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쿨파스텔 - 논픽션 쓰기 처음학교 개강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논픽션 쓰기 처음학교> 신청 링크 : http://www.frente.kr/product?pa=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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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말하기 공부

[은유칼럼]
새봄 새 학기, 급식 메뉴도 맛있고 문화체험 행사도 많아 기대에 들뜬 소년은 선생님의 다급한 부름을 받는다. 엄마의 부고 소식이다. 교통사고로 엄마를 떠나보낸 때가 열다섯.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나이가 있진 않겠으나 검은 상복이 안 어울리는 연령대는 있다. 그 소년은 스물한살이 되어 그날의 상황과 심정을 글쓰기로 풀어냈고, 어린 상주에게 감정이 이입된 동료들은 숨죽였다.

얼마 전 글쓰기 수업 장면이다. 그가 낭독을 마치자 예의 침묵이 한동안 감돌았다. 합평은 늘 긴장된다. 이런 경우처럼 상실 경험이라면 더하다. 글이 묵직하니 말이 더디 터진다. 적절한 위로와 지적의 말을 찾느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불쑥 삐져나온 자기 기억과 대면하느라 저마다 머릿속이 바쁘기도 한 거였다.

이 침묵, 이 머뭇거림을 나는 한때 견디지 못했다. 글쓴이가 울컥해 낭독을 멈추면 내가 대타로 나서 읽어주었다. 낭독 이후 의견이 없으면 말의 물꼬를 트려고 애썼다. 그럴수록 표현이 궁했다. 가령, 친족 성폭력은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삶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이다. 별일 아니라고 말하기엔 별일이고, 별일이라고 말하기엔 별일이 아니어야 산다. 삶의 아이러니 앞에서 말은 무력하다. (듣고 나서 무어라 말해야 좋은지 당사자에게 물어보았더니 “믿고 말해줘서 고마워”라고 했다.)

한번은 나도 상념에 빠져 주춤하는 사이 다른 동료의 발언으로 토론이 진행된 적이 있다. 왜 꼭 먼저 나서려 했던가 싶어 민망했다. 한발 뒤로 물러서니 침묵의 다른 기능이 보였다. 침묵은 정지의 시간이 아니라 생성의 시간이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하지 않고자 언어를 고르는 시간, 글을 쓴 이의 삶으로 걸어들어가 문장들을 경험하고 행간을 서성이고 감정을 길어내는 활발한 사고 작업의 과정이다.

나는 내 시행착오를 학인들과 공유했다. 침묵을 견디는 법, 그리고 글에 대한 평가와 삶에 대한 평가를 구별하는 방법을 얘기했다. 만약 어린 상주의 글을 읽고서 ‘부모 없이도 잘 자란 훌륭한 사람 많다’고 말하는 건 삶에 대한 평가다. 덕담 같지만 압박이다.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끌고 오는 게으른 태도다. 엄마가 없어서 언제 제일 힘들었는지 결정적인 한 장면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건 글에 대한 평가다. 한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려는 노력의 발로다.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하다. 글에 대한 평가가 더 구체적이고 다정하다. 해결사가 아닌 듣는 사람의 위치를 지키면 된다.

그날 발표자 학인은 후기를 남겼다. “무슨 용기로 엄마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했는지(…) 아마 정리를 하고 싶었던 거 같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글 쓰는 작업이 처음이라 읽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다며 그는 퇴고를 다짐했다.

읽고 쓰고 말하고 고치기의 반복. 이 고된 노역을 우리는 왜 자처하는가. 글쓰기의 목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정리해본다. 삶이 고차함수인데 글이 쉽게 써지면 반칙이다.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고심하다 보면 자신을 스스로 속일 가능성이 줄어들고, 몸을 숙여 한 사람의 내면의 갱도에 들어가는 훈련으로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모든 사물과 현상을 씨-동기-로부터 본다”(김수영)는 것,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타인의 처지가 되어보는 일, 사람살이에 꼭 필요한 이것을 교육받을 기회가 드물었던 우리는 글쓰기를 핑계 삼아 공부하고 있다. 꼰대발언, 혐오발언이 승한 시대에 말을 지키는 것은 나를 지키는 것이기도 하니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4097.html?_fr=mt5#csidxe2d3af335abd7509266efb7c208a3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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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없는 아이들을 위한 글쓰기 특강

[사람사는세상]


“대입시를 위한 방편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자기를 이해하는 수단, 타인과 관계를 잘 맺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글쓰기를 저희 아이들에게 (…)” 

연초에 지역의 한 고등학교 교사에게서 메일이 왔다. 교내 책 쓰기 동아리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 요청이다. 아이들을 위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행간에 가득했다. 날짜를 택일했다. 강연 때 프로젝터 같은 영상 기기를 쓰는지 묻기에 강의안을 메일로 보내주며 종이 인쇄를 부탁했다. 파워포인트로 꾸민 자료를 커다란 화면에 띄워놓고 몇 가지 키워드와 이미지로 설명하는 게, 예능프로그램 자막처럼 화면에 공히 ‘느껴야 할 것’을 제시하는 게 나는 영 어색하다. 인문학 정신에 위배된다고 여긴다. 타인과 관계 맺는 방편으로써의 글쓰기 공부니까 더욱이 아이들과 얼굴 보고 교감하고 싶었다. 

오후 1시, 강연이 시작되자 진짜로 아이들이 나만 쳐다봤다. 32명, 예순네 개의 눈동자가 쏟아졌다. 원했던 시선이었으나 몸이 살짝 조여왔다. ‘좋은 삶을 위한 글쓰기 실전’ 준비한 내용을 말하면서도 헷갈렸다. 과연 아이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일까? 다행히 아이들은 뭔가를 받아 적었다. 내 목소리와 히터의 웅웅거리는 기계음이 뒤섞여 머리가 띵해지고 아이들 서넛의 고개가 꽃대처럼 꺾일 무렵, 종이 울렸다. 난 잠깐 쉬자고 했다. 아이들 절반은 책상에 우르르 엎드리고 몇몇은 교실 밖으로 나갔다.

