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 뜨면 내가 오늘은 또 왜 깨어났나 싶다. 밥만 축내기 위해서 사는 거 같고. 이대로 가면 좋겠는데...” 어머님 대사다. 지난해부터 부쩍 심약해지셨다. 그러고 보니 벌써 연세가 칠십 중반이시다. 그 나이는 누구에게도 예정에 없던 나이일 것이다. 늘 카랑카랑 한 음성으로 나를 주눅 들게 하던 어머님이 이젠 풀 죽은 목소리로 하소연을 늘어놓으시니 기분이 묘하다. 아니, 불쌍하다. 신혼 때 벙어리 3년으로 살며 쓴 눈물 꽤나 삼켰다. 엄마는 결혼할 때 “엄마를 봐서라도 시어머니에게 말대답하지 말고 들어드려라”고 당부했고 난 그걸 지켰다. 어머님은 너무 정정하고 나는 너무 미련했다. 어머님은 동서를 보고 나서야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해대기는 너한테 해대고 당하기는 동서한테 당한다고 말하실 정도로.
비록 감정노동은 심했을지언정 나처럼 몸이 편한 며느리도 없었다. 여자는 죽을 때까지 일해야한다며 어머님은 당신 살아있는 동안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매년 김장도 혼자 몰래 하시고 명절도 그렇다. 이번 추석에도 일을 거의 다 해놓으셨다. 완벽하게 정성 다해. 어머님을 출전시키고 싶은 전국대회가 두 개 있는데 '자식사랑 헌신대회'와 '살림 위생대회'다. 분명히 상위 1%다. 매번 놀란다. 어머님의 아들과 손자를 향한 상상초월 사고체계와 그들을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열리는 지갑과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빛나는 걸레와 냄비를 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먼지 하나 없이 살림하시느라 손은 뼈마디와 심줄이 튀어나와 울퉁불퉁 뻣뻣하고 군살로 까슬까슬하고 엉망이다.
그간은 어머님의 가족이기주의에 매몰된 삶이 숨 막혔는데, 어쩐 일인지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초지일관 헌신하는 삶에 존경심마저 생긴다. 어머님의 귀한 아들을 내가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어머님의 아들과 살면서 나도 덩달아 좋은 거 먹고 좋은 거 입으며 은덕을 입었는데 그걸 너무 당연히 여긴 거 같다. 어머님 때문에 속상한 일은 되새김질 하면서 말이다. 또 내가 아이들에게 지극 정성 최선을 다하는 것도 어쩌면 어머님에게 배운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워하면서 닮기의 영향이라면, 그건 감사할 일이다. 가끔 어머님이 의지도 된다. 아버님이 덕윤이 성적표 가져오라시니까 구원투수처럼 등장하셔서 "왜 그걸 보려고 하시느냐"며 "서울대 안 가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그저 잘 먹이고 건강하게만 키우라"고 당부하셨다. 어머님으로서는 획기적인 가치전환이다.
고부가 닮은 듯 변해간다. 사실 어머님은 내 순위에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면서도 죄스러워 남편한테 “당신 엄마니까 좀 잘하라”며 괜히 훈계도 했다. 근데 '같은 여자로서' 내 몫이 있는 거 같다. 남자들은 감정이입이 어려운 여자만의 천형적인 고단함과 외로움이 있다. 아들만 둘 키우신 어머님은 서형이 재롱을 보면서 종종 “너는 딸 있어서 좋겠다” 하신다. 제가 딸이 되어드리겠다는 말은 기어코 입밖으로 안 나오지만 어쨌든 그런 쓸쓸한 푸념이 귀에 걸린다. 어머님의 비에 젖은 모습 아른거린다. 비에 잠겨도 미동도 않으실 어머님이고 아들네 영락한 살림살이가 회생하는 그날까지 눈 못감으실 강인한 분이건만... 예전에는 나보다 더 오래사실 것 같았는데, 속눈썹까지 하얘진 어머님 얼굴 눈에 밟혀 괜시리 마음 짠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님이 늙으신 게 아니라 내가 늙어가는 거 같아 왠지 좀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