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노동자 몸값이 낮아지는 이유
자본론 부제가 '정치경제학비판'이다. 정치경제학은 부에 관한 학문이고. 그래서 자본론을 읽다보면 자본가에게 이 책이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맑스는 자본가가 어떻게 돈을 버는가 아주 집요하게 연구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한다.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늘리는 방법 중에 앞서 살펴본 대로, 단순히 노동일을 연장해서 이익을 얻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연적 육체적 한계가 있다. 하루가 24시간을 늘릴 수 없고, 안 재우고 일 시킬 수는 없다. 여기서는 큰 이익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뭘까. 노동력을 가치대로 지불하지 않고 임금을 싸게 함으로써 잉여노동을 증대시킬 수 있다. 이런 수법이 비일비재 하지만 <자본>론에서는 자본가의 도덕적 비열함을 논외로 한다. 맑스는 지극히 양심적인 자본가라고 가정하고 논의를 전개하며, 노동력을 제값 주고도 이익을 남기는 방법을 밝혀낸다.
바로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하루에 양말 1000개 만들던 것들 2000개 만들면 생산성은 향상되지만 상품의 가치가 저하되고 노동력의 가치도 저하된다. 상품가격이 내려가면 노동자의 몸값도 내려간다. 왜 그러냐 하면,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곡물값, 기름값, 교통비, 옷값 등 다음날도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유지비를 고려해 노동력의 가치가 책정된다. 오늘날의 최저임금 개념. 그러므로 물건 값이 싸지면 노동자가 일하는 부분 중 필요노동(임금으로 지급되는 부분)이 줄어들고 잉여노동이 늘어난다. 상대적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상품을 값싸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통해 노동자 자체를 값싸게 하기 위해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려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충동이며 끊임없는 경향이다.” (432)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노동생산성 발전에 따른 노동의 절약은 왜 노동일의 단축으로 이어지지 않는 걸까?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생산성 향상과 노동일의 단축이 무관하다." 그것은 애당초 노동일의 단축을 위해 노동생산성이 추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생산성이 10배 올랐다고 해서 노동시간이 1/10으로 감축되지 않는다. 경기가 침체되면 동료들이 해고되어 남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늘어난다. 호황에도 불황에도 노동시간은 줄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에게 유리한 일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 자본가는 왜 모아놓고 일을 시킬까?
자본론 1권(상)은 아직 본격적인 기계화 이전이다. 하지만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자본가가 무상으로 취할 잉여노동을 늘리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노동자가 한 곳에 대규모로 모여서 일하는 협업, 그 자체만으로도 자본가에게 유리한 변화가 나타난다. 작업하는 건물, 원료 보관 창고, 용기, 기구장치 등 공동사용으로 인한 생산수단의 절약은 자본가에게 이득을 제공한다. 생산수단의 절약은 상품의 가치 저하를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협업으로 인한 노동수단의 절약은 노동자들의 협동, 즉 노동에 내재하는 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본에 내재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협업할 경우 경쟁심 혈기 같은 정서적 자극이 일어나 생산이 촉진된다. 일명 시너지 효과. 이것이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다. 자본가의 잉여가치는 ‘결합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에서 상당부분 산출되지만, 자본가는 결합된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하는 것이아니라 개개의 독립된 노동자들과 계약을 맺고 임금을 지불한다. ‘시너지효과’ 부분은 지불 없이 바로 취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협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맑스가 계속 강조하는 부분이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다 다르다는 것. 노동도 예전부터 있었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은 그 의미가 다르듯이 협업도 그렇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다양한 형태의 협업이 존재했다. 그런데 과거 공동체들에서 협업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생산조건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천 같은 공유지에서 같이 노동하면서 돈독해지는 형태로) 그들이 여전히 공동체 관계를 끊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자본주의에서 협업은 이 관계들의 해체를 전제한다.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사적인 고용이 일어난다. 자본주의적 협업은 실제로 과거 사회의 협업과 대립하면서 발전한다.
# 부분노동자화, 전체를 감각하는 능력을 잃다
매뉴팩처는 공장제수공업이다. 두 가지 기원이 있다. 1) 여러 종류의 독립적인 수공업 노동자들이 한 자본가의 통제 아래 한 작업장 아래서 결합돼 일한다. 예를 들어 마차를 만들기 위해 바퀴, 자물쇠, 가구, 재봉, 유리 등의 수공업자들이 모이는 경우. 2) 바늘을 만드는 수공업 노동자들을 동시에 한 작업장에 고용하는 경우.
각기 독립적 수공업자들을 모아놓은 경우 오래지 않아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처음엔 그들은 독립된 작업을 했던 사람들이지만, 점차 일을 전체적 범위에서 기획하고 수행하는 습관과 능력을 상실한다. 신체의 변화. 혼자 일할 때나 모여서 일할 때나 같은 자물쇠를 만들더라도 점차 ‘부분적인 전문’ 기능자로 전락한다. 두 번째 경우도 마찬가지. 그들은 독립된 수공업자로 작업하다가 많은 양을 생산할 경우 작업을 분화한다. 바늘 2000개를 만들기 위해서 누구는 쇠를 끊기만 하고 누구는 구멍만 내고 누구는 뾰족하게만 하는 식으로.
이처럼 매뉴팩처는 생산과정에 분업을 도입하고 발전시키게 된다. 인간을 기관으로 하는 생산 매커니즘이 출연한다. 매뉴팩처의 토대는 수공업이다. 따라서 각 작업은 노동자가 자기 도구를 사용할 때 발휘하는 힘과 기교와 민첩성에 의존한다. 사람이 도구를 쓴다. 수공업노동자의 노하우가 세습된다. 그런데 기계제에서는 기계에 사람이 종속된다. 노하우가 사라진다. 매뉴팩처 시대에도 기계가 있었지만 기계사용은 부차적이었다. 기계가 있어도 노동자가 복잡해서 잘 아는 사람이 사용했다. 노동자가 기계 바깥에서 조작했다. 하지만 기계제에서는 노동자가 기계의 일부로 들어간다.
매뉴팩처 시대에 노동자의 부분노동자화(불구화, 백치화)가 강화됐다. 이것이 맑스가 말하는 ‘소외’다. 자기 생산물에서 자기가 소외되는 것. 광물상인은 광물의 상업적 가치만 알 뿐 광물의 아름다움과 고유성을 깨닫지 못하게 된 것. 사물과 자연을 풍부하게 감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종사하는 분야에 국한해서 일면적으로 느끼는 총괄적 감성의 소외상태.
이제 노동자들은 ‘부분작업’의 수행자가 됐으며 그가 만든 상품 역시 개인적 생산물에서 사회적 생산물로 바뀐다. 예컨대 이전에 바퀴 수공업자는 자기가 만들어 장에 나가 팔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 하에서는 바퀴는 상품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