“수업시간에도 엎드려 잔다”는 교사 친구들의 오래된 증언이 스쳤다. 직접 목도하니 플래시 몹이라도 하듯 상반신이 일제히 엎어지는 장면이 기괴했다. 쉬는 시간에 자는 건데도 철렁한다. 내가 졸립게 했나 싶어 민망하고 얼마나 잠이 부족하면 저러나 싶어 애잔하다. 그러고 보니 ‘방학(放學)’인데도 아이들은 교과서를 놓지 못한 채 꽉 끼는 교복을 입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 붙박여 있다. 안쓰러워 말을 건다. “여러분, 잠이 많이 부족해요?” 자던 아이까지 부스스 일어나 말꼬리를 늘이며 합창한다. “네에~.”

강의안을 덮었다. 묻고 싶은 것을 포스트잇에 써 칠판에 붙이도록 했다. 아이들이 들썩이고 말들이 피어났다. “나이가 몇 살이에요?” “오늘 뭐 먹었어요?” 같은 사생활 탐구부터 “작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나요?” “글 마무리가 어려워요.” “장르소설 잘 쓰는 법 알려주세요.” 같은 글쓰기 고민까지, 서른두 가지 질문과 대답이 핑퐁게임처럼 빠르게 오갔다. 그중 질문의 왕은 이것이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물음표까지 달았다. 정말 궁금한 것이다. 이 총체적이고도 근본적인 물음에 난 서슴없이 답했다. “나도 그거 땜에 맨날 울어요.”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깔깔거렸다. 졸음과 웃음과 질문의 여운 속에 학교를 빠져나왔다. 담당 교사는 시각 자료 없는 수업을 학생들이 힘들어하는데 ‘말’로만 3시간 진행한 강의가 잘 끝났다며 안도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쩐지 입이 부끄러워졌다. 

글쓰기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친구와 떠들면 혼나고 수학 문제 하나 더 풀어야 산다. 글 쓰려면 세상을 읽어내는 자기 관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아이들은 뒹굴뒹굴 딴짓하며 생각과 취향을 만들어갈 시간이 없다. 방학 없는 십대를 보낸다. 비입시용 글쓰기 특강을 열었지만 아이들은 입시용 자기소개서에 써먹을 신이 내린 첫 문장을 간구한다.

미안한 노릇이다. 획일적 입시 환경에서 창의적 인재가 돼야 하고 ‘국영수’는 기본이고 지적인 글발까지 장착해야 한다. 양립하기 어려운 이 분열적 상황으로 아이들을 몰아넣은 어른으로서 조금이라도 숨구멍을 열어주고자 담당교사는 특강을 준비했고 나는 목이 쉬어라 번드르한 말들로 180분을 채웠고 그 시간을 아이들은 굽어지는 몸 세워가며 경청했으나, 개운치가 않다. 

이 열심과 열정이 우리가 가야 할 냉혹한 현실에 존엄의 불씨 하나 지필 수 있을까.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아이의 물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원망처럼 마음을 어지럽힌다.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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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피해자를 위한 책 - 보통의 경험, 아주 특별한 용기

[글쓰기의 최전선]

이걸 다 읽어야하는데머리맡에 책을 두세 권 늘어놓고 손에 한 권을 꼭 쥐고 이불속으로 쏘옥 들어간다. 나의 취침 의식이 되어버린 일상의 풍경이지만 6월 들어서는 더 쫓겼다. 새로운 동료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기로 결정한 후부터다. 관련 서적 6. 베개보다 표면적이 넓다. 그런데도 책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꿈의 세계로 빠져버리곤 했다. 그럴수록 마음이 다급했다. 경험과 정보와 감각 면에서 나는 한참 뒤떨어졌으니 분발해야하지 않겠는가 싶어서다. 주변에서도 걱정했다. 내가 성폭력경험자들과 글쓰기 수업을 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경험이 없는데 그들과 같이 수업할 수 있을까?”

 

나에게 말을 건 이들은 당연히 내가 성폭력 경험이 없다는 전제 하에 말을 시작했다.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있어도 말 못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그랬다. 일상에서 마주치고 같이 책 읽고 말을 나누는 여성들에게서 성폭력 경험자의 가능성은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다. 당연히 없는 듯이 말했다. (마치 모든 사람이 대학을 다녔음을 전제하고 초면부터 학번과 전공을 묻는 사람들처럼) 그런데 수업이나 세미나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만나는 이들이 많아지고 관계가 깊어지면서 여성이기에 겪어야하는 아프고 내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언젠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는 친구가 말해주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아서 그렇지 여성의 40%는 성폭력을 경험한다고. 그래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나온 '성폭력피해자를 위한 DIY가이드'북 이름이 <보통의 경험>이란다. 네가 수업을 하든지 모임을 가든지 그 무리에서 최소한 두 명은 있다고 생각하면 돼.” 한숨이 새어나오고 고개가 숙여졌다. 고통이 만연한 세상에 적응하는 일은 너무도 어렵다. 쉴 틈과 빈 틈이 없다. TV나 뉴스에 선정적으로 보도되는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에휴, 저 아이 (혹은 저 여자) 이제 어떻게 사니무심코 동정을 실어 말을 보태는데, 그 말이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현재진행형 삶을 살아가는 성폭력경험자의 고통을 들쑤셨을 지도 모른다.

