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경이 - 엄마가 말하는 폭력, 아들과 바꾸는 세상

[행복한인터뷰]

 

손경이는 전문 강사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성·학교·가정·직장 폭력 예방 등을 주제로 강의한다. 2012년 여성가족부 장관상을 받았다. 손경이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다. 강의 도중 그 자리가 ‘안전하다’고 판단하면 피해 경험을 터놓는다. 삶의 진실함에서 나온 묵직한 강의에 대부분 감동하지만 이런 반응은 피할 수 없다. “아, 자기가 당해서 성폭력 강사를 하는구나.” 어떤 이는 대놓고 구시렁거린다. “어쩐지 드세더라. 남자를 가만 안 둘 기세야.”

편견의 말은 대개 단순논리로 반복된다. 특히 성폭력에 관해서는 논리적 성찰을 허용하지 않는다. 삶의 여정에서 흘러들어온 모든 것의 퇴적층이 성정이다. 특수한 경험이 직업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드물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의사 할까. 더군다나 그는 반대다. 성폭력 경험이 있어서 강사를 하는 게 아니라, 강사로 일하다가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기억하게 됐다.

손경이씨


성폭력 나만 당했다… 나도 당했다

어느 초등학교 5학년 교실이다. 손경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했다. 2년차 새내기 강사는 매뉴얼대로 별다른 감정 없이 강의에 임했다. 성폭력 피해자에 관한 통계를 보여줬다. 한 해에 ○○명이 사건을 겪고 가해자 1위는 사촌오빠, 2위 의붓아빠, 3위 친아빠, 4위 외삼촌, 5위 오빠다, 라고 설명하는데 한 여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빠한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너무 놀라고 당황한 그는 수업이 끝나고 상담하자며 얼버무렸다. 강의가 끝나자 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성폭력 통계를 보여준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이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가해자 2·3위가 아빠였다니, 이건 자기 문제가 아니고 아빠의 잘못임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간 다른 강의에서 통계를 제시하면 반응이 시큰둥했다. 비경험자는 못 믿는다. ‘그런 아빠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경험자인 아이는 달랐다. ‘나만 당했다’에서 ‘나도 당했다’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내처 아이는 서운함을 토로했다. 자기가 용기 내어 피해 사실을 공개했을 때 박수를 쳐주었어야지 왜 손을 내리라고 했느냐고. 선생님도 경찰이랑 똑같다고. 어른들은 왜 무조건 숨기느냐고. 그러고는 “선생님이 원칙이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9개월 남짓, 강의를 하다 중단하다 했다. 열두 살 아이의 당당한 모습이 부러웠다. 강사로서 부끄럽고 어른으로서 미안했다. 크게 마음이 움직였다. 진정한 감동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라고 했던가. 이전 지식은 폐기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성폭력 교육 자료를 조목조목 의심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그때 안에서 무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소리를 질러라? 소리 지르면 죽을 수도 있는데. 소리 질러서 산 사람이 있을까. 짧은 치마를 입지 마라, 밤에 돌아다니지 마라,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마라. 성폭력 예방 지침의 모든 항목이 피해자 유발론인 거예요. 제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기도 한데, 이런 인식 때문에 여성이 피해를 입고도 자기 잘못이라는 자책감에 시달려요. 신고율도 저조하고. 내가 완전히 잘못 가르치고 있구나. 피해자 유발론에서 가해자 책임론으로 접근이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알았죠.”

어떻게 하면 강의를 잘할 수 있을까, 그것만 연구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해놓고 드나들면서 사례를 참고했다. 그 무렵 ‘제3회 성폭력 생존자 큰말하기대회’ 공지가 떴다. 호기심에 찾아갔다. 무대에 올라가 마이크를 붙잡고 자기의 피해 경험을 얘기하는 여성들을 보았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눈물이 솟구치고 기억이 떠올랐다. 십수 년 전에 폭발해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의 퍼즐 맞추기가 시작된 것이다.


교육중독자, 자격증과 자존감을 얻다

스물넷 봄날. 손경이는 촉망받는 회사원이었다. 여상을 졸업하고 대기업 경리과에 입사해서 1년 만에 그룹 경영기획실 인사과로 자리를 옮겼다. 주경야독으로 의상학과 대학을 마쳤다. 계열사 의류업체에서 재능을 펼치고 싶었다. 인생에서 가장 승승장구하던 그때, 꿈과 일에 빠져 살던 5월의 어느 날 사건이 발생했다. 낯선 남자에게 끌려가 닷새 동안 감금당했다가 풀려났다. 경찰에 신고했고, 잡지 못했다. 그러고는 잊었다. 해리 현상. 모든 종은 위험이나 전멸의 무시무시한 위협에 생물학적 반응을 한다. 해리는 신체적·정서적으로 뭔가를 느끼는 능력이 완전히 차단되면서 고통과 공포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으로, 효과적인 생존 기제다. 그도 그랬다. 기억은 지지직 타버리다 끊어졌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일하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을 지나며 일상을 살아갔다. 심해의 깊은 어둠을 밀고 올라온다는 산갈치처럼 외상의 기억이 불쑥 떠오르기 전까지는.

손경이의 일상은 늘 2배속으로 흘러갔다. 결혼 전에는 타고난 근면함과 탈(脫)가난에 대한 욕망으로 직장생활에 전념했고, 결혼 후에는 실질적 가장 노릇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신을 밀어붙였다. 백화점에서 스카우트 대상 1순위 숍매니저로 거론됐다. 밤이고 낮이고 일해서 돈을 벌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하루에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아이에게 가장 미안했다. 왜 열심히 살수록 관계가 끊어지고 심신이 피폐해지는가. 삶보다 앞선 근원적인 질문이 돋아났다. 돈이란 뭘까. 부모란 뭘까. 사는 게 뭘까.

좋은 부모가 되자. 일을 그만두었다. 동네 구청에서 하는 부모교육을 받았다. 그때 난생처음 성교육을 접했다. 흥미로웠다. 상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사회복지학, 심리학까지 파고들다보니 40여 개의 자격증 및 수료증을 취득했다. 서른 중반에 ‘성폭력 예방 강사’라는 새로운 직함을 얻었다. 자칭 ‘교육중독자’가 되어 지식을 미친 듯이 습득했으나 정작 자신에게는 무지했다. 강의에서 만난 열두 살 여자아이, 그리고 다른 성폭력 생존자들의 외침은 그런 그를 일깨웠다. 좋은 부모가 되는 일은 나를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고, 나를 온전히 인정하기 위해서는 성폭력 경험의 재해석과 기억의 복원이 필요했다.

나를 알아가는 진짜 공부가 시작됐다. 피해여성들과 대화하고, 전문가와 상담하고, 여성학 공부에 몰입했다. 그렇게 3년간 복구한 몸의 기억을 들고 손경이는 2007년 ‘제5회 성폭력 생존자 큰말하기대회’에 섰다. 성폭력 사건으로부터 14년이 흐른 뒤다.

“드러내자, 세상에 아픔을 드러내자. 하지만 잘 살고 있다는 것도 같이 보여주자. 항상 성폭력 피해자는 아프고 힘든 모습만 보여주는데, 내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다른 피해자들도 잘 사는 방법을 찾지 않을까 생각했죠. 저라고 해서 아예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힘듦이 점점 줄어들고 의식이 바뀌고 주변 사람이 바뀌면서 덜 힘들어졌거든요.”

