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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인터뷰

박준상 블랑쇼연구자 - 철학은 ‘자기시대’ 아파하고 발언하는 것



2011년 4월 7일. 그날은 일본발 방사능비가 전국에 내린다는 일기예보로 도심마저 한산했다. 홍대 역 부근 ‘다중지성의 정원’에서는 <공동체, 타자, 글쓰기: 모리스 블랑쇼를 중심으로> 두 번째 강좌가 열렸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우산을 접으며 들어왔다. 일일 수강신청을 마친 나는 그들 틈에 끼어 앉았다. 일종의 잠입취재다. 궁금했다. ‘프랑스 지성계의 얼굴 없는 사제’로 불리는 모리스 블랑쇼. 그의 자장에 끌려 모여든 이들은 어떤 표정일까, 침묵의 사유를 펼치는 블랑쇼에 대해 박준상은 어떤 언어로 풀어낼까. 4월의 검은 목요일. 비와 블랑쇼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런 공간, 이런 날씨는 나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이 나에게 침투하죠. 공간의 문제는 정서적인 상태에 영향을 줍니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은 기분이 검은, 짙은 회색으로 채색됩니다. 공간은 대상이 아니에요. 이미 나와 뒤섞여 있어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이처럼 우리가 항상 마주하고 있는 것,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언어 이전, 인식 이전에 그저 펼쳐져 있음. 동사성. 무차별적 주어짐. 인간 존재의 근원적 수동성을 말하는 건데 이 뻔한 얘기를 하이데거가 왜 했을까요?”

그가 손을 뻗어 백색 글씨로 또박또박 써내려 간다. 공간, 존재, 죽음. 군더더기 없는 그것. 철학 본래의 순도를 간직한 개념들에서 여러 갈래로 이야기가 피어났다. 십여 명의 수강생은 희붐한 안개 같은 블랑쇼의 사상에 골똘히 빠져들었다. 칠판 한 가득 블랑쇼, 하이데거, 레비나스, 니체, 데리다가 살아서 웅성거린다. 블랑쇼와 하이데거의 ‘죽음철학’을 비교 설명하는 그의 음성은 높낮이 없이 세 시간을 이어졌다. 블랑쇼가 ‘죽음’에 천착한 ‘긍정’의 철학자였다, 죽어가는 자는 타자와 만난다,는 미로처럼 복잡하던 사상이 마지막 한 마디에 선명해진다. “말하자면 블랑쇼는 단지 '삶’을 긍정했다기보다 ‘우리의 삶’을 긍정한 철학자입니다.”

키에르케고르에 탐닉한 20대


4월 12일, 봄기운 산뜻한 노란 화요일. 수유너머R 공개세미나 참석을 위해 그가 연구실을 방문했다. 동그란 안경태와 전신 검은색 옷차림, 겸손한 억양은 여전했다. 책날개에서 보았던 까뮈를 닮았다. 심오한 존재자의 ‘태’와 고독한 목소리의 ‘톤’을 지닌 그. 천생 철학자의 아우라가 느껴지지만 “나는 일찍이 철학도를 꿈꾸지 않았다”며 멀거니 미소 짓는데, 어찌하랴. 웃음마저 흑백이다.

박준상은 대학에서 수학과를 대학원에서 미학과를 전공하고 파리 8대학 철학과에서 블랑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직선이 아닌 지그재그로 철학이란 학문에 가닿은 그. 떡잎은 평범했다. 성장기에 단 일회도 학자나 소설가를 동경해 본적 없으며, 천국을 도서관으로 상상할 만큼 책벌레도 아니었다. 그저 “고2때까지 시간이 남아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었고 헤밍웨이와 레마르크를 좋아하는 조용한 소년이었다.

철학도의 본능이 드러난 시기는 재수생 때. 당시 분석철학이 유행했다. 철학을 잘하려면 수학을 잘해야 한다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그는 수학과를 지망했다. 대학에 들어와 부전공인 철학공부에 더 무게비중을 두었고 특히 키에르케고르에 푹 빠져 살았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비롯하여 종로서적에서 나온 키에르케고르 책을 모조리 읽었으며 영어로 된 저서까지 섭렵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왜 그렇게 키에르케고르에 끌렸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는 점이에요.(웃음) 대학원 갈 때는 미학이 철학의 연장이라고 해서 미학과를 택했죠. 전공과목 선택이 즉흥적이고 우발적이에요. 항상 몇 개월 전에 결정해요. 프랑스 간 것도 거기 가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외국에서 한번 살아본다는 동경이 컸어요. 한국에 있는 괴로움도 있고. 그 당시에 누구나 느끼는 가족, 사회, 교육의 억압적 현실이 갑갑했으니까.”