 

인권감수성과 젠더감수성은 비례하지 않는다. 아니다. 젠더감수성 낮은 사람을 인권감수성이 높다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 아닌 자, 휴머니스트라 할 수 없듯이 말이다. 나는 실존의 고통에 꽤나 연연했고 여성의 고통에 절규했어도 성폭력 경험자의 고통에는 무심했다.  나의 무지가 확인될수록 수업이 걱정스러웠지만 애초에 글쓰기 수업의 취지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구원으로서의 글쓰기. 다른 내가 되기 위한 글쓰기. 다른 수업에서도 그랬듯이 나는 듣는 자이면서 배우는 자이다. 차이가 있다면, 배우기 위해 더 열렬히 듣는 자가 되리라는 것. 몰입하여 듣다보면 더 잘 배울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니체 말대로 들을 귀가 있는 자가 되기 위해, 듣는 신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철저히 나의 몫이다.

 

지난 주 토요일 622일에 첫 수업을 마쳤다. 십대가 세 명이나 왔다. 수유너머R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20대 동료들과 노는 법은 얼추 배워 가는데 이제 십대로 연령을 낮춰야 한다. 교실에 들어와서 눈을 잘 맞추지 않던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쉬는 시간에 말을 걸어주었다. “선생님, 스누피 닮았어요.” “오잉? 스누피? 성격 좋아 보인다는 얘길 하고 싶구나. 근데 스누피는 너무 안 섹시한데…^^다시 수업이 시작되고 내가 떠들고 있는 사이 내 페이퍼에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들을 만났을 때 깨지기 쉬운 유리잔 다루듯이 조심조심 해야하나, 성폭력경험자로 대상화 하고 범주화 하는 것이 옳은가’ ‘인간 보편의 고통의 틀로 여성들의 고통을 이해해야하는 게 낫지 않을까수업전에는  나의 태도를 두 갈래로 설정하고 고민했다. 지금은 두 경우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을 꺼내고 다루고 익숙해지는 일이 대범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나의 윤리를 하나로 정해놓고 쉽게 타협하려던 마음을 접는다. 고통은 타자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책이든, 음악이든, 사람이든. 고통을 들어주고 같이 시간을 보내주어야 한다. 글쓰기 수업을 하는 동안 우리는 섬세하게 결을 맞춰가면서 서로의 타인이 되는 것이다. 다만 상황의 특수함, 사건의 각별함, 실존의 절실함을 간과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정체성 규정이 아니라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고 발견하는 시간. 한 계절 동안 함께 수업을 하고 나면, 서로가 이전과는 조금씩 달라져 있기를, 그것이 책이든 사람이든, 이전에는 없던 친구가 생겨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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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동박물관 - 책으로 되돌아본 '독거노인 5명의 인생史

[비포선셋책방]
책으로 되돌아본 '독거노인 5명의 인생史'
 

(서울=연합뉴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사는 독거노인 5명에게 7년간 반찬봉사를 해온 자원활동가들이 노인들의 인생사를 풀어 쓴 책 '이문동 박물관'이 지난 1월 나왔다. 작년 말 노인들과 자원활동가들이 사진관에서 함께 프로필 사진을 찍었고, 이는 '이문동 박물관'에 실렸다. 2013.3.22 

 
기사 전문 보기 : 자원활동가들 '이문동 박물관' 출간…"한분 한분이 보물" (연합뉴스) 
                     반찬 배달 하며 엮은 '할머니들의 역사' (경향신문)

 

"선생님, 우리 얘기 나왔어요."  봄이에게 문자가 왔고 기사가 링크돼 있었다. <이문동박물관> 책이 나왔다. 지난 가을, 이 책을 만들기로 계획이 잡히고 반찬 봉사를 해온 친구들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다. 어떤 책을 만들 것인가 기획하고, 스토리텔링을 하고, 초고를 쓰고, 같이 읽고 고치고, 방향을 잡고 다시 쓰고, 또 고치고. 이메일로 원고를 검토하고, 일요일에 홍대 카페에서 방 잡고 앉아서 제목을 달고, 내가 바빠 나가지 못하면 일 하는 사무실에서 와서 교정을 보고 그렇게 마무리 된 책이다. 

 

어르신의 삶을 담는다는 것. 수급자 처지에 놓였고 반찬을 얻어 먹어야했던 분들이다. 생의 말년, 경제적 몰락을 이유로 삶 전체가 폄훼되기 십상인 분들,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존재체험을 오롯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남루해져버린 그 분들 삶이 살아온 세월의 최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가 온당한가.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다가 책 작업이 끝났고, 막바지에이르러서 어르신들의 삶에서 '오래 되면 스스로 밝아진다는 존구자명(存久自明)'의 명제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번 작업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한 사람의 생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거울처럼 맑아져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게 된다는 점이다. 비단 인터뷰이였던 어르신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같이 작업한 친구들도 내겐 하나의 맑은 거울이 되어주었다. 거울을 통해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하나의 우주가 있다. 엄마에게 얻어 먹은 밥, 어르신들에게 배운 사투리, 책에서 본 글귀, 가슴에 묻은 말들, 손에 남은 꽃잎의 촉감, 친구에게 주입된 음악, 조금 웃겼던 농담들...무수한 속성들로 채워진 나. 타인의 지분으로 가득한 나. 나는 내가 아닌 반전이 일어나는 그 지점이 좋다.

 

함께 작업하면서 나와 속성을 공유한 친구들, 언뜻 나의 말투가 묻어있는 그들, 그들의 말버릇을 흉내내는 나. 정든 친구 한 명이 내일모레 호주로 출국한다. 회사 그만 두고 장기여행 떠난다. 어제 송별회를 위해 만났다. '다녀와서 내 삶은 어떻게 될지 불안해요' 라고 말하는 그에게 '현재에 집중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을까'말했다. 길에게 길을 물어가며 가라. 니체 투로. 나를 반찬팀 친구들과 연결해준 미남브로커 로맨스 조도 늦게 합류했다. 그는 이번 책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유미 말대로 '사진 좋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던 그 문제적 사진을 찍은 이다. 홍대 문학동네 카페에서 만나서 시집을 사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인근 술집에서 이야기 나누고 이별의식을 치렀다.    

