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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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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 정일근 '생을 담은 한잔 물이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사람 떠나고 침대 방향 바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 이불과 베개 새것으로 바꾸고 벽으로 놓던 흰머리 창가로 두고 잔다 밤새 은현리 바람에 유리창 덜컹거리지만 나는 그 소리가 있어 잠들고 그 소리에 잠깬다, 빈방에서 적막 깊어 아무 소리 들을 수 없다면 나는 무덤에 갇힌 미라였을 것이다, 내가 내 손목 긋는 악몽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먹은 것 없어도 저녁마다 체하고 밤에 혼자 일어나,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바늘로 따며 내 검은 피 다시 붉어지길 기다린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정일근 시집, 문학과지성사 "저는 혼자 살아요" "결혼.... 안 하셨나봐요?" "해봤어요" ..
작심 / 문태준 '보름은 나를 당신을 부드럽게 설명하는 시간' 모든 약속은 보름 동안만 지키기로 했네 보름이 지나면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다른 데를 보듯 나는 나의 약속을 외면할 거야 나의 삶을 대질심문하는 일도 보름이면 족해 보름이 지나면 이스트로 부풀린 빵 같은 나의 질문들을 거두어 갈 거야 그러면 당신은 사라지는 약속의 뒷등을 보겠지 하지만, 보름은 아주 아주 충분한 시간 보름은 나를 당신을 부드럽게 설명하는 시간 그리곤 서서히 말들이 우리들을 이별할 거야 달이 한 번 사라지는 속도로 그렇게 오래 - 문태준 시집 , 문학과지성사 배우 김영호씨를 만났다. 김영호. 한번쯤은 같은 반이었을 것 같은 아니면 소설에서 주인공 친구로 나왔을 법한 순하디 순한 이름의 주인공다웠다. 훤칠한 키보다 먼저 들어오는 순박한 웃음과 허공을 응시하는 멍한 눈빛에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
사랑은 / 채호기 '사랑은 그렇게 왔다'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 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 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 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 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또 비가오면 / 이성복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 이성복 시집 문학과지성사 “아침에 눈 뜨면 내가 오늘은 또 왜 깨어났나 싶다. 밥만 축내기 위해서 사는 거 같고. 이대로 가면 좋겠는데...” 어머님 대사다. 지난해부터 부쩍 심약해지셨다. 그러고 보니 벌써 연세가 칠십 중반이시다. 그 나이는 누구에게도 예정에 없던 나이일..
자네 집에 술 익거든 / 김육 '백년덧 시름잊을 일을' 자네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하옵네 백년 덧 시름 잊을 일을 의논코자 하노라 - 김육 (1580∼1658) 삼일동안 술을 연구했다. 전통주에 대한 원고 때문이다. 인터넷 자료도 찾고 서점에 가서 책도 보았다. 사실 난 사람을 만나서 필을 받아야 원고를 신나게 쓰고, 책상에 앉아서 자료 찾아 글 쓰는 건 좀 괴로워하는 편인데 이번엔 즐거웠다. 한번 마시면 맛이 독특해 못 일어난다는 앉은뱅이술 한산 소곡주, 빛깔이 고와 눈이 먼저 취한다는 진도 홍주, 배꽃처럼 뽀얗고 융단처럼 보드라운 이화주. 석잔에 5리를 못간다는 면천 두견주 등등. 아주 군침을 꼴깍 삼켜가면서 썼다. 탈고를 하고나니 취한다. 술도 안 마시고 취하는 게 아까워서 아쉬운대로 복분자주 한사발 마시고 있..
다시 가을 / 도종환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 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을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웃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 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 도종환 시집 , 문학동네 소녀의 가을은 낙엽과 시와 노래로 충만했다. 앙케이트 할 때면 좋아하는 계절에 ‘가을’ 써놓고 9월부터 미리 들떠 지냈다. 고1때 국어선생님을 사모했는데 ‘낙엽을 태우면서’를 배우는 시간엔 애들이랑 우애동산에서 낙엽을 쓸어와 교단에 쫙 깔아놓고 선생님을 ..
강 / 황인숙 ‘눈도 마주치지 말자’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황인숙 시집 , 문학과지성사 직업의 종류가 만 가지가 넘는다. 그간 여러 직업의 세계를 접했는데 아무래도 사보일을 하니까 회사원을 가장 많이 만난다. 같은 샐러리맨이라도 업종에 따라 삶이 다르다. 매스컴에서 신의 직장이라고 소개하는 공기업, 금융권 고액연봉자 일수록 쫓기듯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