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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과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四肢)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 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 

 



혁명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기울길 바랐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볕드는 그런 세상을 꿈꾼 건 맞다. 정권교체가 아니라 말 통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 시어머니가 아들사랑을 이유로 며느리를 구박하지 않는 세상. 힘 없는 사람을 보고 같이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아지는 그런 세상. 선생님이 아이들을 때리지 않는 그런 세상. 광장에 나가서 혁명할 주제는 못되고 방구석에서부터 내 주변부터 정리하면서 잘 살아보려했다. 내가 몸 담은 곳, 내 생활반경에서 말이다. 살면서 느끼는 기쁨, 슬픔, 분노 같은 날감정을 글로 써보고 나누고 싶었다. 뭔가라도 영양가 있는 생각을 짜내서 그 한방울씩이라도 나누다보면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희망.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고 있다. 이방 저방 떠돌면서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피와 살로 삼아 쓴다. 덕이 되진 못해도 남에게 상처주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았느데 그럴 순 없을 거 같다. 다 좋을 순 없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방을 바꾸면서 내 친구 니체를 앉혀놓고 약속한다. 누구에게나 이해받는 글을 쓸 수는 없지만 나를 속이는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라고. '글 쓸 때 사람들은 이해되기를 원하는 동시에, 이해되지 않는 것도 원한다. 어느 누군가가 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자는 어느 누군가에 의해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고귀한 정신과 취향은 자신을 전달하려 할 때 청중도 선택한다. 그는 청중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단기를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