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는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곱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곱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이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곱터들이    고란이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 문정희       테마시집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의식치르기다. 그의 음반이 나오는 날은 조금 경건해진다.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가 된 것 같다. 설레지만 함부로 웃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엄숙함. 칠보단장 하고 교보에 가서 8집 정규앨범을 사왔다. 가사집을 먼저 볼 때도 있고 음악을 먼저 들을 때도 있는데 이번엔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똑똑 두드리고. 괜히 잿빛 씨디 케이스를 가만히 들어 귀에 갖다 대어 보았다. 기계를 통과하지 않고 그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침의 눈. 아침이면 사라질 밤새 내린 눈. 여릿한 자태가 녹을 것 같은 스틸컷을 보고 당장의 떠오른 말은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것 뿐인 동화의 나라에서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이길 바란 걸까. 그는.

그런데.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일출의 장엄함이 아침 내내 계속되진 않으며 비가 영원히 내리지도 않는다란 글에 밑줄 긋고, 나의 사랑도 반드시 어디쯤에서 그칠 것을 믿는다란 시구를 일찌감치 소녀적부터 외워두었으며, 죽어야할 운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란 글귀를 바로 어제 한자 한자 베껴쓰기도 했다. 이런 것들로 상실의 두려움을 대비하면서 보험료 납입하는 심정으로 감정을 연마했다. 그런데. 그러므로. 또 바라게 되네. 눈물처럼 영원히 흐르는 무엇을. 노란 꽃처럼 선명한 그것을. 사랑에 영원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삶의 유한함을 견디지 못하기라도 하는 걸까. 우리는. 

돌이켜보니, 혼자인 적이 없었다. 늘 사람과 말이 북적이는 곳에서 그를, 음악을 공유했다. 첫 기타음을 듣기만 해도 전율이 일었다. 노래방기계처럼 높은 점수와 팡파레와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내 안에서 자동으로 쏟아져나왔다. 충분히 반할 만한 음악인 적도 있었고 더러는 아닌 적도 있었겠으나, 변함없이 그의 음악은 얼룩진 일상을 덮어주는 축복같은 폭설이었다. 그의 음악과 소통하고 17년 만에, 팬사이트 운영자 10년 장기독재를 마감하면서, 비로소 그의 음악과 오롯이 마주하게 됐다. 사방이 눈부신 고립. 난생처음의 고립이 난감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지켜보길 12시간. 이제야 플레이를 누른다.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하고 바란 걸까.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