지도교수 랑시에르 “중요한 것은 정치다”

‘끌림과 우연’이 지배한 청춘시대. 종착역은 프랑스 파리였다. 유학생활이 길었다. 1994년 1월에 파리로 떠나 2001년 11월에 귀국하기 까지. 만으로 꼬박 8년을 보냈다. 파리 8대학은 프랑스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대학이다. 박준상의 스승은 우리도 아는 유명한 철학자. 지도교수는 자크 랑시에르, 논문보고자는 장-뤽 낭시다. 국내 학계에서는 연예인급 지명도를 자랑하는 그들과 사제지간이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나, 막상 본인은 이런 반응이 멋쩍은 듯 안경태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운을 뗀다.

“2008년 랑시에르가 한국에 왔을 때 ‘뜨거운 반응’이 놀라웠어요. 음, 프랑스에서 철학자를 받아들이는 것과 한국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차이가 있어요. 프랑스 사람들은 그냥 그 사람이 하는 말들, 사상가가 던지는 문제들만을 보죠. 우리나라에는 이미지가 어느 정도 부풀려져서 들어오는 것 같아요. 우리도 이영희나 황석영 같은 여러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 자체가 포장되는 일은 별로 없죠. 근데 외국 사상가는 브랜드화 되는 경향이 있어요. 저로서는 서양철학자가 신비화되는 것이 의문입니다.

그들의 위상을 폄하하려는 의도나 민족주의적 입장은 아니고요. 한국 것을 찾자는 것도 자존심 문제도 아닌데. 중요한 것은 자존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낭시나 랑시에르 생각의 근원은, 프랑스 사회에서의 움직임으로 철학을 해요.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문제가 특수한 것이고 우리가 깊숙이 사고하고 방향 잡아야 하고,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낭시나 랑시에르 두 분 다 삶도 그랬고, 사상의 핵심은 정치적인 것이에요. 랑시에르가 저한테도 말했죠.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치다, 라고요.”

낭시 역시 현실에 뿌리박은 정치사회적 갈등과 힘에 근거해 철학을 전개했다. 박준상이 번역한 <무위의 공동체> 옮긴이 해설을 참조하면 ‘장-뤽 낭시는 주로 독일철학, 즉 독일낭만주의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자신의 사유의 기반으로 삼았으며, 교조주의적 마르크주의 몰락 이후에 가능한 공산주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제로 설정하’는 철학자이다.

낭시는 일전에 박준상에게 보낸 메일에서 “한국의 분단 상황이 공동체, 민족, 국가, 조국을 새롭게 사유하는 실험실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낭시는 철학자가 아닌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도 ‘사람 좋은 타입’이라고 그는 귀띔한다. 모든 사람이 낭시를 좋아하고 낭시도 모든 이에게 공정하다. 평소 아무리 조그만 게 있어도 꼭 답을 해주려 애쓴다고. 가령, 지난번 논문 심사가 끝나고서 그가 인사동에서 나무필통을 사서 보고자들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낭시가 답례로 책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신뢰가 가는 분”이다.

철학은 ‘자기시대’ 문제 아파하고 발언하는 것

좋은 스승, 좋은 친구들과 좋은 공부를 하긴 했지만 어인 일인지 그는 파리에서 “행복하지 않았다”고 터놓는다. 낮은 하늘 아래 우울한 공기가 드리워진 도시에서 거주한다는 것은 기형도의 말대로 ‘내 영혼의 검은 페이지’가 늘어가는 일일지 모르겠다. 게다가 “백지와 홀로 마주해 글을 쓴다는 것은 헐벗은 채로 부딪혀야 한다는 것” 아닌가. 때때로 급진적 외로움에 처하기 쉬운 유학생에게는 그저 한 갑의 담배, 서너 잔의 에스프레소, 간혹 심장을 간질이는 음악이 가까운 위로가 되어주었으리.