 

 

(은유,로맨스 조, 유미, 소연, 봄이)

 

 

 

 

술집을 나서 집에 가는 길, 봄이가 스마트 폰으로 어떤 글을 보여준다. 글 쓰는 작업하다가 힘들 때 쓴 글이란다. 선생님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나도 보고 싶었다. 메일로 왔다.

 

12.11.23


할머니가 미웠고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 원래 모임날짜까지 글 완성본을 들고가기로 했는데 대안 방법만 주르륵 나열해놓고 뺀질거리지 않은 척 보여주기를 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밤새 괴로워하며 만들어 왔는데 내 뻔히 보이는 게으름이 너무나 부끄러워 미쳐버릴 것 같았다. 물론 정신적 상태가 쓸 수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 어떻게든 붙잡고 씨름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나 쉽게 '포기' 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자신이 싫었다. 


은유 선생님은 화를 내시진 않으셨다. 조용히 단호하게 '이런식으로 대안을 쓰지 말고 끝까지 써보도록 해요.'라고 모두에게 권장하는 말처럼 하시면서 사실은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셨다. 선생님은 나의 포기와 게으름을 관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조용하면서도 엄하게 하신 말씀이 거울이 되어 나를 뒤돌아 보게했다. 미친듯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선생님의 그 싸늘한 표정이 가슴을 후볐다.

그런 후 다음 모임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 오전에 그 글을 쓰고 있을 때였다. 활기차고 발랄한 목소리로 "봄이 나야~"라고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전화를 받자마자 선생님의 그 따뜻함이 느껴져 눈물이 울컥 날 뻔했다. 선생님께선 잘 안써지면 구조를 도와줄테니, 같이하면 되니까 걱정말고 우선 써내려가라고 출고해주셨다. "내가 도와 줄께."라는 말씀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선생님께서 나의 그날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전화를 하셨다는 그 말씀에 또 소리없이 감동했다.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나 혼자의 힘으로 써보겠다는 의지가 더 생겼다. 선생님의 말은 위안과 힘을 주었다. 은유 선생님이 정말 감사해서 어떻게 감사함을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선생님 앞에만 서면 사실 조금 언다.
김사인교수님 때와 비슷하다.
너무 감사해서 어떻게 표현을 해야할지, 무엇을 해드려야 헐지 통 감을못잡아 딱딱하게 굴때가 많다.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생님의 첫 책이라며 주신 <올드걸의 시>는 선생님을 닮아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선생님의 이야기가 갊겨있어서 궁금하다. 이틀 밤 꼬박 새서 글을 완성하고 받은 <올드걸의 시> 선물. 선생님께 받자마자 많이 표현은 못했지만 감격해서 눈물이 날뻔했다.

내가 글응 쓰는 것이 지겹지 않느냐는 물음에 선생님은 "난 글쓰는게 지겨웠던 적이 없어. 글을 쓰면서 너무 괴로운데 그 이상으로 희열이 있어." 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을 알고있다.

설레인다. 설레인다.
선생님의 만남과 출판으로인해 내 인생이 바뀌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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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_ 보고서

[글쓰기의 최전선]

 

20113<글쓰기의 최전선> 1기를 시작했고 현재 5기 과정을 진행 중이다. 연구실 외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등에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다. 매 강좌마다 10~20여 명의 학인들과 책을 읽고 글을 써서 함께 읽으며 말을 나누었다. 나는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이전의 나와 달라졌다. 마치 아이를 낳고 다른 존재가 되었듯이, 몸만 알아채는 변화가 있고, 구체적으로는 읽는 책이 달라졌고, 만나는 사람이 달라졌고, 살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달라졌다. 한 가지씩 써보려 한다.

1) 어떤 사람들이 오는가

- 오전수업: 주로는 30~50대 전업 주부들이다. 강사, 사업가, 활동가가 있다. 아이 하나 둘 키우면서 육아문제로 고민한다. 결혼 전 일기라도 썼던 사람들,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 문학이나 미학 등 전공자. 경제적인 토대는 안정적이나 가족제도에서 자기 영혼이 기를 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탄과, 자아가 실현되는 삶에 대한 동경을 안고 산다.

- 낮수업: (연구실 수업) 대학생, 취업준비생, 취업포기생, 소설가/ 동화작가/ 문학평론가 지망생, 언론사 기자, 휴직 교사, 판사, 공무원, 영화연출스탭, 대학원생, 여성운동가, 주부, 백수, 회사원, 탈학교 학생, 방송작가, 사진공부 하는 사람.

- 저녁수업: 직장인, 활동가, 백수, 대학생, 주부

2) 어떤 욕망이 있는가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 글쓰기라는 자기표현 욕구는 마치 세계공용어 영어에 대한 갈망과 유사하다. 영어를 잘하면 좋은 점이 많다. 어디서나 인정받고 폼 나고 편하고, 풍부한 삶이 보장된다. 글쓰기도 그렇다. 사람들은 글쓰기를 유창하게 구사하기를 원했다. 논문을 좀 더 잘 쓰고 싶고, 보고서를 잘 쓰고 싶고, 아이들 선생님에게 메모 한 장을 보내도 멋지게 쓰고 싶고, 궁극적으로는 책을 한권 내고 싶어 한다. 글쓰기는 언어를 지배하는 일이다.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구체화하고 힘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글쓰기를 배우러 올 때의 마음가짐이, 더 높아지기 위함이지 더 낮아지기 위함은 아니다.