가치의 전환이 일어났다. ‘보이는 나’가 아닌 ‘변화하는 나’로 사는 쾌감이 컸다. 열심히 살수록 경험과 관계가 쌓이고 그의 풍요는 주변으로 넘쳤다. 비로소 좋은 삶에 안착한 것이다. 그러자 삶의 의미를 나누고 싶었다. 성폭력피해생존자 다큐멘터리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감독 조세영·2009) 출연을 수락했다. 영화에서는 ‘한새’라는 별칭으로 나온다.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에 나오는 성폭력 피해자와 달리 음성 변조나 모자이크 없는 최초의 다큐인권영화라는게 저한테는 신선했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항상 죄인처럼 가려야 하는 현실이 싫었거든요. 약간의 군중심리랄까. 그동안 하고 싶어도 못했는데 주인공 네 명이 같이 하니까 용기가 났어요.”

영화 시사회 때 가족을 초대했다. 아빠, 엄마, 남동생, 여동생, 여동생 남편,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영화를 보러 왔다. 그가 십수 년 전 닷새간 행방불명됐을 때, 집과 회사에서는 “연애에 실패하고 죽으려다 며칠 바람 쐬고 살아 돌아온 사람”으로 돼 있었다. 그도 차마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영화를 본 가족들은 박수와 눈물로 외로웠을 그를 다독였다. 친정엄마는 밖으로 나가 연신 눈물을 닦았다. 아들 상민군은 무대에 올랐다. 극중 손경이의 일상을 다루는 장면에 출연하는 나름 조연 배우 자격인데, “내 허락도 안 받고 영화 찍었어요. 전 중학생인데 저 너무 창피해요”라고 말해 관객의 웃음을 자아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 엄마의 기록영화에 출연한 아들은 그 자체로 통념을 깨뜨렸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들은 말했다, 엄마는 성폭력 생존자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엄마의 어깨 위로 머리가 쑥 올라오는 상민군은 곧 대학생이 된다. 법대에 일찌감치 합격했다. 엄마와 나란히 서서 대각선으로 시선을 나누며 중저음의 목소리로, 여전히 쉴 새 없이 떠든다. 각별히 “공을 들여서” 키운 아들이다. 손경이는 가정폭력을 휘두른 아빠와 남편, 그리고 성폭력 가해자까지 ‘남자’에게 상처가 많다. 아들만큼은 젠더 감수성을 키우고 올바른 성의식을 갖도록 노력했다. 아이의 존중(사정)파티를 열어주는가 하면 엄마의 경험과 생각을 자주 들려주고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런 일상에서 영화 출연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상민군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처음 들었다. 세월에 눅이고 삭이어 지금은 질감이 달라진 그날의 기억을 덤덤한 목소리로 되짚었다. “책이나 신문에서만 봤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피해 당사자)게 엄마라니까 느낌이 이상했어요. 상상도 못했죠. 엄마한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너무 복잡한 거 같아서 그냥 똑같이 대했어요. 내가 하던 대로 해주면 엄마도 살던 대로 살겠구나….”

상민군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혹시 내가 아빠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정, TV 드라마에서 보았던 인물의 처지가 되어보기도 했다. 그런 미묘한 감정의 결까지 살려서 속내를 편안하게 터놓는 아이가, 평소 하던 대로 대해주는 아들이, 엄마는 마냥 미덥다. 특히 성폭력 사실을 듣고 나서 의연하게 대하는 일은 어른도 쉽지 않은 고난도의 배려 행위다. 대견하고 든든했다. 한때 “성폭력 얘기만 들어도 지겹다”고 말했던 상민군도 타자의 고통에 대한 수용력을 키워준 엄마가 고맙다. 전 여자친구가 성폭력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잘 들어줄 수 있었고,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겪는지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들은 때로 강의에도 함께 나간다. 고아원이나 보육시설에서 성교육을 할 때, 상민군은 마지막 20여 분 특별강사로 나선다. 두 사람이 이심전심 마음이 척척 맞는 건 아니다. ‘야동’ 문제에선 의견이 갈린다. 엄마는 ‘왜곡된 성의식을 심어줄 수 있고 성차별성이 많으니 되도록 보지 말라’는 쪽이고, 아들은 ‘어차피 안 볼 수는 없으니 가짜임을 알고 보라’는 쪽이다. 상민군은 당당하다.

“야동을 한번 보고 나면 억제하는 건 불가능해요. 판타지 영화가 가짜라는 건 알지만 빠져서 보잖아요. 무조건 보지 말라고 막는 거보다 저건 허구라는 걸 알려주고 비판 능력을 길러줘야죠.”

상민군이 자기 경험에 근거한 이야기를 전할 때 청중은 몰입한다. 옳은 주장으로 가득한 ‘어른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이들도 ‘아이의 말’에는 눈을 반짝인다. 이 확연한 차이를 보며 손경이는 강사이자 엄마의 입장에서 배우는 게 많다. 물론 아직도 야동 반대 의견에는 변함없다. 하지만 어차피 ‘정답 없음’의 삶이다. 다른 세대, 다른 존재가 각자의 견해를 드러내고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건전한 배움의 장이 되지 않을까 믿을 따름이다.

평소에도 두 사람은 왕왕 시끄럽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낙태 문제를 놓고 잠시 뜨거운 논쟁에 휩싸였다. 낙태를 반대하는 아들의 비판은 가차 없고, 엄마는 페미니즘 이론을 근거로 제시하며 물러서지 않는다. 종교 문제로 쟁점이 이동돼 토론을 유보해야 했다. 두 사람은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심상하다. 소개팅에 입고 나갈 두툼한 코트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그냥 있는 옷 입으라는 엄마가 옥신각신 정겹다. 아무튼 두 사람에게 대화는 일상이고 논쟁은 활력이다. 중요한 건 ‘차이’를 좁히는 게 아니다. 그 차이가 대화의 단절이 아니라 대화의 촉매가 되어주는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우리 아이가 너무 착한 남자는 아니에요. 근데 솔직해요. 자기감정을 안 감춰요. 뭐 땜에 힘든지 다 말해요. 그러니까 대화가 잘돼요. 변화할 가능성이 있고, 문제가 뭔지 빨리 파악하고 인정하는 아이예요. 지난 4~5년간 수없이 싸웠죠. 지금은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해줘요. (웃음)”

손경이씨와 아들


‘느낌 없음’의 청소년, 가정폭력이 낳은 괴물

아이가 스승이자 친구이다. 손경이는 아들과 싸울 때마다 조금씩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삶에서 도출한 앎은 이렇다. “좋은 남자를 많이 만들면 나쁜 남자는 사라진다.” 아들과 그랬듯이 꾸준히 대화를 나누면 이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많이 생기지 않을까. 나쁜 남자는 점점 사라지지 않을까 믿는다. 앎은 다시 삶을 이끌었다. 강의 초점을 성폭력 예방이 아니라 관계 교육에 맞추기 시작했다. 그가 작정하고 차린 연구소의 이름은 ‘관계교육원/연구소’. 강의의 목표는 좋은 여자, 좋은 남자 만들기다.

“제가 경험한 세상은 올바르지 않은 세상이거든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성적 위주의 투자 개념으로 봐요. 학원을 다녔으면 성적이 좋아야 하지 않느냐 다그치잖아요. 그런 부모의 태도가 사채업자 같다고 아이는 말하죠. 부모는 늘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아이는 다르게 느껴요. 남편은 자기가 돈 갖다 주는 사람 같다고 하고, 아내는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어요.”

