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 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3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 채호기 시집 <수련>, 문학과지성사
친구가 여친이 갑자기 자기를 피한다고 고민한다. 작년에 둘이 해외로 여행도 다녀왔으나 두 사람 연애사를 지켜본 바로는 왠지 불안했다. 이런저런 이별의 징후들을 터놓는데 여친 마음은 이미 떠난 것 같았다. 일단은 먼저 연락하지 말고 인연의 흐름을 지켜볼 것을 권했더니 얼마 전 명품백 선물해줬다며 서운하고 분한 표정이다. “정말 사랑하지 않나보네. 그런 게 다 생각나는 걸 보니.” 그가 멋쩍게 웃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제 수위를 회복하듯 지리멸렬하게 관계를 이어가는 커플들. 삶을 이끄는 것은 습관이므로 사랑-감정은 저 만치 가버렸어도 연인-생활은 가능하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일수록 오래. “무려 3년이나 사랑과 연애를 해봤으니 큰 손해는 아니잖아. 질투, 안달, 불안, 희열 그 폭풍같은 감정 어디서 경험할 거야.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다' 난 이 말이 정말 진리같아. 외워둬. 덜 억울할 거야.”
사랑을 안 해본지가 오래 됐다는 그녀. 남친은 거의 남편 취급이다. “도대체 주위에 멋있는 남자가 한 명도 없어. 회사가도 죄다 성적매력을 상실한 속물들뿐이야. 특히 유부남들. 유부녀들도 마찬가지야. 애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야. 좀 고상한 삶의 가치를 지향할 수 없나. 예쁜 옷 입고 잘 보이고 싶기는커녕 머리조차 빗을 의욕도 없다니까. 아, 사는 게 지루해” 사랑햇살 없으면 바로 시드는 스물아홉의 절규. 정확히 말해서 사랑이 수반하는 설렘이 벌써 또 그리운 욕심쟁이의 하소연. “네 생존본능 이해한다” 커피를 끓어 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는 것이 사랑의 힘(최영미)이니까. "근데 지금까지 사랑한 사람 몇 명이야?" "글쎄. 한 열명" "헉. 그렇게 많아? 스친 사람 말고. 진짜 좋아한 사람" "주변사람이 안 걸 기준으로 다섯 명" "그 정도면 이십대 성적표는 괜찮네. 풍족하기까지 하다. 이제 삼십대가 되니까 적응해야지. 갈수록 사랑할 기회는 줄어들어."
“가을바람 타고 살랑대는 내 얘기 좀 들어봐.” 선배가 들떠 전화했다. “어제 모임에서 중3 때 좋아했던 남자애를 처음 봤는데 너무 멋지게 나이 들었더라. 우리 집이랑 정 반대인데 차로 데려다주는데 가슴이 떨리더라니까. 그리고 너 ***알지? (선배의 옛날 애인) 오랜만에 메일이 왔어. 장문의 편지로 안부랑 결혼사진 주고받았는데 나보고 미소가 그대로래. 그가 옛날에 나한테 즐겨 쓰던 표현이 있는데 오랜만에 보니까 왜 이렇게 설레니.” 그 문구가 맘에 들어 나도 외웠다. the smile which I loved... “난 말이야 사랑이 시작될 때의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할까 궁금하고 자꾸 거울을 보게 되고 말 한마디에 가슴이 뛰고....” “알지. 그 살 떨리는 집중.”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오는 사랑.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가는 사랑. 우리의 사랑 뒷담화는 두 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 사랑에 대해 할 말 많은 계절. 사랑이 왔다 갔다 하는 분주한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