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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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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 김종삼 샘물이 맑다 차갑다 해발 3천 피트이다 온통 절경이다 새들의 상냥스런 지저귐 속에 항상 마음씨 고왔던 연인의 모습이 개입한다 나는 또다시 가슴 에이는 머저리가 된다 - 김종삼 시집 민음사 시 한줄 읽고 음악 한곡 찾아 듣고 원고 한 줄 쓰면서 계속 시계를 힐끔거린다. 회의하러 가야하는데 회상을 듣고 있다. 9시 반. 그래도 회의는 가야한다는 마음에 몸을 일으켰다. 4월 22일 슬픔과 충격을 가누지 못해 결석을 해버렸었다. 영하 10도 이하의 엄동설한에도 빠지지 않았던 나. 근면성실 외길인생인데.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고사하고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버스정류장.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찾는데 없다. 오후 2시에 약속 땜에 핸드폰을 챙겨야했다.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나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
낙화 /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 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시집 , 문학사상사 공포의 토요일. 안 그래도 울렁증이 가라앉질 않고 입까지 두 군데 헐어서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어찌나 무섭게 내리는지. 진심 추웠다. 수업 중에 핸드폰이 연달아 울린다. 나중에 쉬는 시간에 보니까 도착한 메시지가 7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줄 문자다...
곡강이수 / 두보 一片花飛 減却春 일편화비 감각춘 風飄萬點 正愁人 풍표만점 정수인 且看欲盡 花經眼 차간욕진 화경안 莫厭傷多 酒入脣 막염상다 주입순 江上小堂 巢翡翠 강상소당 소비취 苑邊高塚 臥麒麟 원변고총 와기린 細推物理 須行樂 세추물리 수행락 何用浮榮 絆此身 하용부영 반차신 한 조각 떨어지는 꽃잎에도 봄은 줄어드는데 만점 꽃잎이 바람에 날리니 참으로 시름에 잠기네. 봄을 마음껏 보려고 하나 꽃잎은 눈을 스치고 지나가니 어찌 몸이 상할까 두렵다고 술을 마시지 않으리. 강가 작은 정자에는 비취새가 둥지를 틀었고 부용원 뜰가 높은 이들 무덤에 기린 석상도 뒹구는구나. 세상이치를 따져 보건대 마땅히 즐거움을 따를지니 어찌 헛된 영화에 이 한몸 얽맬 필요가 있으랴. 하늘에서 보면 아파트 단지가 새하얗지 않을까. 벚꽃잎이 바닥에 다..
푸르른 들판 / 여간 들판의 갈매빛은 봄하늘과 합쳐져 하늘 파랗고 들판빛 높다. 나 이제 푸르름 속으로 가노라니 힘은 쑥대 위를 날아오를 듯 이 몸 멀리 있는 것 이미 깨닫고 돌아가는 기러기의 고달픔 애처롭다. 날카로운 활시위 소리 변방에 가득한데 외로운 그림자는 강 물결에 떨어진다. - 여간, 내가 외로움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얼마전에 알았다. 그날 아침에 애들 학교 보내고 빨래 개키고 설겆이 하고 집 대충 치우고 우리동네 새로 생긴 파스쿠치 2층 명당자리에 아침 8시 50분에 도착했다. 파란 하늘이 들어찬다. 안은 한적했고 밖은 화창했다. 2층에서 본 거리. 의자에 눕듯이 앉아 차가 다니고 연둣빛 이파리가 한들거리는 길가를 보고 있자니 내가 꼭 6인실 창가자리에 입원한 환자 같았다. 노곤했다. 천원 내고 커피를 리필하고..
절명시 / 성삼문 북소리 둥둥둥 이 목숨을 재촉한다. 고개를 돌이키니 해는 벌써 서산을 넘네. 황천 가는 길에 주막 하나 없으니 오늘밤 뉘 집에서 이 밤 새울꼬. - 성삼문 Beethoven's Tempest Sonata -- Wilhelm Kempff 외로움과 다툰 어제 하루. 김광석을 듣고 빌헬름 켐프도 듣고. 유하의 세상의 모든 저녁을 읽고 성삼문 시조도 읽어 보고. 술 마시면 글을 못 써 술을 안 마셨는데 글도 못쓰고 잠들었다. 주막 하나 없는 삶에 실망한다. 내가 예전에 클린트이스트우드 등 중장년 예술인에 환호하면 늙은 사람만 좋아한다고 친구들이 구박했는데 저런 깊고 순수한 눈빛과 치열한 파장만이 나를 사로잡는다. 외로움이란 인간의 표정을 아는 사람. 이해가능성 바깥의 세계를 열어주는 음악.
한 잎의 女子1 / 오규원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그만 여 자,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 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여 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여 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 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오규원 시집 문학과지성사 목이 말랐다. 아침부터. 시를 안 읽었다. 일주..
어부 /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 김종삼 시집 민음사 내가 사랑하는 것들. 할증요금 올라가는 택시에서 듣는 옛날가요. 십대후반부터 이십대 초반까지 듣던 주옥같은 노래들. 밤마다 심취해 베껴쓰던 노랫말들. 토씨하나 안틀리고 재생가능. 오늘같은 경우라면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촛불. 한강변 끼고 달리면서.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했는가. 바람아 멈추어라 촛불을 지켜다오. 모든 사랑은 바람 앞의 촛불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약 일이십분정도. 밤과 침묵의 현전. 경험할 순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바깥을 유람한다. 눈치..
꽃단추 /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 손택수 시집 실천문학사 달빛길어올리기. 인사동 어디쯤에 자리한 민속주점이 떠오른다만 영화제목이다. 박중훈 강수연 예지원 장항선 등이 나온다. 전주에서 찍었다. 한지에 관한 영화다. 우리 것(알리기)에 천착해온 임권택 감독. 역시나 스크린에 펼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