손경이가 볼 때 성폭력 가해자는 한국 사회가 만든 괴물이다. 그래서 가해자의 무지를 미워하지 가해자의 인격을 미워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법무부에서 ‘상담조건 기소유예’로 배정된 청소년이 있을 때 매달 정기적으로 청소년 가해자 상담을 진행하는데, 그들의 내밀한 고백을 통해 아이들만 나무랄 수 없는 상황임을 알아챘다. 야동, 대중매체, 친구, 부모, 학교 등 세상이 잘못 가르친 탓이 컸다. “엄마·아빠 대신 선생님이 사과하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마음을 여는 강사는 3m 높이의 담장을 쌓아올린 아이들 마음도 허물어뜨린다. 아이들은 “선생님 말을 듣다보니 나는 예비 가해자가 아닐까 싶다”며 강의 뒤 종종 찾아오기도 한다.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만 보면 스윽 만지고 싶고, 여자가 못 알아차리게 교묘히 성희롱을 하는 수위가 올라가고 있다고 실토한다. 어쨌거나 가장 빨리 바뀌는 대상은 청소년들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느낌 없음’의 아이들이 눈동자가 흔들릴 때면 보람이 크다. 3∼4년 전에 상담했던 아이들에게 연락이 와 피자를 사주며 의젓해진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 힘으로 손경이는 무겁고 어둡고 살벌한 폭력 예방 교육이 아니라 밝은 이야기, 밝은 생각, 밝은 교육을 하게 됐다.

“저의 요즘 관심사는 가정폭력과 성폭력 및 성매매의 유사관계예요. 늘 아빠가 엄마를 학대하는 걸 보고 자란 아들은 여자를 하찮게 여기죠. 가정폭력을 당한 여성은 늘 주눅 들어 있고 의사표현을 못하고요.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어요. 그래서 큰 틀에서 보면 가정폭력이 성폭력의 시발점이죠. 아주 밀접해요. 성폭력을 일부 남자, 일부 여자의 문제로 생각하는데 절대 아니거든요. 일반인들이 내가 가해자도 만들고 피해자도 만든다는 의식이 있어야 해요.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군대폭력, 직장폭력 등 모든 폭력의 시작은 가정폭력이에요.”

그의 명함은 길다. ‘범죄예방위원회 의정부지검 고양지청 고양시 일산서지구 협의회 위원 손경이’. 뒷면에는 이력서 한 장 분량의 소개가 빼곡하다. 원래는 이름과 주소만 적힌 명함을 들고 다녔으나 “센 사람처럼 보이려고 법무부 로고를 아예 넣었다”며 눈을 다 감고 좋아라 웃는다. 호신용 명함을 들고 정부기관 위주로, 대기업·학생·학부모 등을 대상으로 한 해에 500여 회 강의를 나간다. 10년차 강사는 요즘 물이 올랐다. 어서 빨리 좋은 세상이 오기를, 폭력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학수고대한다. 그래서 전국을 누비며 강연하고, 영화도 찍었고, 지난해 12월엔 지상파 TV에도 출연했다. KBS 다큐멘터리 <공감> ‘성폭력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편. 성폭력 예방 인기 강사이자 아들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로서 얼굴을 공개했다. 


내 힘은 작다, 그러나 침묵은 우릴 돕지 않는다

“저는 힘이 작아요. TV에 나오고 신문에 나와도 세상은 안 바뀌겠죠. 강의를 10년 했으니 어림잡아 5만 명을 만난 거 같아요. 세상이 변했나? 그대로죠. 그래서 이제 저도 당사자임을 공개하면 더 빨리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를 업신여길까봐, 남편 있는 여자처럼 행세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가정폭력으로 이혼했고 성폭력 피해자라는 걸 용기 있게 말해요. 그러면 깨닫는 가해자가 있을 거예요. 제가 그랬거든요. 성소수자를 혐오했는데 레즈비언 강사가 직접 나와서 당사자의 사례를 들어 얘기하는 인권 강의를 듣고 이해하게 됐어요. 재해석이 일어난 거죠.”

지킬 것이 없고 나눌 것만 남았다. 나는 학교폭력·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입니다, 라고 편히 얘기한다. 단, 앞서 말한 대로 ‘안전한 장소’라고 판단되는 경우다. 안전의 기준은 무얼까. “질문하는 사람이 많은 강의”다. 가령 이런 상황이다. 남자가 여자의 허벅지를 만진 성희롱 사례를 얘기한다. 조직에서 의무교육을 받기 위해 수십∼수백 명이 모인 경우라면, 보통은 듣고만 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연민이 조금 더 있는 자원봉사자들 강의에서는 달랐다. “그 상사 몇 살이에요?” “술자리에서 동영상 찍은 사람 없어요?” “그 여성 고소 안 해요?” 1시간 내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나의 사례로도 교육 내용을 다 풀어냈다. 남의 얘기로 듣는 사람은 안 바뀐다. 내 문제로 듣는 사람이 바뀐다. 질문하는 행위는 관심 있고, 알고 싶고, 의식을 바꾸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손경이는 강의의 꽃은 ‘질문’이라고 말한다.

꽃 대신 칼이 날아드는 순간도 더러 있다. 생존자임을 밝힌 뒤 조롱하거나 낙인찍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손경이를 피하거나 주춤하게 하지 않는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한다’는 생각이 단단하다. 사명감이 남다른 이유를 묻자 엉뚱하게 드라마 <추적자>(SBS·2012) 이야기를 꺼낸다. 이 사회의 모순과 불의에 저항하는 손현주 역할에 감동받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도와줘야 한다”는 걸 배웠고, 아무리 두렵고 힘들어도 정의와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불편해야 인간이다.” 그렇다. 인간다운 삶의 추구를 위해 손경이는 불편한 상황을 감내하고 불편한 말을 약으로 삼는다. 그런 사람을 이해하면 강의의 질이 더 높아지지 않겠는가 말한다.

“악의적인 사람을 바꾸기보다 나의 주변을 먼저 바꾸는 게 더 낫죠. 청소년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고, 학생에게 성의식의 중요성을 현실성 및 실천가능성 있게 가르치면 돼요. 젠더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그렇게 살 거고 언젠가 누군가 그 사람을 신고하겠죠. 악의적인 사람이랑 싸우는 건 소모적인 일이에요. 일반 사람을 감수성 있는 좋은 사람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에요.”

손경이는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케이크에 불을 밝혔다. 이상민에서 손상민으로, 상민군의 성씨 변경을 기념하는 조촐한 파티였다. 아이는 아버지의 죽음과 친가의 의도적 배제와 비윤리적인 대우로 정서적 폭력을 겪은 뒤 엄마 성을 따르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재판장에서 판사에게 성씨를 바꾸려는 이유를 또박또박 개진하고 온 상민군은 능청스럽게 물었다. “엄마, 오늘 모성애만이 아니라 부성애도 느꼈지?” 세상은 바뀌는가, 안 바뀌는가, 더디 바뀌는가. 분명한 것은 지구상에서 이 두 사람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부딪치며 인간에게 주어진 ‘변신의 권리’를 실천한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세상은 바뀌고 있다.

 

* 한겨레 사람매거진 <나들> 내 몸, 파르헤시아 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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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 - 읽고 쓰고 말하며 거듭난 주체, 나는 행복해도 된다

[행복한인터뷰]

 

이곳은 소수언어박물관이다. 사멸해가는 소수언어의 마지막 화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자신이 살던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박물관에 사는 한 노인은, 모어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고향을 그리워한다. 말에 대한 지독한 향수병에 빠진 채 차가운 전시관에서 삶 비슷한 것을 살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러자 그가 쓰던 소수언어도 사라진다. 말의 통제, 삶의 단절 그리고 작은 말들의 사라짐. 어쩐지 괴이하고 쓸쓸하다. 삶의 질료인 언어가, 관계와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통제와 관리의 도구가 된 이 시대를 김애란은 소설 <침묵의 미래>로 그려낸다.