서로를 외롭게 향유하는 프랑스사람들.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을 가졌으나 오랜 역사적 투쟁에서 길러진 철학하는 자세는 본받을 만하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와 프랑스가 철학을 다르게 생각해요. 그들에게는 역사적 경험에서 철학이 전개되는 방식이 있어요. 피부로 느끼는 인간 정치의 문제, 내면에서 느끼고 문제화하죠. 루소를 기억해 보면, 프랑스 대혁명 당시 라틴어도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루소가 뭘 그리 알았을까요. 그는 단지, 자기 시대의 여러 가지 문제를 느끼고 공감하고 아파했고 직접적 느낀 것들을 글을 쓸 수 있었을 뿐이에요. 어찌 보면 단순한 형태에요. 현상이나 사건을 느끼고 문제화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직접 발언하는 게 철학인 거죠.”

박준상은 우리나라의 강단철학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논문심사에 들어가 보면 안타까움이 더하다. 학생들이 헤겔이나 들뢰즈를 정확히 읽어내려는 노력이 강하고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철학적 모델로서 들뢰즈와 헤겔 담론이 자리 잡기 위한 시도는 부족한 현실이다. 그는 우리도 정치현실에 기반한 철학을 위해서는 단수적singulier 경험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며 프랑스 사람들이 심성이나 민족성이 남달라서, 그들이 특별히 정의롭고 정치의식이 대단해서 철학이 융성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들의 역사적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프랑스 대혁명 때부터, 통치자에게 개 겨서 승리해온 역사가 있고, 통치자는 잘못하면 루이16세처럼 목이 날아간다는 것을 알죠. 프랑스에서 부모들이 고등학생 자식에게 너는 왜 데모 현장에 나가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그런 정치적 발언을 통해 이익을 얻어왔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근현대를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발언하면 ‘죽거나 감옥가거나’ 그랬잖아요. 그 차이지요.”

나는 블랑쇼주의자가 아니다

박준상은 유목형 연구자다. 학사, 석사, 박사, DEA(박사예비과정), 포스트 닥터까지 학위가 5개인데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받은 적이 없다. 서울 태생인지라 지연이 없고, 떠돌았기에 학연이 없다. 그나마 동문회는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암울한 미래’를 점칠 수밖에 없었다. 감히 철학판에 있을 생각조차도 못했다. 서울대부터 제주대까지 철학과가 있지 않은가. 한국 대학 철학과 출신이 아닌 사람이 철학과 교수가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 인복이 일복을 불러왔다. 귀국 후 전남대학교 철학연구교육센터 연구원으로 3년간 일했고 지금은 숭실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것은 순전히 ‘운’이다.”

“현실적 조건 때문에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살지요. 그런데 사실, 대학 ‘바깥에서’ 더 즐거움을 느껴요. 사진전 하는 친구 전시회 브로셔에 서문을 써주고, 수유너머에 공개 세미나 하러 오고, 다지원에서 강의하고 등등. 그런 것들이 훨씬 마음 끌리는 일이에요. 내가 배운 것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그런 거창한 의미보다 마음이 끌리니까요. 가만 보면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정상노선 벗어나는 걸 택했고 그런 사람에게 끌림이 있었어요.”

진중한 어법을 구사하는 그가 자주 쓰는 말이 세 가지 있다. ‘말하자면’ ‘우연’ 그리고 ‘끌림’이다. 말하자면 끌림이 우연을 만든다는 얘기다. 박준상이 블랑쇼를 공부한 것도 그런 경우다.


애초에 박준상의 사논문 주제는 엠마누엘 레비나스였다. 박사과정 3개월 뒤 지도교수 랑시에르를 만났다. 문학과 미학 공부를 주로 하는 랑시에르는 ‘내가 레비나스를 잘 모르는데 다른 것을 해보면 어떻겠느냐’ 권유했다. 그 상황에서 레비나스와 제일 가깝고 움직이기 쉬운 사람이 블랑쇼였다. 그렇게 ‘타의반’으로 블랑쇼를 택했다. 현재 자타공인 블랑쇼 전문연구자인 박준상은 그러나 “나는 블랑쇼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바깥에서> 서문에서 썼지만 저는 블랑쇼가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저한테도 블랑쇼 읽기는 사상이나 철학이라기보다는, 시나 예술이 할 수 있는, 말할 수 없는 게 말해지는 아주 독특한 독서경험이죠. 블랑쇼는 제가 가장 잘 소개할 수 있는 사상가에요. 단지 그 이유죠. 프랑스 철학자에 또 한사람 덧붙이거나 또 하나의 유행 만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블랑쇼를 국내에 소개하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은 그가 고전적인 작가라는 점이에요. 블랑쇼 읽는 분들께 바라는 게 있다면, 일시적 유행보다는 20-30년 지나더라도 독자들이 내면에서 경험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작가였으면 좋겠어요. 라깡이나 들뢰즈처럼 사상·철학의 측면에서 영향 준다기보다 까뮈나 괴테처럼,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블랑쇼가 기간 오래 두고 영향을 주는 철학자가 되면 좋겠어요.”

