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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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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 유하 풍뎅이가 방충망을 온몸으로 들이받으며 징허게 징징거린다 (난 그의 집착이 부담스럽다) 나도 그대 눈빛의 방충망에 마음을 부딪치며 그렇게 징징거린 적이 있다 이 형광등 불빛의 눈부심은 어둠 속 풍뎅이를 살게 하는 희망? (글세, 희망이란 말에 대하여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그가 속삭인다) 그 무엇보다도, 징징대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풍뎅이는 벌써 풍뎅이의 삶을 버렸으리 - 유하 시집 , 문학과지성사 아들이 졸업했다. 졸업식 전날, 아들의 등짝을 두드리며 치하했다. “욕봤다. 중학교 3년을 무탈하게 마쳐 다행이구나.” “앞으로 3년 동안 더 힘들 텐데요.” “아들, 공부가 고생스럽지?” “뭐...” “주변에 이십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더라. 엄마가 차려주는 밥 먹고 정해진 과목 공부할 그 때가..
방금 젊지 않은 이에게 / 황인숙 너는 종종 네 청년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나는 알지 네가 켜켜이 응축된 시간이라는 것을 네 초상들이 꽉꽉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지나온 풍경들을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 지니고 날아다니는 바람이 너라는 것을 그 때 너는 청년의 몸매를 갖고 있었다 희고 곧고 깨끗한 아, 청량한 너의 청년! 그 모습은 내 동공 안쪽 뇌리에 각인돼 있고 내 아직 붉은 심장에 부조돼 있다. - 황인숙 시집 , 문학과지성사 이십대는 아름다운 나이다. 나의 삶이 아닌 남의 삶에서 느낀다. 내가 이십대를 지날 때는 ‘이십대’에 관심이 없었다. 긴 터널을 다 지나고 나니 이제야 이십대가 보인다. 나의 이십대 막바지부터 연을 맺어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눈 태지매니아 친구들. 불 같았다. 어디로 옮겨 붙을지 몰랐다. 어디서..
46 빈 손 / 성기완 당신을 원하지 않기로 한 바로 그 순간 나는 떠돌이 가 돼 그것을 놓았는데 다른 무얼 원할까 그 무엇도 가지기가 싫은 나는 빈 손, 잊자 잊자 혀를 깨물며 눈 을 감고 돌아눕기를 밥먹듯, 벌집처럼 조밀하던 기억 의 격자는 끝내 허물어져 뜬구름, 이것이 내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긴 한데 다시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렇게 잊혀지고 말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때문에 슬픔은 해구 보다 더 깊어져 나는 내 빈 손을 바라보다 지문처럼 휘도는 소용돌이 따라 망각의 물로 더 깊이 잠수하 며 중얼거려 잊자 잊자 - 성기완 시집 문학과지성사 “요즘 뭐 하고 지내셨어요?” “방황하면서 지냈어요.” 말해놓고 나니 푸푹 한숨 같은 웃음이 터졌다. 2010년 마지막 날, 수녀님과 이별을 고하기 위해 마주했다. 지난 일 년 수녀님들이 만..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
그날 이후 / 최승자 그날 이후 나는 죽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후의 기술이다. 물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것은 과장이다. 그렇다고 못 속아주는 분 또한 어엿한 바보이시다. 그러면 한 곡조 꽝! 저 강 저 벌판을 돌아 내 XX가 간다. 묻어다오, 헤매는 이 발목 흐르는 이 세계를, 묻어다오. 이런 시를 훌쩍이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그러나 나는 내 XX를 다 소비해버린 거디엇다. - 문학과지성 신작 시집, 김현 編 시집을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나도 시를 읽고 싶은데 무슨 시집부터 어떻게 읽으면 되느냐고.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시가 좋으면 시를 읽어야지 어쩌라고. 공무원 시험과목도 아니고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겠는가. 근데 사람들은 어느 시인의 어떤 시집을 짚어주길 원했다. 같은 ..
흰둥이 생각 / 손택수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 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 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 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 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 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 지 다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 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히 ..
죽은 가난한 사람에게 / 파블로네루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사람을 묻는다; 우리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 그는 너무도 어렵게 지낸 나머지 그가 사람으로서 인격을 지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집도 땅도 없었고, 알파벳도 이불도 구운 고기도 없었으며, 그리하여 여기저기로 노상 옮겨다녔고, 생활의 결핍으로 죽어갔다, 죽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게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삶이다. 다행히도(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은 마음이 똑같았다, 주교에서부터 판사에 이르기까지 그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은 죽었다, 나무랄 데 없이 죽었다, 우리의 가나한 사람, 오 우리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 그는 그 많은 하늘을 갖고 뭘 할지 모를 것이다. 그는 그걸 일굴 수 있을까, 씨 뿌리고 거둘 수 있을까? 그는 항상 그걸 했다; 잔혹하게 그는 미..
우리 동네 구자명씨 / 고정희 - 여성사 연구 5 맞벌이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씨 일곱 달 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그래 저 십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히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 고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