 

너울은 침묵의 미래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다. 사라지는 언어 최후의 화자가 그러하듯, 말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였다. 인터뷰를 위해 취재 의뢰 메일을 보냈을 때 그는 카페에서 쓴 시를 한 바닥 적어 보냈다.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음계의 말들이 공중에 퍼지다가 낙엽처럼 쌓였다. 오래 침묵했고 이제 막 말이 트였다. 집필을 하고 강연을 간다. 사라지려는 말의 불씨를 현장에서 조곤조곤 지피고 있다. 그 말들을 모아 책으로도 엮었다. 제목은 <꽃을 던지고 싶다>, 부제는 아동 성폭력 피해자로 산다는 것’.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전 너울은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러 지방에 갔다. 실무자와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소개를 받고 강단에 올랐다. 성폭력 생존자의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는 커다란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 집에 오니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강의 시작 전 그렇게 환한 웃음을 짓고 있어서 강사인 줄 몰랐으며 자기도 성폭력 피해자인데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아마 메일을 보낸 그이도 웃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몰랐을 거라고 너울은 말한다. 성폭력을 경험하면 행복에 어색하고 불행에 익숙하다고.

 

매일 힘든 건 아니에요. 때때로 힘들죠. 근데 즐거우면 불안해요. 행복을 빼앗길 거 같고 행복하면 안 될 거 같고. 슬픔 중독자처럼, 나는 불행해야 한다 이런 강박에 빠져서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거 같아요.”

 

아홉 살 때다. 엄마가 운영하던 자동차공업사에 딸린 식당을 찾은 손님이 첫 번째 가해자였다. 순둥이였던 아이는 어른이 시키는 대로 따라갔고 피해 사실을 직관적으로 함구했다. 일주일 내내 굶을 만큼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아빠는 엄마를 매일같이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온통 멍울진 엄마에게 아이가 기댈 품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작게 움츠러들던 아이는 계속 표적이 되었다. 열두 살에는 할머니 댁에서 삼촌에게, 다음 해에는 등굣길에 낯선 남자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작은 몸뚱이에는 내지르지 못한 비명이, 발설하지 못한 말들이 고름처럼 퍼져갔다. , 할머니댁, 학교 어디에도 아이가 몸 둘 곳이 없었다.

 

피난처가 필요했다. 전쟁터 같은 집은 들어가기 싫었고 또래는 유치해보였다. 친구랑 친해지면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데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공간이 학교 도서관이었다. 아침에 교문이 열리기도 전에 학교에 도착해서 닥치는 대로 읽었다. 철학책, 위인전, 소설. 그런데 아무리 책을 읽어도 강간당하고도 훌륭한 삶을 살았다는 여성의 이야기는 없었다. 그 어떤 책도 왜 연거푸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세상이 말을 해주지 않자, 아이도 세상을 향한 입을 다물었다.

 

200712, 너울은 꿈을 꾸었다. 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는 꿈이다. 살려달라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숨통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악몽 후 며칠간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나서야 꿈속에서 그 남자가 입고 있던 옷차림이 선명히 떠올랐다. 황토색 웃옷과 청바지는, 열세 살 때 강간했던 그 남자의 옷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청바지를 안 입어요. 그냥 불편하다고만 느꼈어요. 청바지를 입으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계단을 못 가고 지하철을 못 탄다거나 했죠.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공포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몸은 다 기억을 하고 있었던 거죠.”

 

25년 전 사건은 25년 간 일상을, 전면적으로 그리고 속속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남들처럼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들어갔으나 열심히는 살면서도 종종 우울하고 문득 죽음충동에 시달렸다. 가난은 천형 같았다. 생계를 해결하느라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고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밥벌이에 아등바등하지 않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여유롭고 평온한 시기를 보내던 즈음, 느닷없이 악몽이 덮친 것이다.

 

읽기, 자기고통을 해석하다

 

꿈을 꾸고 난 후, 여성단체 상담소를 찾아갔다. 상담과 독서를 병행했다. 상담 선생님이 외국 성폭력 생존자의 수기를 소개해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답 없음의 결론을 내리고 등 돌린 책과의 해후이다. 너울은 책에 다시 빠져들었다. 원인도 모르면서 결과는 나의 책임이라며 괴로워했던 시간들, 천 번도 넘게 물었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빼곡했다. 이것은 그토록 찾았던 피해자의 언어가 아닌가.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수잔 브라이슨)는 철학교수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과 치유 과정을 기반으로 자아와 외상,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이다. 난마처럼 얽힌 고통의 서사가 가지런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불편한 진실-강간피해 생존경험 드러내기>(테레사 라우러)은 미국의 한 여성이 강간을 당하고 상담을 받는 지난한 과정을 기록하고 나중에 상담사가 되는 과정이 담겼다. 이 책은 상담을 받는다고 좋아지지 않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해주었다. <나는 인생을 믿는다>(사미라 벨릴)는 프랑스에서 청소년기에 강간을 당한 여성이 잘못된 통념으로 발생하는 2차 폭력의 고통을 상세히 묘사했다. 사회적으로 성숙함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아이가 혼란 속에서 어떻게 성폭력을 견뎌내는가를 배웠다. <트라우마>(주디스 하먼)는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폭력의 동일한 메커니즘과 인간의 심연을 밝혀낸 책이다.

 

자기의 고통을 여성주의와 접목해서 해석한 책들이 힘이 됐어요. 세상에 나만 이런 경험을 하는 게 아니구나, 내가 왜 고통스러운지, 내가 왜 말을 할 수 없는지 알았죠. 저는 언어화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다 언어화하잖아요. 그동안 못 먹고 못 자고 아프면 짜증나고 저를 미워했거든요. <트라우마>를 읽고는 나를 아픈 대로, 부족한 대로 인정하게 됐어요. 스스로 이해하는 계기가 됐죠.”

 

고통도 해석이다. 철학자 니체의 말대로 우리는 고통이 아니라 해석된 고통을 앓는다. ‘성폭력 당했으니 여자 인생 끝이다’ ‘여자가 유혹해서 성폭력이 생겼다같은 말들만 해도 버젓이 가해자를 숨기고 피해자를 내친다. 본디 주류언어는 강자의 좋음에서 비롯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니체는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해 판단한 것이다라고도 했다.

 

너울은 피해자의 언어로 된 책을 읽으며 자기언어를 구했다. 상담을 시작하고부터 일 년 동안 읽은 책이 100여권. 갈급했다. 책의 내용에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을 연결지어보면서 서서히 자기미움에서 풀려나고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오염된 말들은 저절로 폐기되었다. 페미니즘을 접하고는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상담 선생님의 권유로 성폭력 상담원 교육도 받았다. 더 이상 죄인처럼 웅크리고 살지 않기로 했다.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상담원으로 4년간 일했다. 내담자들은 10대나 20대나 너나없이 눈물지었다.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어, 나만 이런 일을 경험해, 라고 말했다. 해석된 고통을 앓고 있는 것이다. 흠칫했다. , 이 사람들이 나랑 같은 생각을 하네.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는데 저들도 나처럼 힘들어하는구나.

 

너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졌다. 외국 생존자 수기를 읽었을 때의 아쉬움도 더해졌다. 한국에는 왜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한 책이 없을까. 우리 피해자들은 왜 말을 안 할까. 그렇다고 특별한 정의감의 발로는 아니고 때가 되었다는 자각, 어떤 우주적인 기운에 끌렸다. 2012년 봄부터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성폭력 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연재를 시작했다. 첫 이야기는, 인생 2막의 전환점이 되어준 2007년 꿈 이야기로 전개된다.

