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나는 오해될 것이다

[올드걸의시집]

 

라디오를 들으면서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라디오와 멀어졌다. 그러다가 2007년 즈음 임태경이 진행하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으려 다시 라디오 앞에 턱 괴고 앉았다. 들으니 좋았다. 평소에 듣던 노래도 중저음의 디제이가 소개하고 강원도 삼척에서 온 사연과 곁들이면 어쿠어스틱 버전처럼 낭만이 솔솔 피어났다. 음악이 손 잡아주는 공감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라디오는, 영혼의 감기 정도는 금세 낫게 하는 ‘느낌의 공동체’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연소개 끝에 이름 대신 핸드폰 번호 뒷자리를 불렀다. 4951님 신청곡입니다. 이런 식이다. 깜짝 놀랐다. 수인번호 같았다. 말끝마다 번호를 불러대니 라디오가 만들어주는 낭만의 울타리는 어디가고 이 세상이 창살 없는 감옥이 되어버렸다. 사람을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부르다니 듣기가 영 거북했다. ‘별밤’을 듣던 시절 엽서 잔뜩 꾸며서 보내놓고 행여나 이름 석 자 나올까싶어 두 시간 동안 화장실도 못 가던 기억이 있어서 더 그럴는지 모른다.

이름 부르기는 참 다정한 행위다. 나는 지금도 누가 이름을 불러주면 마음이 순해지고 환해진다. 저번에 선배가 귀찮은 부탁 메일 보냈는데 서두에 이름을 하도 다정하게 불러놓는 바람에 마음 약해져 수락했다. 이름 부르는 일은 마법효과도 있다. 해금연주자 꽃별 씨를 인터뷰했을 때 그랬다. 어릴 때부터 ‘꽃별아’ 불리었기에 이름대로 살기 위해 더 노력했다고. 신비롭고 설득력 있는 진술에 혹하여 나는 그녀가 이름 덕분에 무대의 꽃이 되고 해금계의 별이 됐나보다고 썼다. 딸아이가 여섯 살 때 자기는 꽃이 가득한 수레가 되고 싶다며 ‘꽃수레’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 웃기고 당당한 제안을 접수하면서 이름은 어쩌면 존재의 내적 요청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를 감싸는 얇은 피부 같은 이름. 폴 발레리 말대로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 가장 먼저 이름을 빼앗기고 번호를 부여받았다.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15번 일어서라는 선생님의 명령에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불러달라며 반항했다는 친구가 있다. 고유성이 없는 동질화된 개인을 생산하고 존엄을 박탈하는 가장 손 쉬운 장치는 이름 제거다. 출석부 일렬번호로 호명되고 석차로 분류되며 핸드폰 뒷자리로 불리면서 고객님으로 통칭되는 삶이라니, 얼마나 쓸쓸한지.

 

나는 내 얼굴을 지우고
그 얼굴을 기억하는
다른 얼굴이 되겠지만

- 「새들의 비밀」

 

작년에 남편이 이름을 바꾸었다. 탈난 과거와 결별하고픈 의지가 컸나 보다. 개명절차가 간소화 되어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며 낯선 이름이 적힌 주민등록등본을 보여줬다. 김해경이 이상으로 탈주했던 것과 같은 심정이려니 이해해주었다. 옆동네로 고등학교 친구가 이사와서 오랜만에 반친구들이 모였다. 늦게 갔더니 서로 손톱에 금가루 바르는 네일아트를 하면서 성형수술 얘기에 열중했다. 눈코수술과 치아교정은 기본이라며 온갖 첨단 정보를 교환했다. 금융업계 핵심인재로 성장한 동창 아무개는 대학원 졸업으로 학력세탁을 마쳤고 그래서 여상 나온 사실을 동료들이 모른다고 했다.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전태일 어록이 떠올랐다. 그즈음 조금 다른 의미의 변신을 꿈꾸는 스물두 살의 고백도 들었다. 어딜 가나 서울대생 프리미엄이 붙는데 그게 불편하면서도 그걸 은근히 누리게 되더란다. 그런 삶에 젖어 들까봐 겁나고,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 고작 대학이름 밖에 없다는 게 말이 안 되므로 학교이름을 어떻게 벗어버릴 것인가, 어떻게 나의 존재를 증명할 것인가, 그것을 이십대 과제로 삼았다고 말했다.

‘생의 거품’을 제거하는 방식이든 ‘생의 금칠’을 덧입히는 방식이든, 저마다 나답게 잘 살기 위한 몸부림이 치열하다. 학벌, 가족, 직급, 재산 등을 제외한 나머지, 그 실재를 열망하거나, 이름과 얼굴을 바꾸면서 과거 청산을 도모하거나, ‘너에게 나는 소문이다’를 활용하는 기민한 태도로 이익을 챙기거나, 그런다. 연예인만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자기를 지우고 바꾸고 숨기고 갱신한다. 남루한 혹은 지루한 생을 리모델링하는 그 힘들이 놀랍다. 인생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 없다고 단정했었는데 잠시 헷갈린다. 어지럽고 어리둥절하다. 그들의 변신욕망이 어떤 가치를 낳는지를 물어야겠지. 자기를 억압하느냐 해방하느냐.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묵묵한 살아냄보다 무구한 조작이 우세할수록 삶은 꼬인다는 것. ‘나는 오해될 것’이고 ‘결국 나는 나를 비켜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삶은 명사로 고정하는 게 아니라 동사로 구성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오해받을지라도 순간의 진실을 추구하고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만 아주 미미하게 조금씩, 삶은 변하는 거 같다. 살면서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들은 이름, 감각, 느낌, 음악, 이야기… 나에게 존재를 위해 금가루 뿌리는 일이란 음악이 내미는 손 잡는 것,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것, 느낌을 나누는 것. 그리 호사 누리며 살기로 한다.

 

나는 오해될 것이다. 너에게도
바람에게도
달력에게도.

나는 오해될 것이다. 아침 식탁에서
신호등 앞에서
기나긴 터널을 뚫고 지금 막 지상으로 나온

전철 안에서
결국 나는
나를 비켜갈 것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햇빛이 내 생각을 휘감아
반대편 창문으로 몰려가는데
내 생각 안에 있던 너와
바람과
용의자와
국제면 하단의 보트 피플들이 강물 위에 점점이 빛
나는데,

너와 바람과 햇빛이 잡지 못한 나는
오전 여덟 시 순환선의 속도 안에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고정되는 중.
일생을 오해받는 자들
고개를 기울인 채
다른 세상을 떠돌고 있다.

누군가 내 짧은 꿈속에
가볍게
손을 집어넣는다.

-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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