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부석사 / 정호승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고전이라는데, 절에도 '고전'이 있나보다. 가보지 않아도 서너번은 가본 듯 친숙한 절이 있으니, 부석사가 그렇다. 어쩐 일인지 '부석사'라고 발음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라는 쓸쓸한 제목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겠지. 무슨 맛집 소문처럼 부석사가 좋더라는 얘기를 듣고 가자고 조르는 친구손에 끌려 부석사에 이르렀다. 계단식으로 층층이 있는 일주문, 천왕문, 안양문 세 개의 문을 지났더니 멋진 세계가 펼쳐졌다. 시야가 확 트인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하는구나, 탄식했다. 새의 날개짓처럼 너울거리는 처마선을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몸을 던지고싶을 만큼 넉넉하고 깊고 깊은 숲.  

부석사가 애잔한 비애의 서정을 자아내는 이유를 처음 알았다. 무량수전 왼쪽에는 ‘浮石’이라고 새겨진 넓적한 돌이 있다. 사연을 읽어보니 당나라 처자 선묘의 사랑 이야기가 얽혀있었다. 의상대사를 사랑해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 따라와서는 의상이 창건한 이 부석사를 지키는 뜬돌, 부석이 되었다는 거다. 이거 예상치 못했던 사실. 사랑의 힘. 위대한 사랑이라 하면 천년을 두고 이어지는 정신적인 사랑을 떠올리는데, 육체적 물리적인 진짜 힘이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트럭도 들어버리는 엄마처럼, 엄청난 돌을 들어버린 그 여인, 맘에 들었다.

부석사를 지나 원주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부석'이라고 말하다가 정호승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떠올린다. 그리운 부석사. 전생의 비밀을 풀기라도 하듯이 퍼즐이 맞춰진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정호승이 왜 그랬을까. 이제서야. 부석사를 안지 이십년 넘고,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산지 십년도 지나서야. 눈물 방울방울 모아 고운 절 하나 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