 

 

쓰기, 부단히 나로 돌아오는 일

 

모든 말하기는 협상적 말하기다. 약자는 이해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수위를 고려해서 말한다. 경험을 어디까지 털어놓을까. 과연 써도 되는가. 그러나 말할 수 없음의 자리에서 증언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사흘을 울고, 열흘을 앓아눕고, 한 달을 눈물로 지새우면서도 쓰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너울의 성폭력 피해는 성인이 돼서도 계속됐다. 대학생 때 아이들을 가르치던 학원 원장에게,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 고용주에게도 당했다. 가까스로 지탱해온 삶을 한 번씩 더 추락시키는 운명의 야멸참에 몸서리칠 때 어떤 스님이 다가왔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남자 때문에 힘들겠다고, 자기에게 몸 보시를 하면 전생의 업을 씻을 수 있을 거라고. 귀가 번쩍 뜨였다. 전생? 그 말은 이제껏 해명되지 않던 삶의 질곡, 비극의 연쇄, 반복강박과도 같은 자기처벌의 상황들을 설명해주었다. 과거를 구제해줄 계시처럼 들렸다. 그렇게 승복을 입은 남성에게도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사건이 많을까. 다른 여성에게 물어봤어요. 남자들한테 성적인 제안을 받느냐고. 그런 일이 있으면 미친놈이러고 만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자존감이 성장해야 해요. 자기부정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몸을 지켜요. 성폭력은 어떤 여자가 예뻐서, 짧은 치마를 입어서가 아니라 힘이나 권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성을 고르는 거거든요. 제가 취약해 보인 거죠.”

 

그때는 몰랐다. 성폭력으로 망가진 어린 시절. 자아의 기초가 허물어져버린 신체. 열두 살부터 죽음에 대한 시를 썼다. 성장기 내내 치욕과 불안에 시달렸다. 나는 무가치하다는 느낌이 도사리고 있는 상태에서 어른이 됐다. 살고자 택하는 일들이 자꾸만 죽음을 재촉했다. “어른이 돼서 겪은 사건은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고 어떤 상황은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기에 그걸 글로 옮기기가 부끄러웠다. 하지마 그러한 상황을 내가 원하거나 즐긴 건 아니므로, 폭력의 경험인 건 맞다고 본다.”

 

스님의 성폭력 사건 이후, 운명의 공범이 되기로 했다. 생의 불능 상태라고 판단했다. 고시원 쪽방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지인이 발견해 살아났다. 성을 팔기로 했다. 자살도 실패한다면 성판매 여성이 되는 것이 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어릴 때 읽은 소설 <헬로우 미미>, <은마는 오지 않는다> 같은 책들에서 체득한 성폭력 피해여성의 삶이 전부 그랬다. 죽거나 미치거나 창녀가 되거나.

 

글 쓰면서 가장 고민한 부분이다. 성산업에 띄엄띄엄 6개월 정도 종사한 경험이 자칫 성판매 여성을 대표하는 말처럼 될까봐 부담스러웠다. 성폭력 피해자는 다 불행하다거나 성판매를 할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일까봐 우려했다. 또 그동안 여성운동의 성과, 성폭력은 (여자 인생 끝장이 아니라) 사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관점을 무너뜨리면 어쩌나,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 사회적 편견이 더 공고해질까봐 주저했다. 그래도 썼다. 내가 겪어낸 일들이니까.

 

30회 연재를 마쳤다. 글쓰기는 를 회피하지 않고 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촘촘히 쓸수록 까맣게 죽어버린 과거에 피가 돌았고 겹겹이 존재감이 형성됐다. 다행히 내용이 힘들지 쓰는 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다. 어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뽕 맞은 것처럼일필휘지로 써내려가곤 했다. 쓰기의 쾌감과 직시의 고통을 넘나들며 일다에 연재한 글들은 20139월에 같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을 거부한다는 뜻의 제목 꽃을 던지고 싶다’. 성폭력 피해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기억의 복구 작업을 마치고 세상에 내놓은 너울은, 자신 있게 말한다. 피해자에게는 경험을 잊는 대신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고.

 

사건이 없어지지 않는 한 잊히지는 않아요. 과거를 부정할 때는 뿌리 없는 사람 같았어요. 과거가 없다는 게 끔찍한 게 뭐냐면, 저는 그 시기에 함께 했던 사람이 없어요. 서른 살 이전에 만난 사람은 지금 아무도 안 만나요. 한 해가 지나면 전화번호를 다 지웠어요. 학년이 바뀌면 아무리 친해도 안 만났어요. 친구를 보면 그 기억이 다시 났으니까요. 힘들어도 과거를 드러냈더니 제가 역사를 가진 사람이 되더라고요. 과거의 고통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나를 인정하게 되고 내일을 꿈꾸는 힘이 생겨요. 누군가 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싶어 할 때 나는 이런 경험이 있어, 라고 말하는 제 자신을 볼 때마다 많이 좋아졌다고 느끼죠.”

 

 

말하기, 드러나야 줄어든다

 

너울은 얼마 전 충북대에서 꽃다운 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학생 400명이 대강의실에 가득 모였다. 누가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될 수 있는가. 한국의 성문화 하에서는 누구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자신이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맺고 있는 관계들을 살펴봐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 통계에 따르면 성폭력 가해자의 80%가 아는 사람이고, 친족에 의한 성폭력은 12%에 달한다고 한다.

 

축제기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은 시종 진지한 태도로 몰입했다. 그 총총한 눈빛이 큰 에너지를 전해주었다. 내 삶과 내 경험이 누구한테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내 경험이 가치 없는 게 아니구나. “성폭력 경험이 가치 있는 경험은 아니지만, 나의 삶이, 그 경험을 견디면서 살아낸 내 삶이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받는 느낌에 너울은 마음이 환해졌다. 이는 보람이고 긍지이자 의무이다. 또 다른 생존자에게 강연의 기회가 이어지도록 활동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너울은 어디든 부르면 가고 가면 열심히 한다.

저자로 데뷔한 이후 글쓰기 작업도 꾸준하다. <여성신문>에 매주 너울의 치유의 레시피라는 칼럼을 쓰고 있다. 생존자의 이야기를 쓰되, 생존자를 드러내지 않고 고통을 드러내기. 어떤 생존자는 어떤 고통을 겪는지 들려준다. 매번 성폭력 얘기만 담으려니 부대껴 요리를 곁들인다. 가령, 일전에 집을 나와 사는 친족성폭력 생존자에게는 식당 밥이 아닌 집 밥을 먹이고 몸보신도 시킬 겸 닭백숙을 해주었다. 요리는 너울의 주특기다. ‘꽃을 던지고 싶다출판기념회에는 그날 초대한 80여 명의 음식을 손수 차리기도 했다. 그렇게 글도 나누고 음식도 나누고 정도 나누고 말도 나눈다.

 

널리 말하기를 실천하는 이유는 절실하다. 성폭력 생존자가 한 명이라도 더 보았으면 해서다. 생존자가 어떤 고통을 경험하는지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주변에서 생존자에게 너 왜 이렇게 불안해?’ 라고 말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날카로울 수도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또 생존자들에게는 너는 그럴 수밖에 없어가 아니라 너가 그러는 게 당연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제가 처음 성폭력을 경험한 게 30년 전이거든요. 그때는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어른이 없어서 말 못했어요. 우리나라 아동성폭력 신고율이 9%에요. 미국도 6명 중 1명만 주변에 알린대요. 어느 외국 학자가 분석했는데, 아동성폭력 가해자는 한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특성이 있대요.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도 다른 피해자가 있었을 거예요. 주위에 믿을 수 있는 어른이 있었으면 반복적인 피해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죠.”

 

지금도 여전히 아동성폭력 피해자는 너울이 느꼈던 고통을 그대로 호소한다. 그럴 때 미안하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주지 못한 거 같아서.

 

 

모이기, 다섯이 하면 훨씬 난 말

 

 

벤야민은 이야기와 치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름지기 병이란 그것이 이야기 들려주기의 흐름 속에서 충분히 멀리 떠내려 보낼 수만 있다면 치유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겪는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막는 댐과 같다.” 벤야민의 처방대로 이야기는 너울을 어루만져 주었다. 구술로, 책으로, 다른 성폭력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통을 저만치 떠나보냈고 자연스레 자신도 이야기의 수문을 열 수 있었다.

