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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나의 화두, 글쓰기 수업


<글쓰기의 최전선> 발간 이후, 

그러니까 요즘 제 화두는 글쓰기-수업이다. 나의 글쓰기-수업은 어디로 가는 걸까. 이것도 생명체인데 끝이 있겠지. 언제 어떤 순간에 ‘그만’ 해야할까. 가장 사랑할 때 헤어질 걸 염려하는 사람처럼 고민한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려보곤 한다. 


이 글쓰기-수업에서 아무런 긴장과 갈등이 생기지 않을 때, 

다른 생각 다른 의견이 일어나지 않는 불모의 시간일 때, 

서로 마음이 착착 맞아 너무 좋기만 할 때, 

내가 확신에 차서 ‘직업적 능청’을 떨고 있다고 생각될 때…


어제는 수업 마치고 오는 길에 ‘당분간은 계속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먹고사는 문제로 엮이지 않은 관계 속에서 이런 정신적 긴장과 자극을 느끼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다. 마음 묵직한 몇 가지 지점이 있긴 하지만 불편한 게 꼭 나쁜 건 아니므로 안고간다.    


사람은 잘 안 변하니까 글도 잘 안 바뀐다. 쉬이 바뀌는 건 선도 악도 아니고, 그냥 자기 시간의 호흡이다. 내 경우도 그렇고 아이를 키워봐도 그렇고 호통치거나 주입시켜서 공부가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럼 왜 글쓰기 수업을 하는가? 무얼 배우지? 내글-남글, 내말-남말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자기 글-생각의 중심과 균형을 잡아가는 방식으로 배움은 “서서히” 일어난다. 그러는 동안 난 곁이 되어주는 친구, 결석 안 하는 한 명의 독자다. 


‘봉합된 우정보다 드러난 적대가 낫다.’ 니체의 말. 


합평할 때 필요한 지침이다. 적대를 어떻게 제대로 드러낼까. 감정적 분출이나 섣부른 재단이 아닌 정확한 지적, 솔직한 느낌을 말해야하는데, 그게 참 어렵다. 그래도 침묵하기보다 어떻게든 표현해보려고 하는데 여전히 조마조마하고 매번 조심스럽다. 그래도 입을 뗀다. 봉합된 우정은 시시하니까. 미숙한 존재들이 만나 인간답게 살아보겠다고 용쓰는 시간, 조금 더 자신에게 수용적이고 서로에게 너그러워야 공부할 수 있겠구나 생각한다.   



오늘 아침, 파란 가을 하늘을 보면서 어제의 뜨거웠던 순간을 복기하면서 페이스북에 글을 몇자 남겼다. 


“아무리 공부하고 책을 읽어도 자기 삶을 설명하고 설계할 수 있는 마땅한 말이 없어서, 타인의 삶을 재단하고 왜곡하는 손쉬운 말들만 늘고 있어서 삶은 종종 곤란에 빠진다. 언어의 빈곤- 언어의 발명을 화두로 삼은 나의 공부, 나의 글쓰기가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보는 눈을 잃어가는, 그래서 남은 없고 나만 남는 쓸쓸한 과정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