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 김종삼

[올드걸의시집]

샘물이 맑다 차갑다 해발 3천 피트이다

온통

절경이다

새들의 상냥스런 지저귐 속에

항상 마음씨 고왔던

연인의 모습이 개입한다

나는 또다시

가슴 에이는 머저리가 된다


- 김종삼 시집 <북치는 소년> 민음사



시 한줄 읽고 음악 한곡 찾아 듣고 원고 한 줄 쓰면서 계속 시계를 힐끔거린다. 회의하러 가야하는데 회상을 듣고 있다. 9시 반. 그래도 회의는 가야한다는 마음에 몸을 일으켰다. 4월 22일 슬픔과 충격을 가누지 못해 결석을 해버렸었다. 영하 10도 이하의 엄동설한에도 빠지지 않았던 나. 근면성실 외길인생인데.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고사하고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버스정류장.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찾는데 없다. 오후 2시에 약속 땜에 핸드폰을 챙겨야했다.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나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컴퓨터를 켰다. 위클리 게시판에 몇줄 남겼다. '내일 강의안과 인터뷰 원고를 아직 못 썼는데 주말에 시댁을 가야합니다. 냉장고는 텅 비고 세탁기는 꽉 차고 살림이 엉망입니다. 열흘 째 혓바늘이 돋아서 가라앉질 않고 아무래도 제 삶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전사들에게 부끄럽습니다. 양해바랍니다.'  규호에게 전화가 온다. '보류-끊기' 버튼을 누른다.  어디냐고 문자가 온다. 못본 척 하려다가 게시판에 결석사유를 남겼다고 문자를 넣었다.

인터뷰 강의 요청했던 김모씨에게 문자가 온다. 정식 이력서가 있으면 보내주시란다. 없다고 했다. 편집회사 전화번호가 뜬다. 사보일을 95%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나를 찾는 에디터는 신뢰관계가 돈독한 친구다. '매우 급한 취재'라는 전보다. 앰블런스 신호음같이 요란하다. 저절로 지쳐 끊기길 세 번. 거절하기 미안해서 못 받았다. 오후의 약속도 어찌어찌 자연 취소됐다. 박모씨에게 전화가 온다. 회의하다가 물어볼 것이 있는 모양이다. 외면했다. 못된 년의 날. 부재중 전화의 난. 타인의 개입을 원천봉쇄 하는 건 처음이다. 음악 듣고 원고 쓰고. 장을 보려고 현대에 갔다. 시동 끄고 내리려다가, 오디오를 다시 켰다. 3만원 주유하고 공짜로 받은 싸구려 커피가 남았다. 달고나처럼 단 그것을 마저 마시며 노래를 듣는다. '괜찮아요. 나도 예전엔 누구의 마음 아프게 한 적 많았죠.' 궁상스러운 노랫말. 송곳처럼 파고든다. 문자가 온다. '쉬라고 하고싶은데 쉴 수 없는 상황이고.. 원고정리 잘하시고 내일 봐요~' 늘 미안한 지연씨. GS칼텍스 주유소 휴지 한장 꺼내 눈물을 찍는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괜히 서럽다. 오늘 따라 가슴 에이는 머저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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