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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첫사랑 고구마 같은 직업

월동 준비로 고구마를 샀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하려고 검색창에 고구마를 써넣으니 브랜드가 말 그대로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엮여 나왔다. 내가 고른 것은 첫사랑 꿀고구마. 달달하고 익살스런 이름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집으로 배송온 상자에도 첫사랑 꿀고구마라고 표기되어 있다. 고구마를 꺼낼 때마다 킥킥 웃음이 난다. 저 농부에게는 못 잊을 첫사랑이 있는 걸까. 단지 판매 전략으로 고안해낸 말일까. 전원일기 풍의 농촌 멜로가 아니고서야 티라미슈 케이크도 아니고 고구마를 먹으면서 첫사랑이 떠오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쨌든 저 농부는 고구마처럼 촉촉하고 달콤한 기억에 근거해 이름 지었을 테고 그것이 인간 보편 감성의 한 켜를 이룬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다.

나는 그 농부가 참 행복한 직업인이라고 생각했다. 흙일의 고단함이 있겠지만 그 와중에도 첫사랑이라는 순정한 시간을 불러들이고 나의 생산물을 매개로 세상 사람들과 나눌 방법을 궁리했으니까 말이다. 회상이든 공상이든 몽상이든 내 생각, 내 정신으로 일할 수 있으면 좋은 직업 아닐까. 조직이 요구하는 맞춤형 인격, 그러니까 남의 정신으로 24시간 살아가길 강요하는 험한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선생님!” 속노란 고구마를 먹으면서 첫사랑과 좋은 직업에 대한 상념으로 영혼에 모락모락 김이 오를 무렵,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작년에 글쓰기 수업을 들었던 학인의 반가운 목소리다. 나와 공부할 때는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모색하던 시기였고 올봄 유수의 대기업에 입사했노라 연락이 온 게 마지막이다. 이번 용건은 진로상담. 거대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게 고달파 다른 업종에 면접을 보았고 합격했는데 옮기는 게 과연 나은지 물었다.

무조건!” 그 학인이 저울질 하는 일터가 내가 좋아하는 인문분야 출판사였기에 나는 흔쾌히 답했다. 고집스럽게 자기 색깔을 지켜가면서 책을 만드는 곳으로 규모도 있는, 탄탄한 출판사였다. 출판인들의 삶을 가까이 오래 지켜보면서 좋은 직업이라는 믿음이 가던 참이라 연봉이 줄더라도 갈만하다고 판단했다.

내가 직업으로 강추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책을 다루는 일이라서 그렇고, 더군다나 인문학 분야는 삶에 대해 질문하고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귀한 성과물을 다뤄서 그렇다. , 생각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중 하나가 출판업이다. 물론 거기도 공장이다. 책을 생산하고 판매하니 이윤과 효율이라는 자본의 논리를 비켜갈 수 없다. 안 팔리면 망한다. 그런 위험은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논외로 한다면, 자기 삶을 돌아보도록 자극하고 영감을 주는 책과 사람(동료 혹은 저자)이라는 장치가 가까이 있음은 큰 이점이다. “30대에 누구와 무엇을 곁에 두고 지내느냐는 인생에서 참 중요한 문제 같아.” 서른 즈음의 그에게 이 말을 전하며 나는 어설픈 조언을 마무리 지었다.

삶은 어렵다. 첫사랑 고구마라는 말 한마디에 문득 행복해지기도 하고 대기업이라는 상징자본이 일순 노예증서처럼 퇴색하기도 한다. 매일매일은 보잘 것 없는 삶이나 대단한 양 살아가려니 늘 혼란스러운 거다. 묵묵히 일상을 일구는 수밖에. “내 몸 하나/ 죽이지 말고 살리는/ 이 일이 또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오덕 내가 할 일)인 요즘이다. 이왕이면 고구마 씨를 뿌려서 노오란 추억을 먹게 하는 일이거나, 사유의 씨앗을 전파해서 영혼을 환하게 밝힐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거다.

 

* 한국방송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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