3) 어떤 글을 써 오는가

4기 기준. <전태일 평전>을 읽고 20청춘의 이야기를 써온다. 문태준의 <가재미>는 내 생의 잊지 못할 인연을 떠올리고,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본문을 압축하면서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정의해본다. 절망의 골수분자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을 읽고 소수성,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를 읽고 사물이야기, 이성복의 <남해금산>에서 치욕의 기억을, <김예슬 선언>의 틀을 빌어 나의 선언을 작성한다. 마지막으로 관심 있는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또 다른 나를 만나러 세상으로 펜을 향한다.

글쓰기 내용은 혼자만 끙끙 알던 것이다. ‘행복하세요’ ‘부자되세요의 구호에 눌려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사건들, 자기가 생각한 자신의 비정상성들, 내밀한 부분을 들춰서 쓴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얘기라며 글로 써오는 경우가 많다. 왕따, 성추행, 가정폭력, 실연, 당사자 혹은 부모의 이혼, 소중한 이의 죽음, 자식과의 불화, 드러나지 않는 질병 등 크고 작은 고통과 수모의 경험을 다룬다. 일명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4) 어떤 변화가 있는가

글을 쓰고 나면 후련해 한다. 안색이 밝아지고,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한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경우도 있다. 1기 사람들 주축으로 문학세미나가 출범하기도 했다. 한 친구는 10주 동안 썼던 글을 보충하고 다듬고 추가 원고를 작성하여 30세를 기념하는 책을 엮는다고 나에게 축하의 글을 부탁했다. 한 학인의 고백. “첫 수업 시간 각자의 소개를 듣고 멍~했었어요. 다양성 보다는 일관성을 좋아하는 제가 10주를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 하고요..ㅋㅋ 그런데 10주가 10배속으로 흐르더군요. 수업시간 내내 정말 행복했었습니다..”(후기) “글쓰기 수업 들으면서 내가 얼마나 편협한 생각에 갇혀 있는지 알았어요.” 등등.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학인들의 수업만족도는 높다. 그 이유는 말을 들어주고 말을 만들어가는 관계가 갖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말하고 싶어 한다. 자기언어가 부재한 상황에서 말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를 가나 그렇고 그런 시시콜콜 잡담 수준의 이야기를 나눠도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을, 글쓰기라는 고된 노동으로 채우고 그러면서 자기 언어를 발명 쾌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5)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한겨레>신문 안수찬 기자는 글쓰기는 자아 노출의 공포와 열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일이라고 했다. 글쓰기 수업하면서 절감했다. 특히 40~50대 주부들의 경우가 어렵다. 자기를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존재 그대로 내보인 경우가 없어서 자기(의 누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직면하고 서술하고 타인에게 내놓는 일을 한없이 어색해 한다. 남에게 나를 이야기하는 데 필요한 낯을 갖지 못한 사람들, 글 낯가림이 심하다. “오늘도 수업에 나올까 말까 고민하다가 왔어요는 기본이고 글을 써놓고 게시판에 올렸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뭔가 묘한 열정이 이는 걸 느껴요.” “글 쓰면서 밤을 새본 게 20년 만이에요.” “피곤하고 스트레스 쌓이는데 기분이 좋아요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동안 글을 안 쓰고도 살았기 때문에 글쓰기라는 귀찮은 짓을 습관적으로 피하지만, 일단 쓰기 시작하면 그 쾌감에 끌려 본능적으로 잡는다. 글쓰기는 진실과의 대면이다. 자기가 고통을 뻥튀기 해왔음을 알기도 하고, 자기의 게으름을 적나라하게 보기도 한다. 자아의 단단한 벽을 직시하는 일에 단련이 되기까지가 고비다.

6) 왜 자기이야기를 써야하는가

자기 이야기를 쓰라고 하면 생의 곡절을 간증하는 시간으로 오해한다. 그건 아니다. 수업시간에 내가 글감이 자기에게 있다고 강조하는 뜻은 자기 안에 타자를 발견하라는 뜻이다. 근데 대부분 서툴다. 학창시절 글짓기 할 때는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게 아니라 나무, , 가을에 대해서 쓰라고 한다. 평소 관찰한 적도 없고 관계 맺지도 않은 그것들에 대해서 무얼 쓸 수 있을까. 그렇게 감상적이고 알맹이 없는 글들로 언어를 치장하는 글쓰기를 시작하다보니 사람들은 자기감정에 집중하는 법을 모른다. 자기에게 중심을 두는 태도를 배우지 못했고, 오직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만 신경 쓴다. 그걸 벗어나는 의미로서 자기에게 집중하는 시간, 자기를 위한 글쓰기가 필요한 거다.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너를 통해 판단한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들려준다. 롤랑바르트의 글쓰기도 좋은 모범이다. 바르트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면 그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쓰는 게 아니라 내가 그걸 왜 좋아하는지 자기 욕망과 감정에 고도로 집중했다. 글은 자기로부터 나온다. 글이 안 써질 때는 어떻게 이겨내느냐는 물음에 이성복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글을 못 쓸 때는 글을 못 쓴다는 것을 글로 쓰면 글이 돼. 글을 쓰기 위해 딴 짓을 찾으면 글을 못 써...시는 왜 시가 안 되는가를 얘기하면 시가 되지만 시인 것을 찾으려면 백발백중 딴 거라. 단적인 예가 김수영이지.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나는 늘 왜 이 모양인가 하잖아. 그래도 시가 되잖아. ‘도 그렇잖아. 시는 누구 때문에 쓰나. 나 자신 때문에 써. 그걸 늘 명심해.’

