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의 최전선

사랑의 속도


방금 전에 217명 글의 코멘트를 마쳤다. 일주일이 걸렸다. 1기 때는 하룻밤을 새가면서 하던 일이다. 그에 비하면 비효율과 게으름의 극치다. 어쨌든 나에겐 새로운 실험이다. 글쓰기의 최전선 1기 수업을 마치고 2기를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를 고민했다. 1기 수업할 때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하려고 작정했었고, 최선을 다했다. 스무명도 넘는 것을 과제 전문을 고쳐서 다시 올려주고 꼼꼼히 피드백에 임했다. 후회 없는 사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나의 열심히가 올바른 사랑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자아비판을 하자면, 넘치는 사랑이긴 했으되 무모한 사랑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쉬운 여자가 쉬운 사랑을 하는 걸까. 암튼 난 서툴렀다. 뭐가 부족했냐하면 사랑의 속도. 아니 리듬 맞추기. 이게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건데 늘 놓친다. 양으로 승부한다. 부끄럽다. 지난번에도 가급적 신속히 일일이 글을 봐주었는데 그 태도는 어떤 면에서 자기중심적이었던 거 같다. 내 입장에서 주어야할 사랑의 몫을 생각했지 상대방의 조건이나 능력은 고려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끼어들 틈을 마련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일부러 사악한 마음먹은 건 아니지만 어쩌면 내게는 과적한 업무 해치우듯 글을 대하는 관성이 생기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는 과도한 부지런함은 죄가 된다. 지나친 사랑이 독이 되듯.

2기는 느긋하게 소통하기로 전략을 바꾸었다. 수강생이 전직 현직 글 쓰는 이들의 비중이 높았다. 내가 글쓰기 강좌 한다고 불러 모으는데 왜 내가 배워야할 사람들이 오는지 민망하고 미안하다. 이 고급한 인적자원을 활용하고자 수업시간에 제비뽑기를 했다. ‘댓글 마니또를 정하고 서로 코멘트 달아주기 놀이. 자기가 스승이 되어보는 것만큼 좋은 공부는 없다. 내가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과 친구가 되어주도록 권했다. 나는 댓글이 달리는 대로 몇 편씩 보충 총괄 의견을 남겼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보아주니 비평 내용이 풍부했고 상호친밀도가 높아졌다. 잘 한 거 같다. 사랑의 속도는 얼마나 중요한가. 다짜고짜 사랑하기는 쉽지만 지혜롭게 사랑하기는 어렵다. 어떤 문제가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너무 빨리 해치우듯 해결하는 것보다 사안에 따라서는 오래 안고 가는 게 더 좋을 수 있음을 배웠다.

2기에 탈학교 청소년이 온다. 군산에서 왕복 7시간 걸려서. 고등학교 반 배정표까지 받아두고 안 갔단다. 머리 자르기 싫어서 시험으로 수렴되는 교육이 싫어서. 글쓰기 강좌는 엄마의 권유로 왔다고 한다. 또 문창과 박사과정 밟다가 그사세의 숨 막히는 분위기가 싫어서 뛰쳐나온 문학평론가 지망생이 있다. 또 한 청년.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 신입기자인데 한겨레 글쓰기 강좌 교육 받다가 맘에 안 들어서 자퇴한 이다. 첫날 자기 소개할 때 대략 난감했다. 왜 다들 뛰쳐나온 거야 싶으니;; 여성민우회에서 수업 받았던 선생님이 지난번 강좌가 짧아서 아쉬웠고 다양한 세대들과 배우겠다며 다시 오셨다. 예고 없는 재회. 완전 놀랍고 반갑고 부담스럽고 흐뭇했다. 나로서는 이래저래 꾀부리지 말고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들이 생겼다.

첫 과제를 받아보니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무탈하게 모범생으로 제도화된 삶을 살았을수록 글감의 빈곤을 호소했다. 이력서만 남고 휘발되어버린 청춘시대를 애도했다. 고통스러운 젊은 날을 보냈어도 글쓰기는 버겁다. 글쓰기 자체라기보다 너도 나도 자기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을 어려워했다. 안 쓰던 근육을 쓸 때의 통증이 오는 것일 게다. 회피하는 듯도 했다. 가령, ‘나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나는 방송일을 하고 싶었다.’ 등등 사실 층위에서 진술을 마친다. 더 심연으로 나아가서 진실층위를 관찰하지 않는다. 나의 욕망이나 느낌은 당연시하고 통과한다. 헌데 나는 왜 방송일을 하고 싶었는가. 왜 서울에 굳이 오고 싶었는가. 나는 왜 그것을 좋다고 생각했을까. 왜 경쟁이 싫었을까. 그 물음에서부터 글이 시작되어야 하거늘, '그랬다'에서 글을 끝내버린다.

대부분 자기 경험을 신뢰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다. 자신의 감각이나 경험, 감정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쉽게 이해한다. 그런데 그것이 이해일까. 통념과 교양에 꿰맞춘 것이다. 잘 들여다보면 나의 생각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니체도 말했다. “첫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과한 것이다라고. 자기세계만큼 비밀스러운 미지의 영역이 또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내면탐사만으로도 글감은 충분하다. 자기 고유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도 보편타당한 글쓰기를 한다는 것,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글을 쓴다는 것은. 마치 청순하면서도 섹시하라는 요구만큼 난감하다. 앞으로 8주. 그 미적과제를 다함께 수행하는 일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