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만나는 것들

[차오르는말들]

승강기 버튼을 꾹 누른다. 맨 꼭대기인 18층까지가 출근길엔 더욱 더디다. 땡 하는 신호음을 기다리는데 옥상 문이 열리고 6층 아주머니가 낑낑거리며 화분을 들고 나온다. 하얀 국화꽃이 긴 모가지를 내밀고 소담소담 피었다. 집에다 두시려고요? 그럼. 내가 이 꽃을 보려고 봄부터 키웠는데 집에다 두고 봐야지. 최고의 가을 부자. 국화꽃 당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그리도 옥상을 드나드셨나보다. 1층 현관에는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바위처럼 몸을 웅크리고 계단 바닥을 연신 문지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중창으로 목례를 나눈다. 누가 음식물 쓰레기를 흘린 모양이라고, 하필 어제 손톱을 깎아 떼어지지 않는다고 당신의 뭉뚝한 손을 탓한다.

옆 동에는 오늘도 연희데이케어센터 차가 비상등을 켜고 서있다. 걸음걸이가 불편한 할아버지를 운전사와 할머니가 힘을 합해 부축한다. 셋이 엉켜서 옆으로 한걸음씩 둥글게 내딛는다. 질병과 동거하는 노년의 풍경. 4월에 이사 와서 처음 봤을 때 나는 늙어서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계절이 두 번 바뀐 지금은, 나는 누구에 몸 기대어 사는가를 헤아린다. 해석이 달라졌다. ‘질병은 불행이다’에서 ‘곁에 누구 있음은 행복이다’로. ‘인간은 허약하다’에서 ‘사람 곁에 사람이 필요하다’로. 인간의 근원적 의존성을 인정하기로 한다. 

왜 아니겠는가.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다른 생의 연대전선을 마주한다. 항상 재킷을 입으시는 백발성성 노신사가 유치원 가는 손자를 소몰이하듯 앞세워 걷는다. 단지 입구에는 한 젊은 엄마가 둘째아이는 업고 큰아이 손을 잡고 우두커니 있다. 육아의 고단함이 전해져와 나는 괜히 시큰하다.

초등학교 사거리 신호등 앞. 과일장수 아저씨가 리어카에 상품을 진열 중이다. 하얀 목장갑 끼고 상자에서 과일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살살 닦는다. 하늘이 부쩍 높아진 어느 날부터다. 자주색 플라스틱 용기에 쌓여있던 포도와 참외는 연시랑 사과에 자리를 내주었다. 횡당보도 두 개 건너 ‘테레사미용실’ 앞에 이르면 컹컹컹 개 짖는 소리 요란하다. 자투리 마당의 낮은 울타리로 오르락내리락 고개를 내미는 녀석들. 사나운 목청 순한 눈길로 인적 없는 길가에 활기를 뿌린다.

불광천 입구.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낙엽 흩날리는 가을하늘 아래 폭 잠기는 호사를 누린다. 내 키를 추월해 커버린 갈대가 도열하여 손 흔들고 물속에서 머리를 반쯤 처박고 물을 마시는 오리떼도 나의 오랜 반려 풍경이다. 헬스기구에 탄 중년의 남녀들은 사지를 쫙쫙 펴고 눈만 내놓은 라이딩족들, 손뼉을 치며 워킹에 열중하는 처자들이 옆구리를 스친다.

해 뜨면 매일 반복되는 것들. 무심하게 전개되는 거리를 지나 사무실에 이르러 신문을 펴면 또 다른 반복이 펼쳐진다. 어제도 걸었을 등굣길 중단하고 ‘수능 전날’ 이 세상의 풍경에서 자신을 지워버린 어느 고3 학생의, 제 손으로 유서를 쓰고 엄마 옆에서 죽음을 기다렸을 열두 살 여자아이의 그것. 일상에서 비일상의 영역으로 생니처럼 뽑혀간 이들의 홀연한 죽음들.

내가 스친 삶의 최소풍경을 찬찬히 복기해본다. 늘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보면 어디에선가 슬픈 소리가 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어떤 생의 기울기를 가져야 우리는 슬픈 소리에 공명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이웃해야 말 건넬 수 있을까.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기형도, ‘비가2’ 중)” 라는 시인의 말을. 


*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