7) 치유불가능성의 글쓰기

글쓰기의 최전선이 치유하는 글쓰기 아니냐는 말을 듣는데, 사실 난 당황스럽다. 치유라는 말은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눈감게 하는 단어라고 생각해서 가급적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웰빙이 그랬던 것처럼 치유와 힐링이 상품화되는 세상은 그만큼 대다수가 불행하고 불안하다는 증거다. 나로서는 사는 동안 고통 없기는 힘들고,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치유보다는 치유불가능성을 알아가는 것(으로서의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치유글쓰기가 아니라 사유글쓰기. 이성복 시인의 말을 빌자면 비를 안 맞으려면 간단하다. 오두막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나 비를 안 오게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고통박멸이 아니라 오두막 짓기에 가깝다. 여럿이 모여서 힘 합쳐 나무패고 땀 흘리고 수박 나눠 먹고 그러면서 시간 보내기다. 남의 얘기도 듣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환상 때문에 오는 괴로움은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8) 온갖 일 겪고 나니 너에게 미안해

글쓰기 수업에 다양한 연령층이 모인다. 20대 청년의 글을 통해 50대 여성은 아들의 깊은 고민을 이해한다. 육아의 괴로움을 터놓는 주부의 글을 접한 여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엄마도 나를 이렇게 키웠겠구나 생각해요.” 25세 남자 대학생에게 그리 유쾌할 것 없는 나이든 사람들의 글이 지겹지 않느냐고 물으니 말했다. “우리엄마가 할머니 때문에 고생한 거는 이해할 수 있잖아요.” 남자는 여자를 아이는 어른을, 다른 각도 다른 경험을 통해 접한다. 그렇게 다양한 층위에서 삶을 경험하고 나면 조금 타인에게 관대해지고 자기의 번뇌는 줄어든다. 4기 수업의 슬로건이 되었던 문장 온갖 일 겪고 나니 너에게 고마워는 글쓰기 수업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나타내어 아예 문집 제목으로 삼았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하는 존재라면, 그 배움은 자기편견을 극복할 수 있기 위함이어야 하고, 그러한 자기성찰의 (저비용 고효율) 지속가능한 수단이 바로 글쓰기다.

9) 어떤 느낌

남의 글을 읽고 평한다는 것은 남의 삶에 관여하는 일이다. ‘아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다. 그래서 글쓰기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진이 빠지고 힘들었다. 끝나면 어쩌자고 슬펐다. 일일이 읽고 코멘트 달아주고 고쳐주고. 눈 아프고 팔 쑤셨다. 그래도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자기 글의 열렬 독자가 되어줄 때라야 글을 쓰게 되니, 글을 쓰게 하는 자로서 나의 역할은 써온 글을 꼼꼼히 읽고 공감하는 일이 시작이자 전부였다. 삶이 엮이고 관계가 끈끈해지고. 글쓰기 수업 이후 나의 술친구는 거의 글쓰기 동료들이 됐다. 그리고 나는 진리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탐구하는 철학책을 읽는 대신 개별자를 통해 입장의 진실을 말하는 문학에 빠져들었다. 요즘은 소설과 시만 읽는다. 잘 읽힌다. 문학을 읽을수록 글쓰기가 자기언어를 찾는 일이라는 생각이 절박해졌고 더 자기언어가 필요한 사람들과 글쓰기를 나누고 싶었다. 노동-르포 글쓰기는 그런 시도로 이뤄졌다.

나도 수유너머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수유너머는 전혀 불온하지 않다. 외려 중산층 대상 인문학장사를 하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연구실이 분화되고 내가 현재 있는 수유너머R에도 예전보다는 덜 하지만 문화적 자본과 시간과 열정을 간직한 이들이 많이 온다. (먹고 살기 빠듯한 사람은 자기공부에 돈과 시간을 쓰기 어렵다.) 어떤 대화도 잘 통하고 세련된 감수성과 비슷한 상식을 가진 그들과 노는 일은 꽤나 유의미하고 재미지다. 그런데 동류와 어울리는 즐거움에 빠지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것이고 대안도 없다. 어디까지나 느낌 층위인데, 나는 직감에 의존한 삶을 살아왔기에 느낌에 복종한다. 지금은 더 낯선 사람, 더 절실한 사람과 글 쓰고 싶다는 간절함이 스물스물 일어난다. 높아지기 위해 온 사람들과 더 내려가고 싶다. 삶의 최전선으로.

* 연구실에서 동료들에게 발표하기 위해 쓴 글. 긴 메모 성격이라 더 써보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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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해야 한다

[차오르는말들]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아서 좋겠다." 언제부턴가 꽤나 자주 듣는 말이다. 며칠 전에도 들었다. 지난 토요일 오후에 <피에타>를  보고 연구실 시 세미나에서 이상시집을 읽고,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선배를 잠깐 만나서 영화 얘기를 - 황금사자상은 김기덕이 탈 것이 분명해보인다고 대감동을 전했더니 나한테 그런 거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아서 좋겠다. 니가 부럽다. 영화 보고 시 읽고 좋은 사람 만나고. 남들이 보면 윤택하고 풍부해보이는 일상이다. 보이는 진실도 있지만 그런데 이렇게 살기 위해서 포기한 것도 있다. 경제적인 안정. 정규직의 안락. 일상의 고요 등등은 반납했다. 나는 매우 잘 놀지만, 늘 불안과 대결하면서 논다.   

