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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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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도 / 이희중 파전을 익히며 술을 마시는 동안 더워서 벗어 둔 쇠걸상에 걸쳐 둔 저고리, 내 남루한 서른 살 황태처럼 담배잎처럼 주춤 매달려 섭씨 36.5도의 체온을 설은살 설운살 서른살을 말리고 있다 소란한 일 없는 산 속의 청주(淸州) 한가운데 섬이 있다 소주집 파랑도(波浪島) 바람 불어 물결 치고 비 오는 날은 사람마다 섬이며, 술잔마다 밀물인데 유배지 파랑도에서 저고리는 매달린 채 마르기를 기다린다 술병이 마르기를 풍랑이 멎기를 - 이희중 시집 , 민음사 사진을 시작할 때부터 알던 후배가 있는데 어제 첫 전시를 했다.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 친한 선배부부가 하는 곳이다. 보도자료 써 달라, 일손 부족하다며 몇 번을 도와달라던 언니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축하와 자봉을 동시에 해결하러 겸사겸사 ..
무심한 구름 / 허수경 한--, 청평쯤 가서 매운 생선국에 밥 말아먹는다 내가 술을 마셨나 아무 마음도 없이 몸이 변하는 구름 늙은 여자 몇이 젊은 사내 하나 데리고 와 논다 젊은 놈은 그늘에서 장고만 치는데 여자는 뙤약볕에서 울면서 논다 이룰 수 없는 그대와의 사랑이라는 게지! 시들한 인생의 살찐 배가 출렁인다 저기도 세월이 있다네 일테면 마음의 기름 같은 거 천변만화의 무심이 나에게 있다면 상처받은 마음이 몸을 치유시킬 수 있을랑가 그때도 그랬죠 뿔이 있으니 소라는 걸 알았죠 갈기가 있으니 말이란 걸 알았죠 그렇다면 몸이 있으니 마음이라는 걸 알았나 생선죽에 풀죽은 쑥갓을 건져내며 눈가에 차오른 술을 거둬내며 본다 무심하게 건너가버린 시절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절 - 허수경 시집 , 문학과지성사 하루 참 길다. 비..
역전易傳 1 / 이성복 며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눈물 흘리는 짐승들이 슬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기를 먹었습니다 넓적넓적 썰은 것을 구워먹으니 맛이 좋습니다 그날 아 침 처형당한 간첩의 시체라고 했어요 한참을 토하다 고개 들어보니 입가에 피범벅을 한 세상이 어그적어그적 고기 를 씹고 있었습니다 - 이성복 시집 문학과지성사 시장을 봤다. 월요일 화요일 이틀동안 김치찌개와 계란후라이에 밥 먹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장바구니를 챙겼다. 사실 좀 덜먹을 참이었다. 부산을 댕겨오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강건너 불구경을 한 것 같았다. 그동안 돼지처럼 꼬박꼬박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기름진 육체에서 나태한 사고가 나온다. 비대해진 몸으로는 세상의 외침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나름의 위..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 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나희덕 시집 , 창비 6월에서 7월로 건너온 일이 꿈만 같다. 글쓰기강좌 끝나고 보자며 미뤄놓았던 약속의 순례의 나날들. 남편이 월수금, 내가 화목토 주 3..
화분 / 이병률 - 빨간 자전거 타는 우체부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시간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 이병률 시집 문학동네 비가 하도 예쁘게 내려서, 어울리는 시와 음악을 찾아본다. 막대사탕 빨아먹듯이 당도 높은 시가 가끔씩 끌린다. 이를 테면 이런 날. 한 한시간 돌처럼 앉아있다 오고 싶은 날. 내용과 상관없이 내 마음을 끄는 ..
벚꽃 핀 술잔 / 함성호 마셔, 너 같은 년 처음 봐 이년아 치마 좀 내리고, 말끝마다 그렇지 않아요? 라는 말 좀 그만해 내가 왜 화대 내고 네년 시중을 들어야 하는지 나도 한시름 덜려고 와서는 이게 무슨 봉변이야 미친년 나도 생이 슬퍼서 우는 놈이야 니가 작분지 내가 작분지 술이나 쳐봐, 아까부터 자꾸 흐드러진 꽃잎만 술잔에 그득해 귀찮아 죽겠어, 입가에 묻은 꽃잎이나 털고 말해 꽃 다 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게 니는 니가 좀 따라 마셔 잔 비면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지 말고 술보다 독한 게 인생이라고? 뽕짝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술이나 쳐 또 봄이잖니 - 함성호 시집 , 문학과 지성사 지난 금요일 파티하쥐에서 인디밴드 네 팀이 출연했다. 홍대 두리반 주차장이 해방구가 됐다. 미니 락페의 열기. 오랜만에 잘 놀았다. '푼..
영회(咏懷) / 오장환 후면에 누워 조용히 눈물 지우라. 다만 옛을 그리어 궂은비 오는 밤이나 왜가새 나는 밤이나 조그만 돌다리에 서성거리며 오늘 밤도 멀리 그대와 함께 우는 사람이 있다. 경(卿)이여! 어찌 추억 위에 고운 탑을 쌓았는가 애수가 분수같이 흐트러진다. 동구 밖에는 청랭한 달빛에 허물어진 향교 기왓장이 빛나고 댓돌 밑 귀뚜라미 운다. 다만 울라 그대도 따라 울으라 위태로운 행복은 아름다웠고 이 밤 영회의 정은 심히 애절타 모름지기 멸하여 가는 것에 눈물을 기울임은 분명, 멸하여 가는 나를 위로함이라. 분명 나 자신을 위로함이라. - '시인 오장환을 노래하다' 음반 속지에서 아침마다 한 시간 씩 청소한다면서요? 저번에 누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그 놀라는 모습에 나는 더 놀랐다. 청소 해야죠. 아침 6시 반에 일..
버스 정거장에서 / 오규원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 오규원 시집 , 문학과지성사 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