연스럽게 말문이 트이듯 말이 나왔다. 피해 사실을 축소시키기는 싫었고 있는 그대로 떨리는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그 뒤로는 성폭력 피해와 관련된 얘기가 나왔을 때 마치 “나는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처럼 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즈음 소히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싹텄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을 만났다. 서문을 읽는데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거의 모든 인간의 고통은 ‘말’ 때문에, 즉 지배 규범을 내면화할 때 발생한다는 것,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해나가야 한다는 것 등 구절구절이 뭉친 과거를 어루만져주는 느낌이었다. 극렬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누가 한마디만 잘못해도 가만 안 두는. (웃음)”

영화, 음악, 책 등 두루 섭렵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조세영 감독의 성폭력 피해 생존자 다큐멘터리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를 보았다. 스크린에서는 ‘같은 고통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영화에 출연한 이들은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활짝 웃으며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다. 침울하지 않은 분위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항상 울면서 이야기하는 상황이 불편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소히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매달 주최하는 성폭력 피해여성 자조모임 ‘작은말하기’ 자리에 나갔다. 

 


 

나를 피해자로 본다면, 그건 애석한 일

내 옆자리에 앉아 내 옆구릴 스치는 느물거리는 손/ 심증의 손/ 편하단 말에 존중은 없고/ 존중한단 말에 진심이 없는/ 아/ 가녀린 내 마음/ 오해가 될까 착각이 될까/ 억울해할 테지만/ 난 말할 거야 <심증> 중

진실 말하기, 이후 실존의 변형이 일어났다. 탈소심. 자기억압에서 조금씩 놓여났다. 무대도 확장됐다. 소히의 음악이 공감할 수 있는 품이 넓어졌다. 여성단체나 반성폭력운동 진영과의 인연으로 크고 작은 행사에 초대됐다. 성폭력 생존자의 증언 기록인 은수연의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북콘서트에서 축하 공연을 했고, 전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한 성폭력 피해자 글쓰기 워크숍 문집 발간 북콘서트에도 출연했다. 노래가 끝난 뒤 기타의 여음 속에서 소히는 나지막이 말했다. 저도 아동 성폭력 피해자인데요, 라고.

“제 피해 사실이 알려져서인지 관련 행사에 자주 부르시더라고요. 고맙게 가죠. 페이를 주니까. (웃음) 불러주지 않으면 제가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데 가서 얘기도 듣고 노래도 하고. 피해여성들이 자기 경험을 말하는 그 힘이 느껴져서 좋아요. 그런 자리가 비공개잖아요. 근데도 갈 때마다 느끼는 게 ‘이렇게 피해자가 많구나, 여전히 많구나’예요.”

타인의 아픔이 눈에 든다. 받은 것을 돌려줄 차례다. 과거의 자신처럼 끙끙 앓고 있는 피해여성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나도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그런데 그게, 횃불 같은 선구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닌데 막상 현실에 직면하면 이것저것 걸린다. 자기개방과 자기보호라는 상치된 두 욕망 사이에서 적어도 하룻밤은 뒤척인다. (소히에게 인터뷰를 제의했을 때 하루만 더 고민해보고 다음날 답변을 주겠다고 했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 그것도 여성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했을 때 예상되는 반응은 피해자로서의 낙인이다. 대개는 폭력을 폭력으로 보지 않고 성적 이슈로 본다.

이런 관습적 해석의 또 다른 폭력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그렇게 개인의 고통은 사회적 의미망에서 생겨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를 말 못할 사연, 큰 비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건 사실 (피해자가) 말을 안 하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해요. 음, 말을 했을 때 누가 나를 이상하게 섹슈얼하게 본다면 그건 그 사람이 미친놈이지 내가 그런 사람까지 고려해야 할 이유는 없는 거예요. 사실 저는 가진 게 없어요. (웃음) 제가 좋아서 음악을 하는 거니까 잃을 게 별로 없죠. 만약 누군가가 거부감을 갖는다면 애석한 일이겠죠. 여전히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다는 게 애석하겠지만 그것까지 제 힘으로 바꾸려는 건 지나친 욕심 같아요.”

