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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김수영은 김수영을 반성하지 않는다


강가도 좋고 산속도 좋고. 자연의 품에서 벗들과 둘러 앉아 시를 낭송하는 풍경을 꿈꿔왔다. 지난 6월 한강둔치에서 강가에서를 낭독했다. 강에도 나에게도 할 도리를 다한 기분이었다. 봄이면 봄시. 산에 가면 산시. 사랑하면 사랑시. 슬프면 술시. 정직한 산출이 즐겁다. 7차시 수업에 남산에서 시수업을 계획했다. 이 수업을 끝으로 미국으로 돌아가는 냥냥님이 야외용 미니 도시락 17인분을 낑낑 들고 나타났다. 일동 감탄하고 환호했다. 방산시장에서 도시락 용기를 사다가 엄마랑 준비했다는데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나 보던 도시락 비주얼을 자랑했다. 수업시간마다 간식이 하도 색다르고 풍부하여 식도락 동호회로도 손색없다했거늘, 냥냥표 도식락은 미식가의 자부심의 궁극을 선사했다 

1교시 묘사하기는 교실에서 마치고 2교시 과제발표는 남산이다. 연구실에서 두 정거장 남짓. 발아래 서울 풍경을 두고 직통으로 쏟아지는 태양빛을 맞아가며 돼지소풍처럼 줄지어 걸었다. 나무계단 올라 벤치와 벤치 사이 돗자리를 폈다. 시와 에세이를 읽었다. 그런데 방해꾼이 나타났다. 모기 녀석. 사정없이 웽웽 거리고 인정없이 물어댔다. “산모기는 군화도 뚫는다고 말한 한준씨가 스마트폰 모기퇴출 앱을 가동했다. 모기를 쫓는 기계음과 시를 읽는 사람의 목소리가 정답게 교차했다. 수샘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읽고 쓴 과제를 발표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과 반대로 진행되는 일을 만날 때 그 길이 틀렸다고 말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냥 누군가 틀렸다고 크게 외칠 때 마음속으로 공감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50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20원 받으러 세 번씩이 나온 야경꾼을 증오하는 모습이 자기 멋대로 운전하는 차를 보면서 여지없이 빵빵거리며 손가락질 하는 나를 보는 듯합니다. 모래만큼 먼지만큼 작은 자아. 깰 수 없는 자신의 벽을 가지고 절정에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는 것도, 세상의 모든 벽을 문으로 뚫고 나가는 혁명적 삶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고 힘겹습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김수영의 유명한 시에 감응한 글이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쳐온 그다. 우리나라 제도교육에서 제 정신으로 아이를 가르치면서 살기위해서는 얼마나 큰 존재혼란을 경험해야할지 짐작이 간다. 혁명의 절정에 서 있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 있는 삶도 고통스럽다고 말할 때, 그래서 가슴에 잔잔히 이는 것이 있다. 수샘은 다음 주 결석했다. ‘선행학습 사교육 유발하는 학교수학시험 실태조사 기자회견보도사진에 그가 있다. 연구년을 맞아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그 때야 알았다. 모래만큼 작은 그가 벽을 흔든다.

주말에 고향친구들이 올라와 택시를 탔다가 바가지요금을 당한 명순씨. 4000원 초과요금에 분개한다. 매일 뉴스에서 접하는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무관심하지만 내가 겪은 작은 일에라도 분노하고 고쳐나가는 게 사회구성원으로서 최소의 몫이라고 썼다. 누군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작은 일에 분개하면 거기에 힘을 다 쏟아서 정작 큰일에도 분개하지 못하는 거 아닐까. 논의가 오갔다. 작은 일에 분개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작은 일에 분노해보아야 큰 일에도 분노하는가. 그렇다면 작은 일과 큰일의 경계는 무엇인가. 정답 없다. 오직 살아가면서 매번 정답을 발명해야하는 삶의 과제다. 그 난해함과 헷갈림을 시로 풀어냈던 김수영은 그렇게 정립된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 괴로워서 또 몸부림쳤다.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구름의 파수병>

오후 5. 냥냥님 송별회를 위해 장소를 옮겼다. 치킨에 생맥 한잔. 스페셜 도시락에 걸 맞는 스페셜 치킨을 위해 부암동으로 공간이동. 치킨과 감자, 골뱅이와 소면을 맛나게 먹었다. 선하게 피어나는 얼굴들. 한준씨에게 치킨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인 없다는 디씨 치킨갤의 명언을 배웠다. 일부는 집으로 나머지는 카페로 갔다. 문을 열자 뜨거운 커피바람이 분다. 어둑한 조명 아래 에디오피아시다모를 음미했다. 위장이 고요해진다. 시가 들어갈 마음자리가 보인다. 남산에서 못 다한 수업을 하자니까 다들 진짜 할 거냐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돌아가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김수영 시 낭독하기. 소수정예반 수업이 시작됐다 

문학평론가를 꿈꾸는 취중진담님은 김수영 평전, 시집, 수필을 섭렵하여 글을 쓴 적이 있는 전문가. 그가 교사가 됐다. <신귀거래3-등나무>는 완전 어려운 시인데 나름의 독해법을 들려주었다. 연을 나누고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에 밑줄 그으면서, 우리는 감탄했다. 어쨌거나 정답은 심리적 안도감을 제공한다. <절망>의 재발견.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로 끝나는 짧은 시. 비교적 이해가 쉽다. 반성하지 않는 것들의 목록. 풍경-곰팡-여름-속도-절망. 공통점이 무얼까. 반성은 돌아봄. 멈칫거림. 주춤거림이다. 그런데 풍경은 스스로 무한정 넓어진다. 곰팡의 번식력도 막을 수 없다. 속도의 가속성과 절망의 나락행 등은 주춤거림을 모른다. 절망과 대결하여 심연에 이르렀을 때 희망을 찾아내야하는 운명을 김수영은 이렇게 노래한 거다. <꽃잎2>도 같은 시다. 금이 간 꽃을 주라고 하고. 떨리는 글자를 믿으라하고,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라며, 보기 싫은 노란 꽃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수영은 6.25 때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이념에 따라 목숨이 살처분 되는 과정을 생생히 목도했다. 이념을 따르면 죽고 살기 위해선 신념을 배반해야하는 상황은 레비나스 말대로 존재가 오그라드는 체험아닌가. 살아가기 위한 자기 설득, 생에 대한 구토, 비루한 타협에서 한시도 자유롭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김수영의 파토스, 김수영의 존재윤리가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김현은 말했나보다. ‘그의 시가 노래한다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절규한다. 시집을 덮으며 깨달았다. 김수영은 김수영을 반성하지 않았구나. 20대 친구들은 수능국어에서 접한 김수영과 다르다고 신기해했다. 국문학도 출신 냥냥님은 김수영을 전형적인 지식인이자 계몽적인 시인으로 생각되어 불편했는데 그의 시가 따뜻하게 다가온다, 다시 읽고 싶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가슴에서 한 시인이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