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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사랑은 / 채호기 '사랑은 그렇게 왔다'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 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3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 채호기 시집 <수련>,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