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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막말의 우정전선


며칠 속이 시끄러웠다동료들 사이 의견차이다. 한 동료가 쥐 사건의 의미의 재정립을 제안했다. 입장이 갈렸다. 쥐 사건이 나한테는 동료를 잃은 벌집 쑤시는 것 같은 아픈 기억인데, 누구한테는 유쾌하고 유의미한 정치적 싸움이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관점이 다르니 기억이 다르고, 기억이 다르니 판단도 다르다. 공허한 말들이 허공을 오갔다. 밥 먹고 책 읽고 글 쓰는 이들인지라, 논쟁이 붙으면 현란하다. 예상대로 그와 그는 정결한 언어와 논리로 매끈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 피아노 건반처럼 가지런한 언어들을 보자니 착찹하고 속상했다. 현실은 남루하여도 글발은 아름다워라. 그것은 불편한 진실을 봉합하는 아니 피해가는 기술의 탁월함으로 읽혔다. 순간, 동료들을 남처럼 불신했다.

거의 동시에 반성했다. 나도 저렇게 글 썼나? 이래서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매끈한 글은 때로 초라하다. 중절모에 보타이에 백구두 차림처럼, 영혼이 없다. 갑자기 공부가 미웠다. 우리가 더 읽고 더 생각하는 까닭은 관계적 사고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다. 인식의 지평 확장이 타인에 대한 고통의 감수성을 키우는 일이지 자기합리화의 철옹성을 쌓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하루를 견디고 다음 날. 전화질과 편지질로 따졌다. ‘내 느낌을 전달했다. 장 보러 백화점 갔다가 주차장에서 차 세워놓고 통화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중요한 일은 주차장에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삼십여 분. 상대방 말 잘라가면서 떠들다보니 남의 허점만큼 내 논리의 모순도 알게 됐다. 싸우면서 누그러지는 이치다.

또 한 동료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글은 말쑥하였으나 동료를 이해하려는 마음은 한 자락도 보이지 않았고 그런 태도 얄밉다고 썼다. 적나라한 표현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괜히 보냈나 후회하는 동안 답이 왔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럴 사람으로 안 보였다. , 그럴 사람이 그러면 화도 안 났겠지. 대면이든, 전화통화든, 서신교환이든 에너지가 독이 될 때 아픔의 강도는 비슷하다. 이성적인 언어가 감성적인 언어보다 더 예의바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상처 주지 않고 지혜롭게 말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이 정도를 상처로 느낀다면 그건 너무 나약한 신체다. 관계의 적대와 긴장을 두려워하는 소심함이 문제가 아닐까. 니체 말대로 봉합된 우정보다 드러난 적대가 낫거늘.

만약이다. 억양도 자분자분 표정은 고상고상. 내가 분노폭발을 모르는 지혜의 여신이 될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견적이 크다. 나는 육아를 거치면서 팔뚝만 굵어진 게 아니라 걸음걸이도 빨라졌고 목소리도 커졌다. 늘 시야권에 널어야할 빨래가 있거나 끓어 넘치는 냄비가 있는 기분이다. 어수선하다. 삶의 속도가 사유의 속도다. 그러니 사유체계가 바뀌려면 말투, 식성, 걸음걸이, 육아 등 생리적 조건과 삶의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 성형수술처럼 돈 모으고 휴가 얻어서 단기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래도 변신에 성공했다고 치자. 생사초탈 국면에 접어들어 대인배로 환골탈태. 마침내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고 아무 아픔도 겪지 않는다면 과연 그 삶이 행복할까. 왠지 쓸쓸하다는 생각에 이르자 지금의 이 작은 고통이 새삼 소중했다 

누굴 아프게 할 수 있는 것, 누구로 인해 아플 수 있는 것. 그건 그만큼 존재와 존재가 가까이 있다는 증거다. 그 간격이 감옥처럼 갑갑하다가 이불처럼 포근하다가 널을 뛰어서 문제지만. 약간이 슬픔과 약간의 행복을 공급하는 동료들이 일상의 중심을 세워주고 사고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처럼 말이다. 코뮨적 일상에서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고 살 수 없다면, 아픔을 두려워 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다. 잠깐 마음먹었던 묵언수행 계획은 철회. 일단은 막말의 우정전선을 구축하고, 삐지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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