 

작은말하기(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주최하는 자조모임) 친구들, 여성학과 대학원 친구들, 글쓰기 힘들 때마다 격려해준 일다의 조이여울 대표, 상담과 학업을 물심양면 지켜보며 8년간 곁이 되어준 애인, 출판을 제안해준 출판사, 글을 의미 있게 읽어준 독자들은 너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빚어주고 간직하고 퍼뜨려준 고마운 동료들이다.

 

자신이 받은 것을 세상에 돌려주기 위해 너울은 지난여름 인터넷에 생존자 네트워크 카페 성폭력, 그 이후’(http://cafe.daum.net/e-hoo)를 개설했다. 아직 사무실이 없어 엔지오 단체로 등록하지 못했지만 십시일반 후원과 자발적 재능 기부로 조금씩 체계를 잡아가고 있다. 회원이 50명 남짓이다. 운영진 다섯 명이 격주로 모여서 회의를 하고 사업을 논의한다.

 

가장 중시하는 것은 기록화 사업이다. 피해자들이 자기 언어를 갖고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모색한다. 또 가죽공예, 타로상담, 미술치료 등 각자 회복에 도움이 됐던 강좌를 개설하는 치유회복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생존자의 작품 전시회 등도 계획한다. 책 읽고 글 쓰는 모임도 꼭 꾸리려 한다. 읽으면 똑똑해지고 쓰면 자유로워지고 말하면 당당해진다는 것을 먼저 깨친 자의 욕심이다.

 

누구도 성폭력을 찬성하는 사람은 없는데 성폭력 피해는 왜 이리도 많이 발생하는가. 너울은 말한다. 성폭력을 반대하기는 쉽지만 무엇이 성폭력인지 알기는 그만큼 어렵다. 선뜻 나서서 알려 하지 않는다. 여성들조차 자신이 성폭력 피해 가능성을 거의 상상하지 않고 산다. 어쩌면 소설 <침묵의 미래>에 나오는 소수언어박물관의 설정처럼, 성폭력 생존자가 대상화되고 한갓 소재주의로 전시되었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당사자가 직접 증언하고 같이 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너울은 소설 속 노인이 그리워했던 의 언어들, 이를테면 혼자 하는 말이 아닌 둘이 하는 말, 셋이 하면 더 좋고, 다섯이 하면 훨씬 난 말, 시끄럽고 쓸데없는 말, 유혹하고, 속이고, 농담하고, 화내고, 다독이고, 비난하고, 변명하며, 호소하는 말들을 원 없이 부릴 것이다. 말의 물살은 또 다른 말의 잔물결을 낳겠지. 아마도 성폭력 생존자의 언어가 거리낌 없이 오가는 날 성폭력이라는 몹쓸 단어는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큰 피해를 입히고 사라져가는 파도라는 뜻의 너울성 파도처럼.

 

 

 

* <나들> 2014년 2월호 '내 몸, 파르헤시아' 연재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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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히 - 보사노바뮤지션 '너무 흔한 비밀을 노래하네'

[행복한인터뷰]

[내 몸, 파르헤시아] 보사노바 뮤지션 소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방법 방법/ 약간은 낙관적으로 강해질 것/ 남들의 시선을 나에게 대지 말기/ 잘할 수 있는 일들에 열중하기/ 부드럽게 환하게 서로를 지켜보기/ 나보다 세다고 눈감아주지 말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중

소히 1집 <앵두>(2006)에 수록된 노래다.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붙였다. 일용할 양식과도 같은 가사에, 흥겨운 보사노바 리듬을 입혀서 청아한 음성으로 부른다. 그해 처음 반팔 셔츠를 꺼내 입은 날 살갗에 떨어지는 노란 햇살처럼 묵은 감각을 깨우는 기분 좋은 노래다. 아니다. 그해 처음 내리는 겨울비가 콧등에 떨어질 때처럼 시큰하기도 하다. 경쾌하거나 애잔하거나. 소히의 노래는 빙긋이 웃게 한다. 이름의 주술적 힘일까. ‘소히’(sorri)는 포르투갈어로 ‘미소짓다’란 뜻. 본명 최소희(昭喜) 역시 웃는다. 기쁘게.

데뷔 이전부터 서울 홍익대 앞 인디신을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해온 소히는 보사노바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어느 뮤지션은 “우리나라에서 소히보다 브라질 음악을 깊게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고, 어느 팬은 “완전 동안 보사노바 가수”라고도 했다. 한국 가요와 브라질 음악의 섞임이 돋보이는 2집 <밍글>(Mingle·2010)에 이어 세 번째 앨범 <데이케어>(2013)를 낸 소히는, 어느 인터뷰에서 “보사노바 말고도 하고 싶은 음악이 많다”고 했다.

“이번에 3집 음반은 제가 직접 프로듀싱을 했는데 밝은 음악만 있지 않거든요. 슬프고 우울한 면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1집, 2집 때 보사노바 이미지 때문에 시종일관 미소지어야 하고 샤방샤방해야 했어요. 그걸 벗어나니까 사람들이 무거워졌다고 느끼더라고요.”

기타를 잡은 지 10년. 소히는 외려 자신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면의 어둠을 표현할 만큼 비로소 ‘낙관적으로 강해진 것’이다. 워낙 기질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방 안에 오도카니 놓인 소녀가 음악과 사랑에 빠지게 된 걸까 싶지만 그 반대다. “혼자 있어서 음악을 만난 게 아니라 음악을 만나서, 음악만 듣느라 혼자 있게 됐다”며 웃는다.

 

흑인음악과 보사노바, 사춘기 반려음악

순수한 마음은 상처받기 쉽고/ 커다란 눈은 세상과 싸우고/ 영악하지 않으면 거친 세상에 살기 힘들 거란 생각에/ 모두 초조해지고/ 그리워라/ 따사로운 시선/ 느끼고파/ 연결된 기분/ 느끼고파/ 혼자가 아니란걸 <왈츠> 중

중1 때 <지구촌 영상음악>이라는 TV 프로를 보았다. 흑인음악이 잠깐 나왔는데 그루브한 리듬앤드블루스(R&B) 음악이었다.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듯 넘실대는 흥겨운 리듬에 단박에 사로잡혔고 그때부터 음악을 찾아들었다. 더 어릴 때 김완선의 무대를 보면 가슴이 뛴 적도 있다. 열정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할까. 기타를 처음 잡은 것은 고3 때다. 록을 좋아하는 사촌언니를 따라 라이브클럽 ‘드럭’에 갔다가 음악 하는 친구들과 가까워지면서 밴드를 하게 됐다. 고등학교 때 한 달 정도 기타를 배우고 그때부터 혼자 연습했다. 소히의 첫 그룹은 슈게이징 록밴드 ‘잠’이다.

“흑인음악은 듣는 건 좋은데 직접 하려면 힘들었어요. 감정을 오버해야 하는데 제가 과하게 표현하는 걸 못 견뎌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러다가 스무 살 때 ‘잠’에 들어가서 베이스를 쳤죠. 슈게이징(Shoegazing)이 고개 푹 숙이고 신발만 보고 연주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거든요. 록밴드지만 액션 없이 정적으로 하니까 좋았어요. 성장기의 우울함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이었죠.”

‘내 몸’에 가까운 음악은 따로 있었다. 보사노바가 소히의 귀를 두드렸다. 우연한 계기다. 서점에 갔다가 브라질 가수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의 베스트 앨범을 반값에 팔아서 반가운 마음에 샀고, 들었고, 반했다. 풍부한 리듬에 절제된 감성이 깃든, 그 건조함에 매료됐다. 음악이든 일상이든 감정을 발산하기보다 억누르는 것을 추구했던 소히다. 그 길로 인터넷 보사노바 동호회에 가입했고, 그곳에서 베이시스트를 구한다는 공지가 떠서 오디션을 보고 브라질 음악 밴드를 시작했다.