그에 따르면, 만약 블랑쇼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예술작품’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블랑쇼의 책을 늘 이해한다는 것은 어패가 있고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했다면 그것이 블랑쇼의 전부라는 것. 박준상 역시 블랑쇼 읽기는 이론을 알아가는 독서가 아니었고 말할 수 없는 게 알아지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것이면 족하다. “철학은 사람과 만나는 것이며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람과 함께 한다는 체험, 독서의 체험”이므로.

박준상은 지금까지 <바깥에서>(인간사랑)와 <빈 중심>(그린비) 두 권의 책을 냈다. <바깥에서>는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을 집대성한 책이다. 블랑쇼의 개념 ‘바깥Dehors’은 현실의 담론이 유예되거나 와해되는 지점으로 언어나 이념의 바깥에서 열리는 문학과 철학의 공간을 뜻한다. 2008년에 펴낸 <빈 중심>은 그가 전남대에 머물면서 쓴 ‘5.18이라는 사건에 대하여’와 니체, 말라르메, 바타이유의 예술론 등 ‘예술과 타자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달았다. 수유너머R 공개세미나에 온 어느 참가자는 “<빈 중심>이 작년에 읽은 책 중 최고였다”며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듯 블랑쇼 연구자로서 저술과 강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그이지만 외롭단다. “나는 너무 혼자다” “나만 너무 얘기한다”고 호소한다. 블랑쇼의 언어는 급진적인 힘과 명제를 초과하는 면, 운동성이 있다며 “누구나 읽을 수 있다”고 손짓한다. 그리고 소망한다. 들뢰즈와 라깡처럼, 블랑쇼도 누군가와 같이 연구하고 토론하고 발언하는 날을 말이다.

쥐 그래피티 법정에 그가 온 까닭은

스무 살 무렵, 우연히 시작된 철학여행이다. 마음의 끌림을 나침반 삼아 ‘이유도 모른 채’ 혹은 ‘타의반’으로 여러 철학자의 땅에서 머물다가 흘러갔다. 이십대의 키에르케고르, 삼십대의 블랑쇼처럼 사십대의 강물은 누구와 건널지… 요즘 그가 관심을 갖는 철학자는 루쉰, 그리고 독일낭만주의 창시자인 노발리스나 슈레겔 형제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박준상은 왜 철학에 끌리는지.

“철학하겠다고 할 때는 적지 않게 약간의 문제들이 안에 있었죠. 심하게 말하면 내면이 불구였다고 할까. 저는 자신에 대한 회의…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거죠. 사랑보다 집착하는 면이 있고. 지금까지도 벗어나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데, 인간 자체로서 저를 신뢰하지 않는 편이에요. 저를 사랑하려고 노력해요.

제게 철학에서 일관되게 끌렸던 것은. 구성적 긍정적 철학보다는 약간 내 안의 사람의 안을 후벼 파는 종류의 철학이에요. 자신을 엄격하게 바라보게 한다. 약간 회의주의와 맞닿아 있는 칸트 <형이상학비판>. 뭔가 적극적으로 얘기하고 비판하고 삐딱하게 보는 철학. 말하자면,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철학이요. 정치적 행동이 필요해요. 함께 힘을 합쳐 이루고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철학의 운명적 끌림을 묻는 질문에 정치적 공동행동 결의로 답하는 박준상. 동문서답 아니다. 그에게 언어를 통한 함께-있음인 ‘철학’과 나 아닌 우리의 삶에 대한 발언인 ‘정치’는 분리되지 않는다. 블랑쇼가 삶을 긍정한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긍정했듯이 말이다. 그는 지난 4월 22일 쥐-그래피티 3차 공판이 열리는 서울지방법원 서관 525호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잿빛 트렌치코트에 스카프를 두른 ‘까뮈 스타일’ 철학과 교수는 한 시간을 꼼짝 않고 ‘정치 현장’을 관람했다. 다중지성의 정원과 수유너머R에 이어 법원에서 그를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네 번째는 어느 ‘바깥에서’ 그와 마주치게 될까.

* 위클리수유너머 전선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