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종종 네 청년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나는 알지 네가 켜켜이 응축된 시간이라는 것을 네 초상들이 꽉꽉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지나온 풍경들을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 지니고 날아다니는 바람이 너라는 것을
그 때 너는 청년의 몸매를 갖고 있었다 희고 곧고 깨끗한 아, 청량한 너의 청년!
그 모습은 내 동공 안쪽 뇌리에 각인돼 있고 내 아직 붉은 심장에 부조돼 있다.
- 황인숙 시집 <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사
이십대는 아름다운 나이다. 나의 삶이 아닌 남의 삶에서 느낀다. 내가 이십대를 지날 때는 ‘이십대’에 관심이 없었다. 긴 터널을 다 지나고 나니 이제야 이십대가 보인다. 나의 이십대 막바지부터 연을 맺어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눈 태지매니아 친구들. 불 같았다. 어디로 옮겨 붙을지 몰랐다. 어디서든 활활 타올랐다. 다 내어주고 다 불태웠다. 한줌의 재로 남아도 초라하지 않았다. 소나기를 흠뻑 맞아도 꺼지지 않았다. 그들을 보면서 이십대에 한번쯤은 모조리 자신을 태워야한다는 것을 배웠다.
삼십 대 후반 자유기고가 시절에 만난 이십대 얼굴들. 아무리 작고 소박한 것이라도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청춘은 전신이 빛났다. 주위를 밝게 했다. 거침없고 도도해서, 주눅 들지 않아서 예뻤다. 자신감과 이십대는 동의어였다. 사진가의 어시스턴트들. 씩씩했다. 날마다 휴일도 없이 무거운 조명가방 들고 전국 팔도를 돌면서 일을 배웠다. 박봉과 초과노동을 견디다 못해 대개는 그만두고 떠났지만 1~2년을 버틴 친구들은 어느 날 혼자서 취재를 나오고 의젓하게 사진을 찍어냈다. 신기했다. 어느날 몸을 뒤집는 아기처럼 그들의 비약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게 좋았다. 그들을 통해서 이십대는 미련함이 필요한 나이임을 확인했다.
삶의 무게중심이 연구실에 실리면서 그곳에서 아름다운 20대의 얼굴을 무더기로 본다. 대학을 졸업하고 혹은 휴학하거나 거부하고 연구공동체에서 살아간다. 자기 친구들은 스펙을 쌓고 정장 입고 회사에 출근을 하는데 그들은 연구실에서 동료들과 밥 해먹고 목침 두께의 철학책을 붙들고 씨름하고 기타를 배우고 영어공부를 하고 연극을 한다. 장애인 야학과 청소년 공부방에서 자신과 처지가 다른 이웃들과 공부하고 어울린다. 투쟁의 현장에도 합류하고 바자회나 이벤트 등 큰 행사도 진행하고 토요일엔 영화보고 맥주도 마시고 논다.
큰돈을 벌지 못해도 궁상스럽지 않다. 맛난 음식 먹고 좋은 친구와 벗하며 호연지기 누린다. 설마 존재-불안이 없기야 할까. 하지만 주류에 진입하지 않았기에 적어도 주류의 삶에서 이탈되지 않기 위한 불안은, 그들에겐 없다.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무효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잘 살고 있는 거다. 삶은 가야할 길이 정해질수록 불안하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까봐. 낙오될 까봐. 이십대는 낯선 세상에 자신을 놓아두는 삶의 실험이 필요하고 그로 인한 ‘불안’과 배짱 좋게 겨뤄도 좋은 때다. 요즘 연구실 친구들을 보며 느낀다.
하지만 언제 미련해야 하고 언제 불같아야 하고 언제 도도해야 하고 언제 불안과 맞장 떠야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지나기 전에는. 지나고 나서도 헷갈린다. 그게 덫이었는지 닻이었는지. 그저 온갖 가치의 충돌과 실수방황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나이. 타인과 세계를 향해 마음 내어주는 시기. 그래서 이십대는 아름답다.