보사노바(BossaNova)는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경향’이란 뜻이다. 삼바의 복잡한 리듬에 모던재즈 기법을 도입해 세련되고 단순하게 발전시킨 브라질 음악으로, 1960년대 세계적인 유행과 더불어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국내에서는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 한영애의 <어느 날>,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 등이 보사노바 장르에 속한다. 브라질 음악으로 앨범 전체를 소화하는 뮤지션은 소히가 유일무이하다.

왜 브라질 음악일까. 음악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음악으로 청춘을 기대고 영혼을 돌보고 앨범을 채운다는 것은 호기심이나 의지를 넘어서서, 존재의 요청이다. 브라질 음악의 어떤 요소가 소히와 부합했는지 묻자 소히는 ‘쇼로’(Choro) 이야기를 꺼낸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으면서 음악도 영향을 받았대요. ‘쇼로’라는 전통음악이 있는데 되게 슬프거든요. 원래 아프리카 노예들을 통해서 브라질에 흑인음악이 들어왔으니까 역사적 배경에 따른 특유의 정서도 있겠지만, 쇼로의 영향으로 브라질 음악이 밝지만 슬픔이 있어요. 삼바를 들어봐도 리듬을 잘게 쪼개고 박자가 빠르지만 멜로디는 구슬프거든요. 포르투갈 음악 자체가 슬픔을 깔고 있대요. 쇼로가 ‘운다’라는 뜻이거든요.”

 


‘웃으면서 말하기’ 모방하고 싶다

나나나나 나나나나/ 하고 싶은 말 있어/ 나나나나 나나나나/ 에겐 슬픈 일이 많아/ 나나나나 그래 너처럼/ 모두 내 잘못인 줄 알았어/ 하필이면 왜 나였는지/ 그냥 재수가 없었어/ 나나나나 참 웃긴 건/ 하필 나인 사람 너무 많아 <나나나> 중

울음이 끝난 뒤 하늘 같은 무구한 표정으로, 소히는 아동 친족 성폭력 피해 경험을 얘기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이 정말 절망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뭔가 부자연스럽고 정상이 아닌 것 같았고 긴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해 긍정하지 못했지만 스스로 괴로워했다기보다 주위의 시선이나 매체에서 다루는 기사로 인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쉬이 상처받고 자주 위축되는 상황에 처하면서 그 사건을 많이 탓했다.

“아동 성폭력의 괴로움은 우선 내 편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가족, 친구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죠. 어머니가 알게 됐는데 구체적인 피해 사실까지는 모르고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저를 엄청 혼내셨어요. 뭐가 잘못인지도 모르고 혼이 나니까, 잘못했구나 생각했죠. 돌이켜보면 그때 엄마도 당황하신 거 같아요. 나이가 들고 학생이 되고 나서 제가 겪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내가 한 것도 아닌데 내 잘못이고 그런 게 괴로웠고, 큰 비밀이었어요.”

2007년 8월, 소히는 피해 사실을 남들에게 처음 말했다. 홍대 앞 인디신에서 친하게 지내던 ‘소규모아카시아밴드’ 멤버 송은지의 제안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에 참여할 때였다. 앨범 제작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정민아·송은지 등의 가수 외에도 글 쓰는 이들까지 6명이 위안부 관련 세미나를 듣고 학습 친목모임을 꾸렸다.

처음 모인 날, 술을 마셨는데 여성주의에 관한 이야기로 흐르면서 ‘나 이런 적 있다’며 성폭력과 성추행 얘기가 나왔다. 그 자리에서 소히도 자연스럽게 말문이 트이듯 말이 나왔다. 피해 사실을 축소시키기는 싫었고 있는 그대로 떨리는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그 뒤로는 성폭력 피해와 관련된 얘기가 나왔을 때 마치 “나는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처럼 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즈음 소히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싹텄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을 만났다. 서문을 읽는데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거의 모든 인간의 고통은 ‘말’ 때문에, 즉 지배 규범을 내면화할 때 발생한다는 것,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해나가야 한다는 것 등 구절구절이 뭉친 과거를 어루만져주는 느낌이었다. 극렬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누가 한마디만 잘못해도 가만 안 두는. (웃음)”

영화, 음악, 책 등 두루 섭렵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조세영 감독의 성폭력 피해 생존자 다큐멘터리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를 보았다. 스크린에서는 ‘같은 고통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영화에 출연한 이들은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활짝 웃으며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다. 침울하지 않은 분위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항상 울면서 이야기하는 상황이 불편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소히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매달 주최하는 성폭력 피해여성 자조모임 ‘작은말하기’ 자리에 나갔다. 

 


 

나를 피해자로 본다면, 그건 애석한 일

내 옆자리에 앉아 내 옆구릴 스치는 느물거리는 손/ 심증의 손/ 편하단 말에 존중은 없고/ 존중한단 말에 진심이 없는/ 아/ 가녀린 내 마음/ 오해가 될까 착각이 될까/ 억울해할 테지만/ 난 말할 거야 <심증> 중

진실 말하기, 이후 실존의 변형이 일어났다. 탈소심. 자기억압에서 조금씩 놓여났다. 무대도 확장됐다. 소히의 음악이 공감할 수 있는 품이 넓어졌다. 여성단체나 반성폭력운동 진영과의 인연으로 크고 작은 행사에 초대됐다. 성폭력 생존자의 증언 기록인 은수연의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북콘서트에서 축하 공연을 했고, 전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한 성폭력 피해자 글쓰기 워크숍 문집 발간 북콘서트에도 출연했다. 노래가 끝난 뒤 기타의 여음 속에서 소히는 나지막이 말했다. 저도 아동 성폭력 피해자인데요, 라고.

“제 피해 사실이 알려져서인지 관련 행사에 자주 부르시더라고요. 고맙게 가죠. 페이를 주니까. (웃음) 불러주지 않으면 제가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데 가서 얘기도 듣고 노래도 하고. 피해여성들이 자기 경험을 말하는 그 힘이 느껴져서 좋아요. 그런 자리가 비공개잖아요. 근데도 갈 때마다 느끼는 게 ‘이렇게 피해자가 많구나, 여전히 많구나’예요.”

타인의 아픔이 눈에 든다. 받은 것을 돌려줄 차례다. 과거의 자신처럼 끙끙 앓고 있는 피해여성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나도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그런데 그게, 횃불 같은 선구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닌데 막상 현실에 직면하면 이것저것 걸린다. 자기개방과 자기보호라는 상치된 두 욕망 사이에서 적어도 하룻밤은 뒤척인다. (소히에게 인터뷰를 제의했을 때 하루만 더 고민해보고 다음날 답변을 주겠다고 했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 그것도 여성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했을 때 예상되는 반응은 피해자로서의 낙인이다. 대개는 폭력을 폭력으로 보지 않고 성적 이슈로 본다.

이런 관습적 해석의 또 다른 폭력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그렇게 개인의 고통은 사회적 의미망에서 생겨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를 말 못할 사연, 큰 비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건 사실 (피해자가) 말을 안 하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해요. 음, 말을 했을 때 누가 나를 이상하게 섹슈얼하게 본다면 그건 그 사람이 미친놈이지 내가 그런 사람까지 고려해야 할 이유는 없는 거예요. 사실 저는 가진 게 없어요. (웃음) 제가 좋아서 음악을 하는 거니까 잃을 게 별로 없죠. 만약 누군가가 거부감을 갖는다면 애석한 일이겠죠. 여전히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다는 게 애석하겠지만 그것까지 제 힘으로 바꾸려는 건 지나친 욕심 같아요.”

서정주의 유명한 시구대로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뉘우치지 않을란다’ 하는 자세가 때로는 필요한 법. 소히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강함이 생기는데 더 강해지기 전에 얘기하고 싶다고, 더 강해지고 나서 얘기하면 의미 없을 거라고 했다. 소히의 진실 말하기는 확신과 의지가 아니라 불안과 긴장의 힘에서 매번 시도되는 것이다.

