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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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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 김남주 '날 받아주는 가슴하나 없구나' 내가 시를 쓸 때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그저 미지근한 시를 쓰고 있을 때는 제법 보아주는 얼굴이 있고 이름 불러주는 이도 있더라 내가 노래를 부를 때는 맑지도 않고 흐리지도 않고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마냥 술에 물 탄듯 물에 술 탄듯한 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는 제법 들어주는 귀도 있고 건네주는 술잔도 있더니 없구나 이제는 시여 노래여 날 받아주는 가슴 하나 없구나 날 알아주는 얼굴 하나 없구나 칼을 품고 내가 거리에 나설 때는 쫓기는 몸이 되어 떠도는 신세가 되었을 때는 - 김남주 시집 헤어진 것들에 대해 한 번도 쿨해본 적이 없었던거 같다. 미련이라는 그림자를 질질 끌고다니는 무거운 생인가. 나는. '저는 왜 착취당하는 느낌이 들까요. 즐겁게 일할 수 없다면 그만 하고싶습니다.' 지나치게 저렴한..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는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곱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곱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이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곱터들이 고란이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과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四肢)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
사랑의 편지 / 유하 - 빛을 구할 데는 마음밖에 없나니 -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7 어둔 밤, 페달을 돌려 자전거 전등을 밝히고 사랑의 편지를 읽는 사람아 그 간절함의 향기는 온 땅에 가득하기를 사랑은 늘 고통을 페달 돌려 자기를 불 밝힌다 자전거의 길을 따라 어떤 이는 와서 그 빛으로 인생을 읽고 가기도 하고 구원을 읽고 가기도 한다 그대, 부디 자전거가 가는 길로 사랑의 편지를 부쳐다오 세상의 유전이 다하고 암흑이 온다 해도 빛을 구할 데는 마음밖에 없나니 나는 나를 불 밝혀 그대 편지를 읽으리라 - 유하 시집, 중에서 '내 설움에 겨워서 우는 거지 뭐. 죽은 사람 위해 우나'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엄마의 절친 아줌마가 한없이 목놓아 울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막 울고 싶을 때 초상집에 가서 울고 오면 티도 안 나고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정지용/ 유리창 - 버스, 마을버스 버스 정류장. 말의 느낌부터 시적이다. 시적이란 건 느낀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정류장에서 나는 깨어있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나무결 무늬가 들어간 벤취에 앉아있노라면 어디 강둑에라도 앉은 것처럼 관조하는 자세가 된다. 마음의 결이 올올이 살아난다. '나'에 불이 켜지는 느낌이랄까. 코드 빼놓고 살다가 버스정류장 아래 서는 순간 다시 작동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마 버스 정류장이 주거공간 바깥으로 나아가는 관문 같은 의미이기에 그럴 것이다. 정류장 아래서면 나는 한마리 새처럼 가볍고 자유로워진다. 가로수의 나뭇잎 떨림 하나 사람들 표정 하나에도 눈길이 가고 하늘도 비로소 깊은 얼굴을 드러내니까. 아스팔트 사이에 난 잡초도 들여다보고, 내 구두의 뒤축이 어슷하게 닳은 것도 알아챈다, 수첩도 꺼내 보고 친구..
봄비, 밤에 / 김정환 '떠나도 좋다는 의미일까' 나는 몸이 떨려 어릴 적, 내 여린 핏줄의 엉덩이를 담아주시던 어머님 곱게 늙으신 손바닥처럼 포근한 이 비는 이젠 내 마음 정한 뜻대로 떠나도 좋다는 의미일까 산은 거대한 짐승를 가린 채 누워 있고 봄비에 젖고 있어 나는 몸이 떨려 그러나 새벽이면 살래살래 앙칼진 개나리를 피워낼 이 밤, 이 비의 소곤거림은 혹시 이젠 외쳐야 된다는 말일까 이젠 외쳐야 된다는 말일까 - 김정환 시집 시월의 마지막 밤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들어야 하고, 봄비 내리는 밤에는 봄비, 밤에를 읽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한 삼십년 전쯤 봄, 어느 밤에도 이렇게 비가 다소곳이 내렸나보다. 어여 떠나라, 외쳐라 등 떠미는 건 햇살 담은 봄바람 만이 아니다. 일정한 운율과 같은 가늘기로 내리는 차분한 봄비도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흔드는 ..
그리운 부석사 / 정호승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시집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고전이라는데, 절에도 '고전'이 있나보다. 가보지 않아도 서너번은 가본 듯 친숙한 절이 있으니, 부석사가 그렇다. 어쩐 일인지 '부석사'라고 발음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라는 쓸쓸한 제목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겠지. 무슨 맛집 소문처..
또 다른 소식 / 황지우 '저지르든가 당하든가' 삶이란, 끊임없이 부스럭거리는 事故 그러니, 저지르지 않으면 당하게 되어 있지 그러니, 저지르든가 당하든가 서울에 도착하여 고속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택시 주차장으로 가면 국민학교 교사처럼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신사가 핸드 마이크로, 종말이 가까웠으니 우리 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외쳐대지 않던가 사람들은 거지를 피해가듯 구원을 피해가고 그는 아마도 안수받고 암을 나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혼자서 절박해져가지고 저렇게 왈왈대면 저렇게, 거지가 되지 - 황지우 시집 글을 쓰기 싫을 때는 더 책에 매달린다. 글 쓰기를 회피하는 가장 손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읽기의 쾌락'에 빠져들기다. 얼마나 좋은가. 책을 읽고 있으면 머릿속 여기저기 전구가 들어오고 이걸 예전부터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