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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여자인간의 결혼식 - 신해욱 여자인간

동거 7년, 결별 2년, 재회 6개월 만에 식을 올리는 후배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버스 두 번, 택시 한번, 도보 10분으로 그 먼 나라의 땅을 밟았다. 토요일 오후 차들이 즐비한 복잡한 도로를 이런저런 교통수단으로 통과하자니 그녀가 지나온 길을 되짚는 듯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막판에는 뚫렸다. 야트막한 언덕 안쪽에 그림 같은 성당이 숨어있다. 신부대기실 문을 열었다. 머리에 분홍색 화관을 쓴 후배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사진 촬영에 여념 없다. “안경 안 썼네?”

 

그녀는 비혼주의자였다.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식의 절차를 밟는다. 제발 식만 올려다오. 부모의 애원이 통할 만큼 그녀는 외로웠다. ‘이러다가 파리에서 송장되겠다’며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결혼식 준비 과정이 요란했다. 한국 사회 보수적인 혼례 풍토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평소처럼 안경을 쓰고 웨딩드레스를 입겠다고 했다가 엄마랑 크게 싸웠다고 했다. 이십년 동안 벗어 본적 없는 안경. ‘일생의 단 한번’인 그 날은 벗어야한다고 주위에서도 하나같이 만류했단다. 신랑은 안경을 써도 되고 신부는 왜 안 되느냐는 말이 통할 리 없다. 요즘은 신랑도 두텁게 분을 바르고 콘택트렌즈를 착용한다. 그녀는 고집스럽게 인터넷 검색창에 ‘웨딩드레스에 어울리는 안경테’ 라고 검색어를 넣어보았다는 둥 저항하는 듯했으나 실패로 끝난 모양이다. 안경 대신 웃음을 걸치고 말한다. “생각보다 결혼식 재밌어요.”

 

장차의 남편하고는 간단한 계약서를 썼다고 했다. 상호 자유연애 가능. 단 배우자에게 알릴 것. 단서조항을 달았다고. 나는 그게 가능할까? 라는 회의나, 에구 뭐하는 거니! 라는 질책보다 질투가 일었다. 형식상이라도 그런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유연한 관계가 부러웠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와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보부아르는 계약결혼을 했지만 정상결혼의 전형적인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사르트르는 쉼 없이 바람을 피웠고 보부아르도 맞바람으로 응했으며 그들 사이에 ‘사랑과 전쟁’이 대단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말이지 ‘이 죽일 놈의 통속’이다. 탄탄한 철학적 이론과 사유로 무장한 이들도 불가능했던 성애 관계 실험의 계보를 그녀가 농담처럼 잇는다.


 

“지구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간/ 다른 종/ 다른 류의 인간을 하나씩 세어보기도 한다.// 손가락이 남기도 한다.// 손가락이 모자라기도 한다.” (신해욱 ‘여자인간’ 중)

 

그 다음은 신혼여행. 서울 근교에 당일치기로 나들이나 다녀올 예정이라고 했다. 오랜 타지 생활에 지쳤겠다, 집이 좋은가보다 했다. 아니 또 어쩌면 그녀는 여느 신혼부부처럼 훌쩍 떠나 며칠 묵고 올지도 모르겠다. 안 한다고 고개 젓고 발끈해서 싸우다가 결국 하나하나 다 실행하고 있다. 신부화장 하고 면사포 쓰고 결혼식 올리고 웨딩사진 찍는다. 결과적으로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혼이지만 그래도 내겐 오랜만에 접하는 흥미로운 결혼 뉴스였다. 일생 중대사를 의심 없이 행하는 것과,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자기에게 맞는지 아닌지 대보고 뒤집어 보고 다른 길을 시도하다가 제도에 포획되는 건 엄연히 다르다. 밀고 당기고, 버티다가 포기할지라도 적어도 속수무책 당하지 않겠다는 정신. 그 거리두기와 왕복운동 속에서 삶의 주름은 깊어질 테니 말이다.

 

*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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