서정주의 유명한 시구대로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뉘우치지 않을란다’ 하는 자세가 때로는 필요한 법. 소히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강함이 생기는데 더 강해지기 전에 얘기하고 싶다고, 더 강해지고 나서 얘기하면 의미 없을 거라고 했다. 소히의 진실 말하기는 확신과 의지가 아니라 불안과 긴장의 힘에서 매번 시도되는 것이다.

 

인디뮤지션의 밥벌이, 그리고 108배

마치 높은 성처럼/ 쌓인 관념을 깨뜨리는/ 모두 다 딱 쿵 짝/ 들어맞진 않아도/ 너의 모습들이 참 좋아/ 남의 고통 느끼는 상상력이 좋아/ 힘 빠르기 자랑 안 하는 네 기타가 좋아 <좋아> 중

소히는 우울한 손가락을 가졌다. 희고 가늘고 기다랗다. 아슬아슬하지만 정확하고 날렵하게 기타 줄을 탄다. 의사표현도 그러하다. 물속의 수초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어조인데 모호하게 말하는 법 없이 선명하게 전달한다. 말간 표정은 정지된 듯 섬세하게 변화하는 감정의 결을 활발하게 실어 나른다. 그 서정적인 손가락과 담대한 말하기와 갸우뚱한 감정선의 합작품으로 소히만의 고유한 노랫말이 나온다. 세 장의 앨범에 가사를 거의 직접 썼다.

이번 3집 앨범을 보면, <왈츠>는 상처를 잘 받는 작은 마음이 들어가 있고, <심증>은 성추행을 당할 때 큰소리 내지 못했던 억울한 상황을 표현했다. <투명인간>은 장기 투쟁에도 불구하고 사 쪽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떡볶이 식사>는 노점에서 1500원짜리 밀가루 떡볶이로 한 끼를 때우면서 드는 상념이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나아간다. 이런 이야기들은 평소에 조금씩 메모해놓은 생각, 감정을 관찰하고 일상의 경험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것이다.

뮤지션이고 노동자인 소히의 일상은 다채롭다. 20대부터 꾸준히 일했다. 방과후 선생님, 회사 경리직, 서빙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전직을 거쳤다. 현재는 “웹디자이너는 아니고 웹디자인 일을 한다”. 음악을 다루는 툴과 원리가 비슷해 어렵지 않게 배웠다고 한다. 주 5일 하루 5시간씩 생활비를 벌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을 한다. 음악 하는 사람이 다른 일을 하는 게 약점일 수 있다고들 하지만, 소히는 오히려 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못 먹고산다는 걸 방증하니까요. 현재 음악판이 그렇다는 걸 숨길 이유가 없는 거 같아요. 음악은 다 스트리밍으로 듣고. 스트리밍 해봤자 1원, 2원 들어오나요. 공연이나 해야지 수익이 나는데 기회가 많지 않아요. 아이돌이나 주류 가수가 아니면 신보가 나와도 음악 사이트 메인에 안 뜨거든요. 결국 버는 사람만 계속 벌고, 똑같은 시스템이 공연에도 적용되는 거죠.”

소히의 3집 앨범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3 앨범제작 지원사업’ 선정작이다. 금전적인 큰 어려움은 덜었다. 1년간 작업한 곡들을 장필순·고찬용 등이 소속된 뮤직레이블 ‘푸른곰팡이’에 보내서 앨범을 발매하는 등 좋은 동료와 작업하는 행운도 얻었다. 소히 3집 앨범은 이전의 브라질 음악에 대한 경쾌한 해석이나 소녀적 감수성에서 나아가 종교적 색채와 재즈적 분위기가 덧입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대해 본인의 해석은 좀 다르다. 대략의 곡 작업을 기타로 했고 리듬이 부각된 흑인포크 성향으로 이동했다며 이전 앨범보다 더 리드미컬한 앨범이라고 말한다.

