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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글쓰기수업에 관한 단상


글쓰기의 최전선 2기 수업 막바지에 방황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9월이 되자 네댓 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괄 결석했다. 추석을 지나면서 수업과 과제를 단체로 등한시했다. 묘한 현상인데 친해지면 느슨해진다. 취업준비 때문에, 논술 때문에, 학기가 시작돼서, 업무가 바빠져서 등등. 저마다는 이유가 절실했고 불가피성을 나도 알지만 빈자리가 커지면 당혹스럽고 자존심 상했다. 그들은 빠졌고 나는 삐졌다. 적어도 수업하는 기간만큼은 삶이 긴밀하게 엮여있다고 생각한 나는, 그들 삶에도 글쓰기수업이 일순위가 되기를 욕심냈던 나는, 10주간 어떤 예외상태도 없기를 바랐던 나는, 공부를 할수록 더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게 꿈인 나는, 보기 좋게 차인 꼴이었다 

즉시 분석에 들어갔다.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무방하다면 그건 안 해도 된다는 얘기다. 하나마나한 무가치한 일을 내가 하고 있었는가. 글쓰기수업의 커리큘럼을 다시 짜야할까? 아예 실용강좌로 자유기고가 과정을 할까. 그럴 순 없었다. 제각각 직업과 목적이 다른 그들에게 일괄적으로 글쓰기수업을 한다는 게 무리였을까. 그들에게 글쓰기 수업은 무엇이었을까. 언제든 떼어버릴 수 있는 일회용 반창고? 잠시 쉬었다가 미련 없이 떠나도 좋은 대합실 의자였나. 필요한 것만 챙겨 가면 그만인 지식거래였을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돌아눕길 며칠. 그러다가 점차 누그러졌다. 바람처럼 오가는 인연. 사람에 집착하지 말고 삶에 충실하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늙은 여우처럼 상처받지 않는 법을 이미 터득해버린 거다 



다들 바쁘다고 하니 엠티를 연천에 가지 못하고 가까운 난지캠핑장으로 갔다. 그래도 열두 명이나 모여 마지막 에세이를 읽고 기념촬영 하고 숯불고기도 구워먹었다. 밤에는 최후의 8인이 호롱불 아래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오붓한 분위기에 취해 나는 심적 방황을 터놓았다. 유미샘이 말을 받았다. 막판에 바빠서 빠졌지만 매주 글을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됐으며 1년 반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었노라고 말했다. 또한 어젯밤에 작가 세 명의 난해하던 텍스트가 기적처럼 풀렸다고, 그래서 오늘 아침 베란다 밖 풍경은 어제와 같지 않더라는 환희에 찬 고백이다. 덩달아 가슴이 설렜다.  그간의 고민이 냉큼 사라지는 간증아닌가!

어제는 삼선동 연구실 집들이 날이다. 음식 준비하는데 2기생 반짝이에게 전화가 왔다. 방금 회사를 그만두었단다. 나의 예언대로 됐다고 그래서 선생님 생각나서 바로 전화하는 거라고 말했다. 교양시사프로그램 방송작가를 하던 친구다. 무려 8년간 지배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공익광고 같은 글을 써버릇했고, 그런 소모성 글이 갖는 한계를 스스로 절감하고 글쓰기수업에 왔다. 문장이나 구성은 매우 세련됐으나, 글이 심연을 파고들지 못하고 겉돌았다. 자기 액면을 보여야 하는 과제를 힘들어했다. 니체말대로 자기를 파괴해야 창조할 수 있거늘 자기해체에 애를 먹는 경우였다. 가치 있는 글을 오래 쓰고 싶으면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한다고 거듭 권했다. 때마침 덜 구속되고 더 깊이있는 작업이 가능한 마땅한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생의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누가 나를 떠올렸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어떤 길을 가고 있으면 다른 길은 안 보이는 법이다. 있던 곳을 벗어나야 다른 세상이 열린다. 야무지고 당차고 솔직한 반짝이가 더 넓은 세상에서 빛을 내리란 확신이 들었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꼬마가 취직했다는 소식까지 어제 들었다. 이래저래 기뻤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부제가 '모든 사람믈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다. 이 구절에서 글쓰기 수업의 존재이유를 찾았다. 갑남을녀 모든 사람을 위한 수업이지만 동시에 자기 글(삶)은 스스로 찾아야한다는 의미에서,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어야 맞는 거다. 그 위험-모험을 즐겨야 한다. 나 부터가.

오뎅꼬치에 오뎅을 100개 넘게 끼우면서 반성했다. 출석여부에 일희일비 하던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내가 외로움에 얼마나 취약한지, 평가받는 일에 얼마나 소심한지, 인정욕망에서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 글쓰기수업을 통해 처음알았다. 양적으로 몇 명을 졸업시킬 것인가에 연연하지 말리라 다짐했다. 대인배로 살자. 한두 명이 남더라도 삶을 던져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동료가 있다면 거기가 내 있을 곳이다. 무리짓지 말자.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면 삶을 견디지 못하는 거다. 내 배를 불리는 일이 아님에도 삶을 걸고 하고 싶은 일이면, 옳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