 

인디뮤지션의 밥벌이, 그리고 108배

마치 높은 성처럼/ 쌓인 관념을 깨뜨리는/ 모두 다 딱 쿵 짝/ 들어맞진 않아도/ 너의 모습들이 참 좋아/ 남의 고통 느끼는 상상력이 좋아/ 힘 빠르기 자랑 안 하는 네 기타가 좋아 <좋아> 중

소히는 우울한 손가락을 가졌다. 희고 가늘고 기다랗다. 아슬아슬하지만 정확하고 날렵하게 기타 줄을 탄다. 의사표현도 그러하다. 물속의 수초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어조인데 모호하게 말하는 법 없이 선명하게 전달한다. 말간 표정은 정지된 듯 섬세하게 변화하는 감정의 결을 활발하게 실어 나른다. 그 서정적인 손가락과 담대한 말하기와 갸우뚱한 감정선의 합작품으로 소히만의 고유한 노랫말이 나온다. 세 장의 앨범에 가사를 거의 직접 썼다.

이번 3집 앨범을 보면, <왈츠>는 상처를 잘 받는 작은 마음이 들어가 있고, <심증>은 성추행을 당할 때 큰소리 내지 못했던 억울한 상황을 표현했다. <투명인간>은 장기 투쟁에도 불구하고 사 쪽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떡볶이 식사>는 노점에서 1500원짜리 밀가루 떡볶이로 한 끼를 때우면서 드는 상념이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나아간다. 이런 이야기들은 평소에 조금씩 메모해놓은 생각, 감정을 관찰하고 일상의 경험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것이다.

뮤지션이고 노동자인 소히의 일상은 다채롭다. 20대부터 꾸준히 일했다. 방과후 선생님, 회사 경리직, 서빙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전직을 거쳤다. 현재는 “웹디자이너는 아니고 웹디자인 일을 한다”. 음악을 다루는 툴과 원리가 비슷해 어렵지 않게 배웠다고 한다. 주 5일 하루 5시간씩 생활비를 벌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을 한다. 음악 하는 사람이 다른 일을 하는 게 약점일 수 있다고들 하지만, 소히는 오히려 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못 먹고산다는 걸 방증하니까요. 현재 음악판이 그렇다는 걸 숨길 이유가 없는 거 같아요. 음악은 다 스트리밍으로 듣고. 스트리밍 해봤자 1원, 2원 들어오나요. 공연이나 해야지 수익이 나는데 기회가 많지 않아요. 아이돌이나 주류 가수가 아니면 신보가 나와도 음악 사이트 메인에 안 뜨거든요. 결국 버는 사람만 계속 벌고, 똑같은 시스템이 공연에도 적용되는 거죠.”

소히의 3집 앨범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3 앨범제작 지원사업’ 선정작이다. 금전적인 큰 어려움은 덜었다. 1년간 작업한 곡들을 장필순·고찬용 등이 소속된 뮤직레이블 ‘푸른곰팡이’에 보내서 앨범을 발매하는 등 좋은 동료와 작업하는 행운도 얻었다. 소히 3집 앨범은 이전의 브라질 음악에 대한 경쾌한 해석이나 소녀적 감수성에서 나아가 종교적 색채와 재즈적 분위기가 덧입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대해 본인의 해석은 좀 다르다. 대략의 곡 작업을 기타로 했고 리듬이 부각된 흑인포크 성향으로 이동했다며 이전 앨범보다 더 리드미컬한 앨범이라고 말한다.

소히는 요즘 불교에 관심이 생겼다. 종교적 접근이라기보다 성찰적 계기 정도다. 틈틈이 108배를 하는데, 목탁을 쳐주는 ‘108배 애플리케이션’을 틀어놓고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 돌아본다. 기도는 존엄을 잃지 않고 고통을 참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던가. 스마트폰을 앞에 두고 몸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온갖 잡다한 생각을 정리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어제 그런 일을 하면서 왜 그랬지 등등. 아무려나, 백팔번뇌의 팔 할은 음악이다.

“제 목적을 망각할 때가 많아요.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고 3집 앨범을 낸 건데, 좋은 반응이 없다고 상처를 받아요. 남들의 평가보다는 제 음악적 표현이 중요한데…. 만약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20명 있었는데 지금은 5명이다. 그것 때문에 슬퍼하기보다 5명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5명도 없다고 치면, 지금까지 음악 하는 게 어디야.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거죠.”


성폭력지원센터 만든 가수 ‘메리 제이 블라이즈’처럼

넌 내가 보이지 않나/ 보이는데 못 본 체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순간/ 왜 우린 투명해져야 하는가/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 그렇게/ 그렇게/ 안아달라/ 애기하자/ 말하고 싶어/ 우리는 사랑했어/ 사랑을 잊으려고 하는 바보넌/ 투명인간? <투명인간> 중

피오나 애플은 12살 때 당한 성폭력의 기억을 음악으로 승화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재즈아티스트다. ‘힙합 솔의 여왕’으로 불리는 메리 J. 블라이즈는 미국 뉴욕의 빈민가 출신으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성폭력, 약물중독 등 온갖 역경을 딛고 최고의 뮤지션으로 성공한 그녀는 자신의 성장통을 음악에 고스란히 표현한다.

소히에게 특별한 뮤지션들이다. 특히 메리 J. 블라이즈는 음악과 삶에서 두루 존경한다. 그녀는 학대받는 여성들의 교육과 경력 개발 등 성장을 돕는 여성발전지원센터를 설립했다. 피오나 애플은 미디어의 선정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앞에서 늘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음악을 통해 자신을 담는 걸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인 체험에 대한 선정주의적 시각에서 음악을 분리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왔다고 전한다.

이처럼 유명한 외국 가수들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소히는 큰 자극과 위안을 받았다. 피오나 애플은 피해 사실을 가사에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소히 역시 피해 사실 때문에 음악의 움직임이 있었고, 그게 음악의 한 흐름인데 피해 사실을 떨어뜨려놓고 표현하거나 굳이 없었던 일처럼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말했다. “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해 동안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이다. 다수의 경험이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도 경험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수는 없는 일이다. 소히의 음악에는 피오나 애플과 메리 J. 블라이즈의 애절한 음성이 숨 쉰다. 밝게 웃는 성폭력 피해여성들과 떡볶이 노점상 아주머니와 콜트·콜텍 노동자들과의 경험이 존재한다. 이 사회에서 투명인간으로 살아가지만 소히의 눈에는 보이는 그들과의 공동 창작물이 소히의 음악이다.

흑인음악에서 슈게이징록을 지나 쇼로의 영향을 받은 보사노바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된 오랜 슬픔의 지층을 탐사하면서 소히는 어느새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레비나스)이 생겼다. 하고 싶은 음악을 추구하고, 하고 싶은 말을 설파하는 힘이 길러졌다.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 것이다.

“음악을 통해서 제 솔직한 생각과 마음을 알리고 싶어 요. 누구에게나 각자의 슬픔이 있잖아요. 그 슬픔을 저의 슬픔으로 위로하고 싶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져왔던 선입견이나 통념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음악을 통해 만들고 싶어요.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치유되는 사람은 저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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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월간지 <나들>에서 '내 몸 파르헤시아'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소히가 3번째네요. 파르헤시아는 '진실말하기'라는 뜻으로 성폭력피해여성이 몸의 진실-삶의 얘기를 풀어가는 인터뷰입니다. 인터뷰이 요청에 따라 온라인 공개를 선택합니다. 소히는 공개를 해도 좋다고 해서 싣습니다. -> 본문보기 

* '내 몸 파르헤시아'에 인터뷰를 원하는 분 있으면 메일로 보내주세요. varyeyes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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