도봉여성센터에서 글쓰기수업을 시작했다. 글쓰기수업 같이 했던 민우회 후배가 소개해줘서 하게 됐다. 5월 쯤인가 의뢰가 왔다. 나는 일박이일 망설였다. 이유는 지리적 조건. 도봉구가 너무 멀다. 아침 10시에 수업인데 애들 등교시키고 갈 자신이 없었다. 마포구 쯤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기를 바라지 말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너무 편안함과 익숙함에 길들여지지 말자. 해야겠다. 나는 강의료를 받지만 수강생들에게 무료강좌니까 내가 만나는 대상들이 기존의 학인들과 다들 것이고, 평범한 주부들의 글쓰기는 내가 해야할 일이라는 임무의식이 들었던 거다.

9월 첫주 수요일. 모처럼 새벽에 일어나 머리 감고 물기도 채 마르기 전에 5센티 구두 신고 출근 기분 내면서 콩나물 시루 지하철에서 슬램하면서 도착했다. 첫 수업 시작하고 한참이나 당황했다. 나와 눈을 마주쳐주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계서서. 그동안 연구실에서 수업할 때는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다. 연구실을 찾아오는 이들은 배움의지로 눈동자가 반짝거렸는데, 그녀들은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염려하며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수업교재를 바꿔야하나 집에 오는 길에 고민했지만 그냥 하기로 했다. 어떤 일을 해보기 전에는 자기도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법이니까. 글쓰기에 자신 없어서 쩔쩔매다가 밤새서 글쓰는 재미에 빠져들었던 일산학인들의 변화를 떠올렸다.

지난 수요일 두번째 수업을 했는데 과제제출율은 낮았지만 글을 잘 써오셨다. 아무 글쓰기 기술도 습득하지 않은 분들. 교양화되지 않은 정서에서는, 거칠 지언정 좋은 글이 나온다. 특히 유년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 그렇다.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바탕이 있다. 조지오웰은 작품의 주제는 작가가 속한 시대가 결정하지만 작품의 동기는 그가 어린시절 받았던 정서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나는 오웰의 말을 경험적으로 신뢰한다. 한 분이 발표한 글에서 자꾸 생각나는 대목.

'시골에서 서울 올라오기 전 엄마께서 귀가 아프도록 일러주신 이야기. "잘해야 한다." "잘해야 한다" 도대체 뭘 어떻게 잘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자식이 잘 살기를 바라는 엄마의 절실한 마음이 저렇게 잘 표현된 문장이 또 있을까. 지난번 글쓰기수업에서도 한 분이 엄마 인터뷰를 해왔는데 엄마의 말씀이 주옥같았다. "용쓰지 말고 살아라" 그 말이 하도 좋아 내 방에 액자표구 하고싶었다. '잘해야 한다'와 '용쓰지 말라'는 상반되는 뜻이다. 잘하려면 용써야 한다. 불가피하다. 그런데 맥락은 같다. 용 쓰지 않고 잘 사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면 무얼까. <피에타>에서는 애궂은 토끼 한마리가 이정진한테 잡혀왔는데 조민수가 토끼를 자유신분으로 풀어준다. 토끼는 살겠다고 집밖으로 나갔다가 큰 길에서 사고로 죽는(것으로 암시된)다. 어디 그 토끼 뿐이겠는가. 모든 살고자 하는 것들이 때로는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희망은 있는가. 희망은 다 쓸데 없는가. 살아야하는가. 살지 않아야하는가.

  

우리가 구원을 향한 희망을 품으면 그 희망보다 먼저 들리는 목소리, 그런 희망은 다 쓸데 없는 일이야, 라는 절망의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래도 한 순간이나마 우리를 숨 쉬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비록 무력하기 그지없어도, 희망이다. 진지한 사유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있다면, 그건 이 아픈 마음의 이중적 의미를 자꾸만 새로운 사유의 시도와 형상들로 바꾸어 성찰하면서 끈질기게 따라 가는 일이다. 마지막 진리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그렇게 끝없이 추적하면서 태어나는 사유의 가상들 밖에서 그 언젠가 더는 가상이 아닌 구원이 돌연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망상과 사실상 분리될 수 없는 것이리라.

 - 아도르노. <<미니마모랄리아>>산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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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여성의 탄생

[글쓰기의 최전선]

여성들의 글쓰기에 관심이 갔다. 자본주의 역사보다 20배가 더 긴 모성의 역사.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로 살아온 여성은 자기 언어를 갖지 못했다. 세상을 바꿔야할 이유가 없는 남성의 언어로 여성의 삶은 설명하기 힘들다. 자기 삶을 이해하기도 설계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여성의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동네 카페에 가면 머리 맑은 아침부터 엄마들이 둘러앉아 답도 없고 끝도 없는 학원얘기로 시간을 보내는 걸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저 모임이 주부들 독서토론 모임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자식을 향한 일방통행로에서 자기에게로 삶의 물길을 돌리면 엄마와 아이가 더 행복해질 텐데 생각했다.  때마침 여성민우회생협에서 일하는 후배가 글쓰기 강의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문제는 거리가 멀고 강의료가 적다는 건데, 망설이다가 결단을 내렸다. 나도 여성의 글쓰기를 배우고 싶어서이다.

511일부터 매주 수요일에 일산에 간다. 수업을 두 번 마쳤다. 첫 시간 자기소개 할 때 그동안 아이 셋 키우면서 너무 내가 없이 살았다며 눈가가 발갛게 젖어든 여성 1, 두 번째 시간에 자기 글 읽으면서 목이 메어와 낭독을 중단한 여성 2인이 탄생했다. 그러면 누군가가 나서서 대신 글을 읽어준다. 옆자리에서 같이 눈물을 닦는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말한 정서적 모방(affectuum imitatio)’아닌가. 원인도 모른 채 누가 눈물을 흘리면 덩달아 울고 누가 웃으면 따라 웃는 현상. 스피노자는 단지 어떤 신체가 우리와 유사하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그 신체와 유사한 정서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서적 모방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 인류라는 집합적 신체를 떠올렸다. 그러니 정서적 모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 아닌 셈이고, 우리는 정서적 모방으로 인해 인간사회를 이루고 산다는 것이다. 진한 감응의 시간. 여성이라는 집합적 신체의 탄생을 목도하면서, 나는 일산이 멀다고 안 가면 어쩔 뻔 했나 안도하며 동시에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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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글이 멋진 글이다

