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제는 노동자들의 수공업을 토대로 하지 않는다. 수공업이 노동자가 발휘하는 힘과 기교, 민첩성, 정확성에 의존하는 것과 견주어 보자. 기계제에서부터 노동과정이 노동자의 한계를 벗어나서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서 조직되기 시작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기계제의 출현은 노동수단인 ‘도구’가 ‘기계’로 변신한 사태다. 도구와 기계는 어떻게 다른가. 맑스는 인간과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구분한다. 도구는 매우 인간적인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기계의 등장은 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죽음에 필적한다. 기계제는 인간 능력얼 하나의 제한성으로 장애물로 인식한다. 생산주체로서 인간의 죽음은, 매뉴팩처와 기계제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사태이다.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매뉴팩처와 수공업에서는 노동자가 도구를 사용하는데, 공장에서는 기계가 노동자를 사용한다.” “노동자는 더 이상 생산과정의 주행위자가 아니다.” 다시 말해 생산의 주체와 수단의 역전현상이 벌어진다. 즉, 노동자가 기계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 자본가는 기계를 왜 도입하는가
기계는 마멸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첨가할 수 없다. 기계의 가치는 생산물에 이전될 뿐 새로 추가되는 게 아니다. 기계는 여전히 불변자본이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왜 기계를 도입하는가.
1. 노동생산성 향상을 통해 필요노동시간을 줄인다. 기계를 통해 생산물이 많이 도입되면 노동자들의 생필품 가치가 떨어지고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비율도 달라진다.
2. 기계의 전면적 도입과 함께 자본가는 노동과정 자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된다. 독립 수공업자의 기계사용과 대공장의 복합적 기계체제를 비교해보자. 전자의 장인노동자는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으로 자본가는 작업량이나 근무시간 정도를 외면적으로만 강제한다. 형식적 포섭이다. 그러나 기계제 대공장 노동자는 자기 고유의 노동리듬을 잃어버리고 전적으로 기계의 리듬에 맞추어 노동해야 한다. 실질적 포섭이다.
3. 표준화된 물건을 대량생산하는 기계제에서 노동은 급속히 탈숙련화된다. 이로써 노동가능한 인구가 크게 늘어난다. 대표적인 층이 여성과 아이들이다.
“종전에 노동자는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했으며, 이를 형식상 자유로운 인격으로 처분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처자를 판매한다. 그는 노예상인이 된 것이다.”
4. 노동일의 연장도 가져왔다. 새로운 기계의 발명 이전에 본전을 뽑기 위해, 즉 투자비를 잃지 않기 위해 한시도 기계를 놀릴 수가 없다. 기계제로 인한 생산성 혁신은 노동의 절약으로 이어지지 않고, 노동인구 확대와 노동일의 연장으로 나타났다.
5. 노동강도의 강화. 노동일 연장이 사회적 반작용으로 결국 표준노동일이 제정되었다. 그러자 노동강도가 강화됐다. 기계제에서 노동강도 강화는 속도를 증가시키는 것.
6. 기계의 도입은 노동시장을 범람시키고, 기계에 의해 밀려나거나 위협받는 노동자들의 경쟁을 초래하여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 기계는 노동자의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위의 논의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일이다. 맑스에 따르면 모순과 적대는 기계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기계로 인해 노동자가 얼마든지 편해질 수 있다. 기계의 사용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필요노동시간 이외의 가처분 시간, 즉 비노동시간을 크게 늘린다. 맑스의 야심찬 꿈. “(노동자 대중이 지배력을 획득하면) 필요노동시간은 사회적 개인의 욕구들을 척도로 삼게 될 것이고, 더 이상 노동시간이 아니라 가처분시간이 부의 척도가 될 것이다.” 또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 사라지고 병영에서와 같은 규율도 사라지겠지만, 자기 신체를 발전적으로 생산하는 훈련과 연습은 남는다고 보았다.
맑스는 천국의 재료를 지옥에서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맑스에게 혁명은 발전된 생산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용법을 바꾸는 것이다. 맑스는 하나의 사회형태를 분석하면서, 거기서 대안 현실화의 잠재성을 발명하려고 한다. 대공업의 부정적 측면을 보면서도 긍정적 측면을 놓치지 않는다.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긍정을 발명한다.
가령, 대공업제의 존재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형시킬 여지를 남겼다. 대공업에서 나타나는 노동의 변환, 즉 노동자가 다양한 종류의 노동에 적합하게 되는 것은, 수공업 도제시스템에서 한 가지만 발달했던 개인이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어떤 메시지를 준다. 노동의 이동성과 기능의 유연성이 갖는 장점을 발명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직분을 벗어나 유연한 신체가 되는 것 자체가 혁명적 행위다. 전태일은 노동자 주제에 법전을 연구하고 노동자 주제에 경영전략을 공부하고 노동자 주제에 소설을 썼고, 그렇기에 평범한 노동자에 불과했던 그가 시대를 멈추게 했던 것이다.
자본가와 싸워 얻어낸 ‘직업학교’의 사례는 어떤가. 직업학교는 교육으로부터 배제된 노동자 계급과 그 자녀들에게 초등교육을 의무화한 것이지만 거기에서 맑스는 어떤 가능성을 읽었다.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주간학생에 비해 학업이 육체노동과 병행해서 이뤄졌을 때 더 교육효과가 있다고 증명한다. 육체가 실천이 빠진 교육은 소외된 교육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공장법은 자본의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지배를 가져온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역설이 발생한다. 공장법의 보급은 자본의 비배에 대한 투쟁을 일반화하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이 노골화되고 전면화될수록 그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를 형성할 요소들 역시 전면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