소히는 요즘 불교에 관심이 생겼다. 종교적 접근이라기보다 성찰적 계기 정도다. 틈틈이 108배를 하는데, 목탁을 쳐주는 ‘108배 애플리케이션’을 틀어놓고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 돌아본다. 기도는 존엄을 잃지 않고 고통을 참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던가. 스마트폰을 앞에 두고 몸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온갖 잡다한 생각을 정리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어제 그런 일을 하면서 왜 그랬지 등등. 아무려나, 백팔번뇌의 팔 할은 음악이다.

“제 목적을 망각할 때가 많아요.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고 3집 앨범을 낸 건데, 좋은 반응이 없다고 상처를 받아요. 남들의 평가보다는 제 음악적 표현이 중요한데…. 만약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20명 있었는데 지금은 5명이다. 그것 때문에 슬퍼하기보다 5명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5명도 없다고 치면, 지금까지 음악 하는 게 어디야.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거죠.”


성폭력지원센터 만든 가수 ‘메리 제이 블라이즈’처럼

넌 내가 보이지 않나/ 보이는데 못 본 체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순간/ 왜 우린 투명해져야 하는가/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 그렇게/ 그렇게/ 안아달라/ 애기하자/ 말하고 싶어/ 우리는 사랑했어/ 사랑을 잊으려고 하는 바보넌/ 투명인간? <투명인간> 중

피오나 애플은 12살 때 당한 성폭력의 기억을 음악으로 승화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재즈아티스트다. ‘힙합 솔의 여왕’으로 불리는 메리 J. 블라이즈는 미국 뉴욕의 빈민가 출신으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성폭력, 약물중독 등 온갖 역경을 딛고 최고의 뮤지션으로 성공한 그녀는 자신의 성장통을 음악에 고스란히 표현한다.

소히에게 특별한 뮤지션들이다. 특히 메리 J. 블라이즈는 음악과 삶에서 두루 존경한다. 그녀는 학대받는 여성들의 교육과 경력 개발 등 성장을 돕는 여성발전지원센터를 설립했다. 피오나 애플은 미디어의 선정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앞에서 늘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음악을 통해 자신을 담는 걸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인 체험에 대한 선정주의적 시각에서 음악을 분리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왔다고 전한다.

이처럼 유명한 외국 가수들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소히는 큰 자극과 위안을 받았다. 피오나 애플은 피해 사실을 가사에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소히 역시 피해 사실 때문에 음악의 움직임이 있었고, 그게 음악의 한 흐름인데 피해 사실을 떨어뜨려놓고 표현하거나 굳이 없었던 일처럼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말했다. “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해 동안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이다. 다수의 경험이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도 경험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수는 없는 일이다. 소히의 음악에는 피오나 애플과 메리 J. 블라이즈의 애절한 음성이 숨 쉰다. 밝게 웃는 성폭력 피해여성들과 떡볶이 노점상 아주머니와 콜트·콜텍 노동자들과의 경험이 존재한다. 이 사회에서 투명인간으로 살아가지만 소히의 눈에는 보이는 그들과의 공동 창작물이 소히의 음악이다.

흑인음악에서 슈게이징록을 지나 쇼로의 영향을 받은 보사노바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된 오랜 슬픔의 지층을 탐사하면서 소히는 어느새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레비나스)이 생겼다. 하고 싶은 음악을 추구하고, 하고 싶은 말을 설파하는 힘이 길러졌다.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 것이다.

“음악을 통해서 제 솔직한 생각과 마음을 알리고 싶어 요. 누구에게나 각자의 슬픔이 있잖아요. 그 슬픔을 저의 슬픔으로 위로하고 싶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져왔던 선입견이나 통념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음악을 통해 만들고 싶어요.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치유되는 사람은 저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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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월간지 <나들>에서 '내 몸 파르헤시아'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소히가 3번째네요. 파르헤시아는 '진실말하기'라는 뜻으로 성폭력피해여성이 몸의 진실-삶의 얘기를 풀어가는 인터뷰입니다. 인터뷰이 요청에 따라 온라인 공개를 선택합니다. 소히는 공개를 해도 좋다고 해서 싣습니다. -> 본문보기 

* '내 몸 파르헤시아'에 인터뷰를 원하는 분 있으면 메일로 보내주세요. varyeyes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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