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담(詩談)

[차오르는말들]

손가락 사이로 물 빠지듯 흘렁흘렁 지나가는 시간. 책 몇장 뒤적거리고 설거지 삼세탕하고 나면 훌쩍 지나가버리는 하루. 그렇게 이틀, 사흘, 나흘...사는 일이 다 그렇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포기가 안 되는 시간과의 싸움. 왠지모를 억울함과 허전함이 가시지 않았는데 그래도 시 세미나를 하니까 하루는 온전히 내 것 같다. 생각해보면 우습다. 논문발표도 아니고 그저 시 한 편씩 돌아가면서 낭독하고 느낌을 이야기하고 들어주고 말 한두마디 더 얹는 일이 전부다. 이 시 왜 이렇게 어려워요. 글쎄 말이에요. 이게 맞나요? 저게 아닐까요? 정답 뜯긴 문제집을 푸는 아이들처럼 온갖 추측이 난무한다. 시세미나 제목에 걸맞는 '말들의 풍경'이다. 꽤나 수런거리는.   

시 세미나의 여운이 한 이틀은 간다. 감흥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인터넷을 하다가 스카이프에서 추장을 만났다. 추장은 문학동아리에 가담했었고 '시'이야기로 담소가 가능한 동료다. 지금 뉴욕에 체류중인데 날마다 99%집회 참가해서 글 쓰기 바쁘다. 출국 전, 사람들이 왜 하필 물가도 비싼 뉴욕이냐고 물었을 때 호기롭게 말했었다. '자본주의 심장부에서 자본주의 망하는 걸 좀 보고 와야겠다'고. 누구도 믿지 않았다. 올초만 해도 어떤 조짐도 없었다. 그래서 허경영 공약처럼 황당해서 유쾌하게 들리던 선언. 그런데 반자본의 외침은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주 편집회의할 때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더니, 하늘이 알아서 세팅을 다 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며 월스트리트 상황을 보고하던 그다.
 
은: 집회 댕겨왔어요?
고: 어제 폭풍 일정이 있어서 집회는 못 갔어요.
은: 그랬군요. 어제 저는 시세미나 -오규원했어요.
고: 아, 오규원... 예전에 길거리 풍경... 오규원 맞나? 헷갈리네. 어떻든 좋아했던 것 같은데...ㅎㅎ
은: 시세미나 완전 대박이에요. 개인적으로 폭풍감동!! 고추장한테 고마워요. 나를 수유너머로 인도해줘서.ㅎㅎ
고: 웬... 셀프 감동
은: 뭐든 셀프하고 삽니다.ㅋ
은: 수유너머 처음 오는 분들이 많아서 놀라요.
고: 그래요? 좋은 징조네요.
은: 네!! 좋은 징조죠. 다 알토란 같은 분들. 이 시대에 시를 읽겠다고 나오니..ㅋㅋ
고: 잘 하면 시가 수유너머R을 구원하겠는데요...ㅎㅎ
은: 시는 원래 인류를 구하는 사명을 띠었죠. ㅎㅎ

이런저런 수다로 흘러가다가 추장이 말했다. 우리가 편하게 있는 거라고. 낮에 발리바르랑 스피박, 피터오스본, 해리하루투니언을 만나고 밤에는 지진 후 상황을 알리려, 말 그대로 여기저기 호소하러 다니는 운동가들, 지식인들을 만났단다. 가난뱅이 역습의 저자 마츠모토 하지메, 현대사상의 전설적 편집자 이케가미 요시히코, 그리고 지난 지에잇 때만난 활동가들. 근데 이케가미씨 말은 정말 벼락이 치는 느낌이었다고.  대략 추려보면. 지금 일본 사람들 정말 힘들지만 대단한 싸움을 하고 있다. 어제 미국인 학자 한 사람이 이번 원전사태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원전 없이 지금의 삶이 유지될 수 있을가 의심한다고 하자 이케가미 선생의 답변은 이랬단다.

"앞으로 2-30년간 아이들이 앓게 될 암이라든가, 하는 병들... 자신들이 4-50년대 반원전싸움에서 패배하지만 않았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60년이 지나 다시 싸우게 되었다고...우리는 이미 지금 원전 없이 살고 있다고. 지금 원전 몇 기를 대중들 힘으로 중지시켰대요. 원전은 없어도 된다고. 밤에 좀 어두우면 뭐가 어떠냐교. 전기기기 안 쓰면 뭐가 어떠냐고. 지금 일본 사람들은 그런 걸로 고민하지 않는다고. 문제는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아이들이 앞으로 앓게될 여러 병들... 먹는 것, 숨쉬는 것, 마시는 것... 이것 때문에 갖게 될 삶에 대한 두려움들 그런 거라고... / 멋있었어요. 아마 낮에 본 학자들은 '원전 이데올로기의 호명에 주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연구하고 자빠졌겠지만... 이케가미 선생은 한마디로 결연하게 말했죠. 그런 건 문제도 안 된다고." 

오규원이 시로 담아낸 두려움. 자본에 잠식당한 삶에 대한 성찰. 다르지 않았다. 너무도 같았다. 먹는 것, 숨쉬는 것, 마시는 것에 대한 오규원과 이케가미 선생의 감각 말이다. 세미나에서 탐구대상이 됐던 시구. "사람을 찾아오는 길 하나 / 불치의 병처럼 갈 줄 모른다" (시인 구보씨의 일일 14) 이부분이 떠올랐다. 우리가 어떤 길을 찾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길이 사람을 찾아온다고 시인은 말한다. 언뜻 이해가 쉽진 않았다. 그런데 원전으로 오염되고 4대강으로 파헤쳐진 길이 우리 앞에 찾아와버린 현실이 자각됐다. 그 길은 불치의 병처럼 갈 줄 모르고, 사람들은 길에서 투병중이다.

희희락락 수다 떨다가 허리가 곧추 세워졌다. 할일 많은 세상. 가슴이 먹먹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의 물음. 하고싶은 일, 하던 일 밖에 할수 없을 뿐인데 국가 혁명 자본을 넘나드는 말 쓴 자신이 부끄럽다고 큰 슬로건은 자제할 거라고 추장은 말했다. 난 현실에서 작동하는 언어를 쓰는 건 중요하겠지만, 그렇다고 생활캠페인처럼 내주변부터 바꿔보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슬로건을 접지 않겠다고 했다. 이 남루하고 둔감한 세상. 말이라도 아름답고 당당하게 쓰고 싶은 거다. 나도 안다. 우리가 무슨 혁명동맹도 아니고, 연구실의 일상은 지나치게 조용하고 단조롭다. 콩나물 머리를 뜯고 설거지를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고 커피 한모금 마시고 회의하고 때로 싸우고 때로 웃고. 책 몇장이랑 시 한쪽 읽는 게 전부다.

그런데 그게 또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오며가며 마주치는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생각이 다른 옆자리 동료와 화내지 않고 마음의 결을 맞추고 끼니 거르지 않고 밥 챙겨먹고 커피를 음미하고 상형문자 같은 시인의 말을 헤아리는 일이 말이다. 대충대충의 유혹이 꼬리친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나를 바꾸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있겠지만, 또 원리상 나를 제대로 바꾸면 세상은 저절로 바뀌는 거다. 광장으로 뛰쳐나가기는 쉬워도 일상을 지키기는 어렵고 고백하기는 쉬워도 그대로 있어주기는 어렵다. 시세미나 폭풍감동을 시작으로 원전을 거쳐 R의 나아갈바를 모색했던 토킹어바웃의 결론은 이렇다. "대충하지는 말자. 작게할 지언정" 




   장필순 '그대로 있어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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