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을 말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차오르는말들]



체육계의 폭력문화’라는 제목으로, 글쓰기 수업에서 A가 글을 써왔다. 핸드볼에 입문한 초등학교 5학년 추운 겨울날 체육관 바닥에 엎드려 경찰진압봉으로 맞은 일부터 대학 체육학과에서도 “대가리를 하도 박아서 두피에서 비듬처럼 피딱지가 떨어져 나온 일” 등 체육학도의 잔혹한 생애사를 생생히 그려냈다. 가해자들 폭행의 근거는 확고했다. 더 많이 때릴수록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 


A의 발표가 끝나자 B가 말했다. 이 글이 자기경험과 단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일치한다며 ‘반색’했다. 핸드볼부였던 그 역시 매일 흠씬 구타를 당했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코치에게 심하게 맞아 온몸이 부었고 그 모습을 본 엄마가 기절하여 병원에 입원했던 일화를 마치 증거물처럼 기억의 서랍에서 떡하니 꺼내놓았다. 좌중은 경악했다. 


뭐, 분위기는 암울하지 않았다. 다만 신랄했다. 현재 대학 강사인 A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체육계의 폭력문화, 그 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일깨운다며 글을 맺었다. 나름 해피엔딩. ‘죽도록 맞은 기억’을 공유한 A와 B의 표정은 후련했고 그 순간만큼은 한몸처럼 다정했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면서 고통은 ‘언제고’ 말해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날 수업을 마치고 나서 또 다른 폭행소식을 접했다. 진보논객으로 불리는 남성에게 데이트폭력을 당한 여성의 글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지 무언가. ‘진실’ 공방이 오갔지만 가해자는 폭행 ‘사실’을 인정했다. 피해여성은 페미니스트인 자신도 3년이 흐른 지금에야 공론화할 수 있었다며 그 어떤 여성도 데이트 폭력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몸에서 멍을 뽑아낸 듯 푸르게 써내려간 글자들이 환하고 아팠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허수경 시 ‘공터의 사랑’ 부분



다음 날, 메일이 한 통 왔다. 가정폭력 피해여성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분이다. 가장 나이가 많고 배움이 짧았던 그이지만 누구보다 두 눈을 반짝였고 용감하게 자신의 피해경험을 써내려갔다. 그 다음 수업에 가니 병이 악화돼 급작스레 퇴소하고 안 계셨다. 여러모로 걱정스러웠는데 편지가 온 것. 글쓰기를 배우고 나면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고맙다는 인사를 못하고 나와 마음에 걸렸다, 자신은 이전과 달라졌으니 염려 말라는 내용이었다.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서툰 다섯 줄짜리 편지는 힘이 넘쳤다. 나는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을 자기언어로 기록해낸 두 사람을 보면서 고통은 ‘반드시’ 말해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말할 수 있는 신체’가 되기까지 그 과정은 간단치 않다. 자기 경험을 떨어져서 볼 수 있는 시간, 자기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는 언어, 온전히 내 편이 되어 들어줄 수 있는 안전한 동료, 다 필요하다. 데이트폭력 피해여성은 3년, 체육계 폭력 피해남성은 10년, 가정폭력 피해여성은 십수 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은 삼사십년이 걸렸다. 그러니 피해자에게 왜 곧바로 말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면 아니 된다. 피해 즉시 자기 사건을 객관화해서 말할 수 있으면 그는 약자가 아니다. 자기가 당한 일이 뭔지 몰라 괴롭고 그런데도 계속 당해야하니까 고통인 거다. 


폭력의 본질은 같다. 체육계 폭력, 군대폭력,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모두가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힘의 행사다. 때릴 수 있으니까 때리는 거다. 이유 따위는 없다. 그러므로 더 많은 폭력이 드러나고 더 많은 고통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거칠거나 투박하게라도. 아울러 잘 들어주어야 한다. 의심하거나 따지지 말고. 이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억압과 폭력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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