[글쓰기의 최전선]

학교나 직장을 다니지 않더라도 살다보면 글 쓸 일이 종종 생긴다. 새 학기에 어떤 담임선생님은 자녀에 대해 참고할 사항을 써달라며 백지를 보낸다. 하얀 종이를 앞에 두면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나도 순간 난감하다. 다른 엄마들은 어떨지 괜히 염려스럽다. 글쓰기가 확실히 만만한 일은 아니다. 여러 생각이 붓을 가로막는다. ‘잘 써야한다’는 부담감, ‘뭘 쓸까’하는 막막함이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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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를 채집하자

[글쓰기의 최전선]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 <무진기행>  

아름다운 문장 한 줄 읽는 것으로 시작하자. 빼어난 문장이다. 독창적인 글쓰기의 묘미가 한껏 드러난다. 사랑한다고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는 것이야 문학작품에서 늘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새롭다. 덤덤하면서도 절절하다. 나는 읽으면서 내가 그가 된 것처럼 어색해서 고개 숙이고 입술을 비틀었다 폈다 했다. 저 문장의 핵심단어는 ‘국어’같다. 흔해 빠진 말인데 사랑, 어색과 배치되니까 신선하다. 색다른 울림을 자아낸다. 더군다나 하나도 꾸미지 아니한 담백하고 솔직한 아이 같은 표현의 어른스러움이라니.  

좋은 문장은 어려운 단어나 고급한 개념어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평범한 단어도 이웃한 단어들에 따라 의미가 살아나면서 선명한 전달력을 갖는다. 적재적소의 미학이다. 글 쓰려면 단어를 많이 알고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글의 기본 재료도 연장도 오직 ‘단어’다. 

살아있는 단어를 쓰라  

이외수는 <글쓰기 공중부양>에서 단어를 생어와 사어로 나누고 생어를 쓰라고 권한다. 생어는 오감을 각성시킨다. 아직 글쓰기에 발군의 기량을 습득하지 못했다면 될 수 있는 한 생어를 많이 사용해야 한다. 생어는 글에 신선감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시각: 달빛, 주름살. 청각: 천둥, 자명종. 후각: 비린내, 박하. 촉각: 모래, 양탄자. 미각: 꿀물, 고추장 등이 있다. 반면에 사어는 절망. 허무. 총명. 지혜 등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단어들이다. 사어로만 된 글은 이미지가 남지 않아서 글을 따라가기 어렵다. (하지만 김승옥의 <무진기행> 사례에서 보듯이 사어는 작가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생어로 변모한다. 기본을 충분히 습득한 다음의 이야기다.)

그놈은 흉기로 자주 자해를 하는 습관이 있다. 라는 문장보다는 
-> 그놈은 뻑하면 회칼로 자기 배를 그어대는 습관이 있다. 라는 문장이 훨씬 선명한 전달력을 가진다.
흉기와 자해라는 '사어' 대신에 회칼이나 배를 그어댄다는 '생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글쓰기비법에는 단어노트나 글감노트를 만들라는 것이 꼭 나온다. 그만큼 ‘단어’가 중요하다. 이외수도 오감에 해당하는 단어를 감각별로 하루에 최소한 열 개씩만 찾아서 노트에 정리해두라고 한다. 사실 나는 몇 년 전 이 부분(20쪽)을 읽다가 책장을 덮었더랬다. 중학교 때 연습장에 영어단어 써서 외우기 숙제가 생각나서다. 난 그 시간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글쓰기공부도 영어공부랑 비슷하다.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떤 학원에서는 수업시간마다 영단어 100개씩 외우게 하고, 어떤 학원은 스토리북 읽으면서 문장 속에서 모르는 단어 뜻 찾아가며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한다.

나는 후자를 택한 셈이다. 나도 단어/문장 노트가 있는데 감각별로 상황별로 단어를 정리하지 않고 아름다운 문장과 단어를 볼 때마다 적어놓는다. 비록 쓰자마자 휘발되어버리지만 ‘단어노트’의 잠재성은 크다. 내 손으로 한번 쓰는 행위를 통해 내 몸 어딘가에 저장하는 기분이다. 쓰는 동안이라도 그 단어와 문장을 되새길 수 있다. 그것이 반복훈련이 되면 단어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고 말을 부릴 줄 알게 된다. 글이 안 풀릴 때 훑어보다가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이외수의 단어훈련법 한 토막을 소개한다.

지금 그대 두변에 방치되어 있는 단어들을 무작위로 적어보라. 초겨울, 창문, 바람소리, 골목, 외등, 새벽, 눈시울 이란 단어를 채집했다고 가정하자.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이것만으로도 진실을 전달할 수 있다.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는  / 초겨울 바람소리 / 행여 그대가 아닐까 /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골목 저 멀리 외등 하나 /  눈시울이 젖은 채로 /
새벽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위에 널린 좋은 단어를 색색이 꿰어 보배로운 문장이 탄생했다. 그리고 단어를 고르고 이어붙일 때 ‘뜻’만이 아니라 ‘소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읽은 소리를 따라 읽는다. 리듬과 운율은 모든 문장에 필수요소다. 고요한과 평온한은 어감이 많이 다르다. 자꾸 읽어보면서 단어의 배치를 바꾸고, 더 참신한 단어, 더 적합한 단어로 바꿔보자. 활력 있고 울림 있는 문장이 될 때까지. '국어의 어색함'을 발견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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