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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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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간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 어느 겨울.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한 시간 가량 운전을 해서 집에 왔다. 남편과 아이들은 잠들고 나는 거실에 멍하니 있었다. 두 눈만 꿈뻑꿈뻑. 모드변환 중이다. 몸에서 식용유 냄새랑 트리오 과일향이랑 시어머니와 동서의 목소리가 빠져나가길, 다시 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댁에 다녀오면 왠지 늘 착찹하고 뒤숭숭했다. 목구멍에 잔가시가 걸린 이 느낌은 뭘까. 이건 증상이 아닐까. 일체유심조를 이루고자 반야심경을 읽는 심정으로 시집을 뒤적거리는데 문자가 왔다. 뭐하니. 그냥 있어. 술자리를 마치고 가는 길인데 뭔가 아쉬워서 연락했다는 그. 문득 마음이 동했다. 자기재건 본능인지 떠남의 욕망인지 모를 기습적인 충동이 일었다. 우리는 술꾼처럼 ‘딱 한잔만’ 하기로 했다. 그는 2호선 반대방향으로 갈아..
최승자, 절망의 골수분자 나의 삼십대는 두 번 기록될 수 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풍파도 보람도 넘실넘실. 많이 웃었고 많이 울었다. 고통과 행복이 쌍둥이처럼 나란하던 시절, 비극버전을 쓴다면 최승자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제목만으로도 목차와 내용을 메울 수 있을 것 같다. 등등. 처연하고 당돌한 웅성거림. 그 말들의 꽃다발을 덥석 받아 안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이 있다. 결혼과 출산을 마치자 가족이 마구 늘어났다. 정서노동의 분량은 인간의 기준치를 초과했다. 혹처럼 내 삶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들을 떼버리고 싶었다. 24시간 이인삼각 경기를 치르는 것처럼 절뚝절뚝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먹고 자고 멍하니 있는 생리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가 가장 괴로웠다. 그들이 제거되는 ..
말들의 풍경 시즌2 '여자의 시집'에 초대합니다 시를 읽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시를 읽으면 왜 좋은 것일까. 이유를 모른 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낯선 이국의 언어처럼 막막한 그것들을 저마다의 경험과 입김을 통해 더듬더듬 번역하였습니다. 시어 하나 하나, 한 행 한 행을 우리는 풀어나갔고 시 한편으로 세상이 환해지는 환희를 맛보았습니다.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이 가는 사이 시즌 1 '올드걸의 시집'이 끝났습니다. 열 세권을 시집을 읽었지요. 그 과정에서 알았습니다. 시는 약자의 언어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층적인 억압의 결을 섬세하게 살려낸 고운 언어! 지배언어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현실과 감성을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써내려간 기록이, 바로 시였습니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위로받았나봅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누가 내 머릿 속에..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14 나를 빨아들이는 길. 나를 뱉아내는 길. 빠져나올 수 없는 길. 들어갈 수 없는 길. 영원토록 길이 나를 가둔다. 영원토록 길이 나를 해방시킨다. 떠나야 할 시각이 길게 드리워진다. 그가 끝나도 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길 모퉁이에 이따금씩 추억의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다. 우연의 형식들로 다가오는 모든 필연을 견디면서 이미 추억이 다 된 나무 한 그루 백발의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다. - 최승자 시집 문학과지성사 악행을 저지르기를 대놓고 해본 적은 없는 거 같다.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악행이 된 경우는 많겠지만 말이다. 항상 강박에 가까운 임무의식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일터에서건 가정에서건 조직에서건. 완벽한 임무수행. 깔끔한 뒷마무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연의 형식들로 다가오는 모..
관계 / 고정희, 임태경 / 열애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번째 회신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거다 천기를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 이성복 1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천국은 말 속에 갇힘 천국의 벽과 자물쇠는 말 속에 갇힘 말이 말 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홀례 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2 나는 지리멸렬한 행동을 수식하기 위하여 내 나름으로 꿈꾼다 나는 돌 속에 바람 불고 사냥개가 천사가 되는 다시 칠해지는 관청의 재색 담벽 나는 한 번 젖은 것은 다시 적시고 한 번 껴안으면 안 떨어지는 나는 내 시에는 종지부가 없다 당대의 폐품들을 열거하기 위하여? 나날의 횡설수설을 기록하기 위하여? 언젠가, 언제가 나는 를 완성 못 하리라 3 숟가락은 밥상..
시와 음악이 난무하던 성탄의 밤 어느 한 해 성탄절이 ‘詩’와 ‘음악’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 생은 복되다, 주머니에 손 넣고 만지작거릴 추억이 있으니까. 2011년 12월 24일 자정을 보내며 든 생각입니다. 예고했던 대로 ‘말들의 풍경’ 성탄특집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뭉근한 촛불처럼 한들한들, 흥겨운 캐롤처럼 왁작지껄, 시와 음악이 난무하고 말과 웃음이 교통하는 시간이었죠. 고종석이 ‘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라고 말했는데 살짝 정정하고 싶군요. 시는 세상에서 가장 센티멘털한 놀이라고요. 이날 세미나의 공식명칭은 '말들의 풍경 : 시적인 것의 추구’에요. 시를 읽은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 널린 시적인 울림을 주는 노랫말이나 글을 가져오기로 했지요. 약간의 음식도요. 아래 분들이 함께 했습니다. - 음향담당; 몽월 (스마..
평범해지는 손 / 심보선 하얀 손 창백한 손 흐린 초점으로 보면 사라지는 은하계 같은 손이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여자는 소파 위에 반가사유상처럼 앉아 있다 오랜 윤회 끝에 한 천 년 만에 이 자세를 되찾았다는 듯이 누구에게도 이 자세를 빼앗길 수 없다는 듯이 손의 주인이 말을 한다 고마워 너를 만나고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남자의 손은 여자의 얼굴에서 피어난 연꽃 같다 여자의 얼굴은 연못처럼 고요하다 둘에서 셋 아니면 셋에서 넷이 되었겠지 그 정도겠지 왠지 이 방의 가구들은 하나하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듯하다 부처가 방금 걸어 나간 적멸보궁 같다 이제 당신도 그만 나가보지 남자가 문을 열고 나가자 여자는 바로 늙어가기 시작한다 그 자세 그대로 소파 위에서 이별을 반가사유하며 영원히 늙어가겠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